283화. 마(魔)의 극치 (3)
“음?”
전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다 무너져 가는 폐건물.
약속한 하오문주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그렇다면 저 건물 안에 하오문주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기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기세를 보면 절정고수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제법 강단 있는 무공을 익힌 것 같았다.
하오문은 무공이 아닌 정보를 중시하는 단체. 일파의 문주라 해도 무공이 강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의심할 이유가 없는 기도였다.
‘한데 왜 이리 생생하지?’
다만 껄끄러운 건 저 기도에 드리워진 생기(生氣)가 무척 활발하다는 것이었다.
하오문의 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친 늙은 문주의 기도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보다 훨씬 젊고 패기만만한 생기였다.
‘하오문주의 나이는 못해도 환갑이 넘었을 것이다. 이런 기도와는 어울리지 않아.’
전평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함정이라도 파 놓은 건가? 이 나에게?’
그때였다.
덜컥!
삭은 목재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전평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가 포권을 취했다.
“개방의 주인을 뵈어 영광이오.”
“자네는?”
“하오문을 이끄는 사람이오.”
“자네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문주님께서는 문의 전권을 내게 일임하셨소. 문주는 아니지만, 하오문을 대표한다고 보셔도 될 것 같소.”
전평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일었다.
“소문주?”
“그렇소.”
공야치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바로 하오문의 차기 문주 공야치외다.”
천하의 용두방주 앞에서 이만한 배포를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도 달리 없을 것이다. 비록 소문주의 직책이지만, 전신 가득 피어오르는 존재감은 이미 일파의 종주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야치라…… 이것 참.”
전평이 입맛을 다셨다.
“내 자네를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 문주에게 보자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네였어. 느닷없이 이리 나타나 주다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하는가?”
“나도 마찬가지요.”
평소 무뚝뚝하던 공야치의 두 눈에 시퍼런 광채가 일었다.
“나 역시 당신을 무척이나 보고 싶었소.”
“당신이라…… 다른 건 몰라도 자네, 예의는 좀 차렸으면 좋겠군. 그래도 내 명색이 개방의 주인이거늘, 언사가 너무 거칠다고 생각하지 않나?”
“우리가 예의 따질 사이는 아니잖소.”
“어허? 이건 또 대뜸 시비로군.”
“시비가 아니오. 우리는 중원에서 가장 천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고, 당신네 역시 거지 떼에 불과하지 않소?
나는 천하디천한 놈이라 거지에게 예의를 갖출 만큼 배워 먹질 못했소이다.”
전평이 피식 웃었다.
“하긴, 자네 말도 맞군.”
공야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전평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딱딱한 얼굴에 드리워진 저 미소가 은근히 신경을 거슬렀다.
“거지가 예의를 논하고 오의(汚衣)를 벗어 던졌다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소.”
“아, 이거 말인가?”
전평이 소매를 흔들었다. 다 해진 누더기가 아니라 평범한 의복이었다. 허리춤에 몽둥이 하나가 매달려 있지만, 누구도 개방의 방주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거지는 거지다워야 한다. 이는 곧 개방의 문규(門規)라 할 수 있소. 한데 개방의 정점이라는 당신이 문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군.”
“정확히 말하면 거부한 게 아닐세. 개방의 방주는 문규를 초월하거든. 어떤 모습을 하든, 내가 용두방주란 사실은 변하지 않네.”
전평이 뒷짐을 졌다.
능글맞고 여유롭던 모습은 사라지고, 위엄찬 종주의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으되, 담소를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대리로 보냈군. 그렇다면 이리 시간 잡아먹을 필요 없이, 담소나 나눠 봤으면 하네.”
공야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평이 피식 웃었다.
“술이라도 한잔 내올 것이지, 자네는 참 딱딱하군.”
“나는 바쁜 사람이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속히 하길 바라오.”
“문주란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말아야 하는 법. 머리는 뛰어날지 모르겠지만 아직 격이 부족해 보이네.”
“할 얘기는 그게 전부요?”
“물론 아니지.”
전평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왕지사 이런 만남이 되었으니, 자네 말마따나 담소는 빨리 끝내는 게 좋겠네. 대화가 길어지면 내가 자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게 될 것 같거든.”
“다시 한번 쓸데없는 말로 심기를 흐트러트리면 그 즉시 자리를 파하겠소.”
“호오? 자신감이 대단하군. 알겠지만 용두방주라는 직책은 똑똑하다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닐세. 자네,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물론이오. 그리고 이번 한 번만 봐주겠소. 두 번은 없소. 할 말을 하시오.”
“흐음.”
가만히 공야치를 보던 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기 싸움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본론을 말하겠네.”
전평이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이만 무대에서 빠지게.”
앞뒤 다 잘라먹은 말이지만 공야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하오문의 능력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위협이네. 그럼에도 자네들을 놔둔 이유는, 그간 자네들이 주워 먹을 것을 알아서 가렸기 때문이야.
주제 파악 잘하는 놈들 죽이자고 우리 힘을 소진할 필요는 없으니까.”
“…….”
“하지만 근래 자네들은 다소 주제넘은 짓을 많이 했더군.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안 먹던 걸 먹다간 탈이 나게 마련일세.”
“…….”
“이제라도 확실하게 물러난다면, 지금껏 저지른 일들은 모두 묻어 두겠네.
자네 말마따나 난 거지일 뿐이네만 적어도 그 정도 힘은 있네. 그러나 계속 이따위로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전평의 안광에 은은한 살기가 어렸다.
“그땐 우리도 칼을 빼 들 수밖에 없다네.”
공야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의 말, 잘 들었소이다.”
“음? 하하하!”
전평이 웃음을 터트렸다.
“문주가 그리도 아끼는 후계라고 들었네. 과연 그럴 만하군. 머리만 좀 똑똑할 뿐,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놈이라 여겼거늘 생각보다 훨씬 유연해.
문주가 후계를 잘 뒀어.”
“얘기는 끝났소?”
“아직 안 끝났다네.”
전평이 씨익 웃었다.
거지답지 않게 무척이나 하얀 이빨이 공야치의 무정한 안광에 비쳤다.
“확답을 못 받았잖은가?”
“…….”
“내 말을 잘 들었다고만 했지,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았네. 뭐, 당연히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네만 들을 건 듣고 가야지. 아니 그런가?”
물끄러미 전평을 보던 공야치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말대로요. 나는 당신 말을 잘 들었을 뿐, 이 판에서 빠질 생각은 없소.”
전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네는 분명 유연한 사람일세. 하지만 너무 고집이 세. 처음 보자마자 알았네.”
“그렇소?”
“그렇다네.”
전평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함부로 몽둥이를 드는 사람이 아닐세.
내 비록 방주의 위(位)에 걸맞은 무력을 갖추었으나, 내 진짜 힘은 무공이 아니라 머리와 혓바닥이네.
어지간하면 무력이란 패는 꺼내 들지 않는다는 말이네.”
스르륵.
전평의 왼손이 허리춤에 걸린 곤(棍)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말일세. 꺼내야 할 때는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았네.”
“그렇다고 생각하오.”
“음?”
“당신은 폭력적인 사람이오. 무림인 중 폭력적이지 않은 자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당신은 유독 심하지.
거기에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권위적이기까지 하오.”
“하하하! 다소 섭섭한 평가일세.”
“그래서 그런 짓도 했겠지.”
무심한 눈빛 속, 끝을 알기 어려운 분노가 새어 나왔다.
“정보를 통제한다는 명목하에 마을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그런 폭력성 때문일 것이오.”
“……?!”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지일지라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다. 그것이 곧 개방이라 들었소.
개방이 추구하는 것은 협(俠) 그 자체. 용두방주란 협의 화신(化神)이기에 방도들도 방주의 명에 절대복종하지.”
두 눈은 증오로 불타오르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졌다.
반대로 전평은 미소를 잃었다. 여유와 오만으로 가득하던 두 눈동자 또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협잡과 폭력, 권력과 오만으로 점철된 개방은 더 이상 협의 상징이 아니외다. 그리고 개방을 그따위 시궁창 집단으로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오.”
“…….”
“그래서 나는 당신이 무섭지 않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나를 만나 어떤 얘기를 할지, 내가 거부하면 어떻게 나올지도 전부 예상하고 있었단 말이오.”
“누구냐.”
전평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굳어져 있었다.
“네놈은 누구지?”
“하오문의 소문주 공야치요.”
“설마 네놈, 그곳의 생존자인가?”
공야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곳의 생존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소.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는 거요.”
“…….”
“이 사태가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그 끝이 어디인지를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오.”
공야치의 눈엔 더 이상 분노도, 증오도 없었다. 입가에 맴돌던 미소도 사라졌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 속, 강인한 자신감이 감돌았다.
“그 끝에 개방이 멸망할지 말지는 오직 당신에게 달렸소이다.”
“크하하핫!”
전평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마냥 똥 밟은 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법 재미있는 날이기도 하군. 개방의 멸망이 나한테 달렸다? 푸하하핫!”
연신 웃음을 터트리던 전평의 얼굴 역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개방의 흥망성쇠는 방주인 내 손에 달렸지. 적어도 하오문의 작은 주인 따위에게 달리진 않았어.”
“…….”
“이런저런 잡소리가 많았지만 결국 그것이로군. 자네는 이 일에서 빠질 생각이 없어. 그렇지?”
“그렇소.”
“명을 재촉하는군.”
스르륵.
전평이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철제 몽둥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평범한 몽둥이가 아니었다.
때 묻은 천으로 돌돌 싸인 손잡이 끝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취옥(翠玉)이 보였다. 개방의 신물인 취옥장(翠玉杖)을 깎아서 만든 취옥단봉(翠玉短棒)이었다.
전전대 방주 때 바뀐 개방의 신물은 그 자체로 효율적인 무기요, 동시에 개방의 상징이었다.
공야치가 취옥단봉을 힐끔거렸다.
“끝을 볼 생각이오?”
“자네가 말했지. 개방의 흥망성쇠는 나에게 달렸다고.”
우우우웅.
취옥단봉에 옥빛 진기가 흘렀다. 개방 최고의 내공심법이라는 옥현귀진신공(玉炫歸眞神功)이 발현된 것이다.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하오문의 흥망성쇠는 자네에게 달렸네. 한데 자네는 이미 판단을 내렸군.”
전평이 씨익 웃었다.
“앞으로 하오문의 이름이 들릴 일은 없을 것일세.”
“자신만만하시군.”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배짱을 부린 이유가 있을 게야. 필시 고수들을 배치해 뒀겠지.”
“물론이오.”
“하지만 내게도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다네. 자네 기감에는 잡히지 않겠지만, 문파 하나를 하룻밤 새에 잿더미로 만들 전력이 항시 대기 중이지.
자네는 날 잘못 봤어.”
공야치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안전을 위해 고수들을 부른 게 아니오.”
“음?”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소.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이뤄 주기 위해 길목을 터 줬을 뿐이오.”
전평이 인상을 찡그렸다.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그때였다.
훅!
기다렸다는 듯 사방을 에워싸는 막강한 기파.
중원에서 보기 힘든 이질적인 기운이 삽시간에 퍼진다.
전평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고, 은신하고 있던 개방의 고수들이 서둘러 모습을 드러냈다.
공야치가 웃으며 말했다.
“소개해 드리겠소. 중원 최강, 최악의 집단이라 불리는 천마신교의 고수들이오.”
콰아앙!
저 멀리, 백 명의 마인이 여기저기서 건물을 부수며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