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마(魔)의 극치 (4)
“가주님. 유족들에게 전할 위로금이 전부 책정되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아닙니다.”
남궁단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광목림에서 죽은 가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유족들에게 부고를 전했다. 부고를 전하는 것은 가주인 자신이 직접 했다.
천하의 남궁가주가 직접 찾아왔으니 어찌 욕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유족 중 몇몇의 얼굴에서 원망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제 아들을, 남편을 데리고 가서 목숨을 잃게 한 사람이니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유족들이 앞으로 잘 살아 나갈 수 있도록 금전 문제를 해결해 주는 등, 생활의 편의를 봐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좋으련만.
“시간이 날 때 꼭 한 번씩 찾아뵙겠다는 서신과 함께 전하도록 해라. 물론, 반갑지 않은 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 보아라.”
검사가 나가자 남궁단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천룡궁…….’
수개월 전, 안휘 전체에서 의문의 납치 사건들이 발생했다.
어지간하면 관가의 힘으로 해결될 일이지만, 문제는 납치를 당한 가문 대부분이 무가(武家)였다는 것이다.
결국 남궁세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하지만 남궁이 나섰다는 소문이 퍼졌음에도 납치 사건은 줄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서야, 납치를 벌인 세력이 천룡궁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천룡궁 정도의 조직이면 주변 시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완전 범죄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무인이 수사에 들어갔음에도 납치 사건은 계속되었다. 걸리지 않을 거란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걸려도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그 말인즉.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봐주는 누군가의 정체는…… 의천맹일 확률이 높았다.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맹주, 그대는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이오?’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의천(義天)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어찌 그리 사악할 수 있나 싶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의 남궁가 정도론 의천맹주를 어찌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의천맹주는 구파일방의 문파들 대다수와 손을 잡고 있었다. 심지어 오대세가 중 세 곳과도 손을 잡고 있었다.
물론 끈끈한 협력 관계는 아니다. 진정 마음을 주고받은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궁가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깊어지는 건 한숨이요, 늘어나는 건 주름살이다.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한 남궁단이 집무실을 나와 주변을 거닐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무사들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평소라면 일일이 답을 해 주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고민을 잔뜩 안고 걷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음?’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객당 앞이다.
파파파팡!
객당 안,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은은한 파공성이 들렸다.
병장기가 공기를 찢는 소리였다. 진기가 담기지 않았음에도 이런 힘찬 소리가 나온다.
남궁단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객당으로 들어갔다.
사악! 퍼펑!
가문의 최고 귀빈들에게 연다는 객당 특실.
그 앞 널따란 공터에서 한 사내가 웃통을 벗고 검권(劍拳)을 휘두르고 있었다.
남궁단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굉장하구나.’
새삼스레 감탄이 나온다.
상의를 벗은 마동필의 육체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길고 유연하면서도 잘 압축된 근육은 놀라운 지구력과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체격은 컸지만, 운신에 지장이 될 정도로 크진 않다. 강검(强劍)으로 연마한 육체지만 때에 따라선 강검 못지않은 유검(柔劍)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나조차도 저리 단련하진 못했거늘.’
검객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육체라 할 만하다. 소교주의 호위무사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한낱 호위의 몸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단련도였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자는 순간까지도 검(劍)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저런 몸은 나오지 않아. 가히 무(武)를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운 남자로다.’
파아아앙!
강렬한 일권으로 공기를 터트린 마동필이 자세를 풀었다.
그가 남궁단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남궁단이 무안한 얼굴로 다가갔다.
“미안하오. 마 호위의 수련이 몹시 경쾌하여,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말았소.”
“괜찮습니다.”
타인의 무공 수련을 엿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애라도 안다. 하지만 마동필은 개의치 않았고, 그렇기에 남궁단은 더 미안해졌다.
마동필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소교주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걷다 보니 어느새 객당까지 오게 되었소. 지나치려는데 경쾌한 소리가 나서 들러 봤소이다.”
“그러셨군요.”
“서 소교의 상태는 어떻소?”
“기력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하기야, 워낙 강건한 사람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한데…….”
마동필이 의아한 듯 남궁단을 바라보았다.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허허, 마 호위가 보기에 내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은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웃으며 마동필을 보던 남궁단은, 그 순간 이 무뚝뚝한 사내와 얘기를 나눠 보고 싶어졌다.
“잠시 시간이 있소?”
“물론입니다.”
“어디 가긴 좀 뭣하니, 잠깐 여기 앉읍시다.”
인공 연못의 둘레를 장식한 돌덩이에 앉은 남궁단이 담담하게 말했다.
“많이 힘들겠소.”
“무엇이 말입니까?”
“모시는 사람이 대단하면 아랫사람도 피곤해지기 마련 아니겠소.”
마동필이 고소를 머금었다.
“맞습니다. 소교주님을 모시는 것은 삼생의 영광이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요.”
“서 소교는 내가 본 젊은이들 중 단연 발군이오. 사실, 도저히 청년으로 보이지 않더군.
마치 대종사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소. 실제로 그만한 무공도 쌓은 것 같고.”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이립이 안 된 나이에 십대고수급의 무공이라…… 십 년, 아니 오 년만 지나도 천하에 서 소교를 당적할 무인이 없겠소.”
당적할 무인이 없다. 즉, 만부부당(萬夫不當)이며 천하제일이다. 남궁단은 서량을 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동필은 말하지 않았다. 오 년이 아니라 오십 년이 지나도 넘보기 힘든 진짜 마신(魔神)이 존재하고 있음을.
어쩌면 그 마신은 사람이 아니니, 천하제일의 범주에 넣어서는 안 될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확실히 서량은 차기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서 소교를 보며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한 게 무엇인지 아시오?”
“무엇입니까?”
“그가 교만하지 않다는 것이오.”
모시는 분을 향한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무뚝뚝한 마동필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마 호위도 잘 알 거요.
혈기 넘치는 나이에 중원 최강들과 견줄 무(武)라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만큼 거만해지기 마련인데, 서 소교는 그렇지 않더군.”
남궁단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미소였다.
“훗날 얼마나 대단한 거인이 되어 중원 땅에 그 그림자를 드리울지, 사뭇 기대가 되오.”
“가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음? 무슨 말이오?”
“천마신교와 남궁세가는 명백한 대립 관계입니다. 말하자면 소교주님은 가주님께 적입니다.”
남궁단이 피식 웃었다.
“적에게 감탄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소. 훗날 창칼을 겨누게 되면, 그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딪치면 그뿐이오.”
“……그렇군요.”
“큰 사람이 되기 위한 증명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나 자신을 위한 증명은 지금껏 연마한 혼(魂)으로 하는 것이오.”
남궁단의 눈이 빛났다.
“적어도 난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오. 그래서 상대가 신교의 소교주라도 겁이 나진 않소이다.”
남궁단이 멋쩍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뭐, 그래 봤자 십초지적도 되지 않겠지만.”
마동필은 생각했다.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내라고.
부드럽고 유연한 무인이다?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은 유연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일대호걸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과 거칠 것 없는 의기(義氣)가 함께하니, 온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
이미 스스로 완성을 이룬 자.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불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정정하시지요. 오초지적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소? 하하!”
한바탕 크게 웃은 남궁단.
이내 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근래 내 가치관이 많이 흔들리고 있소.”
“왜 그렇습니까?”
“조금 전까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아시오?”
남궁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구름 한 점이 없다.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이번에 광목림에서 죽은 무사들의 유족에 관련한 일을 처리하고 왔소.”
“…….”
“생명의 무게를 어찌 돈으로 가늠할 수 있겠느냐마는, 실질적으로 유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돈이외다.
직접 찾아가 사죄도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진 않겠지. 아니, 돈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충분할 수 없을 거요.”
“그렇겠지요.”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가주님과 함께한 무사들은, 결코 자신의 죽음을 가주님의 탓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럴 것이오. 나 역시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말이오.”
남궁단이 고소를 지었다.
“십수 년이나 이 일을 해 왔음에도, 그 마음의 무게만큼은 가늠이 되질 않더이다.”
남궁단을 빤히 보던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 모든 조직의 수장들은 그와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알고 있소. 어쩌면 내 고민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러한 고민 때문에 가치관이 흔들릴 분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남궁단이 한숨을 쉬었다.
“가치관……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오.”
“하면?”
“이 길이 옳은지 모르겠소.”
마동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우리가 천룡궁 때문에 그곳에 있었다는 건 알고 있을 거요.”
“그렇습니다.”
“천룡궁이 그간 저지른 잔혹한 짓은, 필경 뒤를 봐주는 이 덕분에 그리도 길게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오.”
상대가 상대인지라 굳이 언급하지 않지만, 남궁단이 누굴 말하는지는 마동필도 알고 있었다.
‘의천맹주.’
남궁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남들은 이렇게 말하오. 대세를 따르라고, 세상의 가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니 고집부리지 말고 쉬운 길을 택하라 말하오.”
“쉬운 길이라고 반드시 틀린 길은 아닙니다.”
“그렇소. 하지만…… 근래 날 유혹하는 길은 분명 틀렸다고 생각하오.”
“한데 왜 고민하시는 겁니까?”
“사람이 죽소.”
“…….”
“내 사람이, 내 가문의 사람들이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소.”
남궁단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바짓단에 구정물 조금 묻는다고 내 삶이 어찌 되는 것도 아닌데, 괜한 고집 때문에 내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려.”
“당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음?”
“바짓단에 구정물이 묻으면, 스스로에게 증명할 혼(魂)이 혼탁해집니다. 가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말입니다.”
마동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민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마 저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고뇌가 깊었을 듯합니다.”
“허허.”
“저는 일개 호위무사라, 가주님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습니다. 다만…….”
“다만?”
“모두가 다 하니 나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빠지는 순간 사람은 당당함을 잃게 됩니다.
이유인즉, 그것이 옳지 않은 길임을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소교주님도, 저도 가주님을 높이 평가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가주님께서는 모두가 굴복한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더군요.”
“…….”
“그것은 천하십대고수들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멍하니 마동필을 보던 남궁단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가내 어른들도 아니고 신교의 무사에게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소이다.”
“위로는 아니었습니다만.”
“세상은 모를 것이오. 그들이 마교(魔敎)라고 경원시하는 이들이 이토록 당당하고 멋진 사람들이라는 걸.”
마동필이 피식 웃었다.
“그걸 알려 주려고 소교주님께서 직접 중원에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뭐라? 하하!”
남궁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밖의 담소로 기분이 제법 상쾌해졌소이다. 혹시 시간 되면, 이 사람과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소?”
“저는 소교주님을…….”
“여기서 마시면 되잖소. 아는지 모르겠지만, 안휘 일대에서 본가를 건드릴 조직은 없소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마동필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몇 잔만 마시겠습니다.”
“하하! 좋소!”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운공 중이던 서량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예민한 그의 감각은 두 사람이 정원에서 나누는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서량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염병, 잘하면 사귀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