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마(魔)의 극치 (5)
“헉헉!”
내가고수의 호흡은 언제나 깊고 일정하다. 그 호흡이 흐트러졌다는 건 몸이 한계에 달했음을 증명한다.
지금 전평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쐐애애액!
전평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퍼어억!
뒤통수를 스치고 날아간 화살 하나가 땅에 박혔다.
놀랍게도 화살은 깃대 부근만이 간신히 튀어나와 있었다. 무시무시한 관통력, 무공으로도 막기 벅찬 관통력이었다.
‘제기랄!’
뒤를 돌아보기도 힘들다. 그 약간의 힘도, 시간도 아까웠다.
지금은 오직 도주만이 살길이었다.
파아아앙!
심한 내외상에 극심한 체력 저하까지 겪고 있음에도 신법은 경쾌하기만 했다.
개방 비전 만리추풍(萬里秋風)이다. 소림의 금강부동(金剛不動), 무당의 제운종(梯雲縱), 곤륜의 운룡팔식(雲龍八式)과 함께 정파 무림 사대신법으로 손꼽히는 절기인 만큼 내공 효율이 무척 뛰어났다.
파아아앙!
만리추풍은 기세를 타면 탈수록 빨라지는 신법이었다. 전평의 이동 속도가 조금씩 상승했다.
하지만.
번쩍!
등골이 오싹했다.
종전의 화살보다 더 위협적인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전평이 재빨리 상체를 수그렸다.
콰쾅!
땅거죽이 터져 나갔다.
강력한 충격파가 그의 전신을 덮쳐 왔다. 신법을 포기하고 땅을 굴렀기에 충격파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크윽!’
울컥 핏물을 토할 뻔했다.
무언가를 토하면 안 그래도 거친 호흡이 더 흔들리게 된다. 전평은 목젖까지 치고 올라온 핏물을 그대로 삼켰다.
하지만 심화된 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상태는 이전보다 훨씬 불안정해 보였다.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재빠른 쥐새끼로군.”
그야말로 모욕적인 언사였다.
하지만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아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다.
파아아앙!
다시 한번 힘을 내는 전평.
그의 뒤를 쫓는 남자가 혀를 찼다.
“저 빙궁의 작은 주인이 본교의 손님으로 왔을 때 이런 말을 했었지.
무인이 후퇴할 때를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고. 제 목숨의 무게를 알고 도주하는 건지, 그저 제 목숨이 아까워서 도주하는 건지 환히 보인다고 했어.”
남자는 신교에서 북해빙궁의 소궁주와 함께 생활했던 전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근엄하진 않지만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연륜이 묻어 나왔다.
“거지대왕, 자네는 명백히 후자일세. 이리도 치졸한 자가 용두방주였을 줄이야. 개방도 다 됐군.”
빤히 들리지만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렸다. 전평에게 남자의 얘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흡!”
강하게 조이는 호흡.
이내 등판이 쪼개질 것 같은 살기가 다시 한번 쏘아졌다.
콰르릉!
무시무시한 권법이었다.
일격에 천근의 무게감이 실린다. 또다시 지면이 터져 나가는데 그 깊이만 반 장에 달할 정도였다.
전평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런 미친!’
대체 어떤 괴물이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구파의 장문인들보단 한 수 아래라지만, 그 역시 초절정고수임은 분명했다.
수적 우위에 압도당했다곤 해도 이리 무력하게 당할 만한 실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대마존?’
아니다. 구대마존이 왔으면 자신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하지 말자.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야!’
파아앙! 파아아앙!
만리추풍의 경신술에 취팔선보(醉八仙步)의 비기까지 섞었다. 내공 소모가 극심하고 내상도 더 심화됐지만 일단은 생존이 먼저였다.
파파파팡!
순식간에 전면 숲으로 들어가는 전평.
그의 뒤를 따르던 양정(楊貞)이 손을 들었다.
“그만.”
사사삭!
그의 뒤를 따르던 호법원 고수들이 일제히 신법을 멈추었다.
양정이 미소를 지었다.
“괜히 저기로 들어갔다가 쓸데없이 칼 맞으면 어디 가서 한풀이도 못 하겠지.”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으냐?”
“예!”
양정은 전대 호법원 일 조장이자 전대 백팔마장까지 겸한 희대의 고수였다.
호법원 위사들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인 것이다. 자연 군기가 바짝 잡힐 수밖에 없었다.
“급할 것 없다. 체력도 비축할 겸, 천천히 접근하도록 하자.”
“예!”
“녀석들 참.”
숲으로 시선을 돌린 양정이 피식 웃었다.
“이보게, 거지. 자네는 사지로 발을 들인 거나 다름이 없다네.”
“허억! 허억!”
이전보다 훨씬 흐트러진 호흡.
내상이 더욱 심해졌고 길도 거칠었다. 지혈해 둔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평의 얼굴은 밝았다.
‘따라오지 않는다. 드디어 따돌렸는가?’
평상시의 그라면 그런 희망찬 생각 따윈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방의 방주가 되기 전에도 이런 추격전을 벌인 적 없던 그였다. 애초에 그는 방주가 될 그릇이 아니었으나, 전대 방주를 암습하여 축출한 뒤 스스로 취옥단봉의 주인이 되었다.
그릇은 작아도 실력은 있어 지금껏 개방을 이끌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선 그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그의 욕은 마인을 향하지 않았다.
‘제대로 주시하라고 명했거늘 여기까지 올라오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구안조를 시켜 남쪽에서 올라온 마교도들을 감시하라 하였다. 시시각각 보고하라 명을 내렸고, 실제로 오늘 아침에도 보고를 받았다.
한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엄한 놈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니! 이런 무능력한!’
개방의 호위 부대 용호풍운(龍虎風雲)의 거지들은 물론, 장로 셋까지 저 마교도들 손에 죽고 말았다.
그는 다짐했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구안조 놈들부터 모조리 삶아 죽여 버리리라.
분노로 눈이 뒤집힌 전평이 다짐에 다짐을 거듭할 때.
콰앙!
전평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신법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땅에서 터진 충격파 때문에 몸이 허공으로 뜬 것이다.
‘헉!’
퍼억!
나무에 부딪힌 그의 몸이 땅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쿨럭!”
기어이 피를 토하고야 말았다. 충격파에 실린 내공이 무지막지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서, 설마?!’
옥현귀진신공의 흐름이 이전보다 훨씬 굼떠졌다. 일순간 침투한 경력이 온 혈도를 휘저어 놓은 것이다.
‘마기!!’
거칠고 파괴적이며 왠지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진기, 바로 마기였다.
‘이익!’
옥현귀진신공은 강호 일절의 무공이었다. 상처 입은 혈도는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든 내력의 흐름을 되살릴 수 있었다.
전평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
“바쁜가.”
낮고 일정한 음색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좀 거지답군.”
조롱기 섞인 말투인데 목소리에는 여전히 고저가 없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전평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선 사내는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마인이었다.
평범한 얼굴, 체격도 그리 대단치는 않다.
그러나 평범한 체격 안에 무시무시한 힘을 숨겨 놓았다. 전신 가득 피어오르는 기파가 온 숲을 뒤흔들 정도로 대단했다.
몸이 멀쩡했다 한들, 맞서 싸워 이길 엄두가 나지 않을 고수였다.
“누, 누구냐?!”
실제로 이름을 듣기 위해 물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순순히 답했다.
“내 이름은 고구다. 신교의 형법당주(刑法堂主)를 맡고 있다.”
전평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가 마교도라는 건 무섭게 타오르는 마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형법당주라니?
천하 어떤 조직이든 형법(刑法)을 담당하는 조직의 수장은 강하고 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가 형법의 조직을 맡는 것이다.
눈앞의 이 남자는, 지닌 실력만큼이나 심혼(心魂)도 단단하리라.
“……개 같은!”
비로소 전평은 깨달았다.
자신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하오문의 소문주가 삼도천의 뱃사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평이 소리쳤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손을 잡을 곳이 없어서 마교 놈들과 손을 잡아?! 내 반드시 네놈을 갈아 마실 것이다!”
악을 지르는 전평.
고구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필시 그 감정도 표정만큼이나 미동이 없을 것이다.
우우우웅.
고구의 오른손에 강렬한 마기가 깃들었다.
전평은 다급해졌다.
“잠깐 기다리게! 내 얘기를 일단…….”
퍼어어엉!!
“크아아악!”
전평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한쪽 다리가 날아간 사람이 멀쩡히 서 있기란 무리였다.
투둑!
전평은 본능적으로 혈을 짚었다. 그러자 쏟아지던 핏물이 단숨에 멈추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번쩍거렸다. 즉각 혈을 짚지 않았다면 과다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고구가 전평 앞에 섰다.
“유언 정도는 들어 주지.”
“크흐흑! 주, 죽일 놈!”
“식상한 유언이군.”
고구가 손을 들었다.
날카롭게 일어선 마기. 이전보다 훨씬 농밀해진 마기였다.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한 듯, 마기의 운용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잘 가라.”
“자, 잠깐! 할 말이 있다!”
“뭐지?”
전평이 고개를 쳐들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 표정에는 급박함이 가득했다.
“살려 주게! 나를 살려 주면 자네들이 원하는 정보를 주겠어! 제발!”
고구의 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그 안광 속에는 깊은 실망감이 맺혀 있었다.
‘이것이 개방의 용두방주인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기색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이놈은 정말로 살기 위해 저런 소릴 지껄이는 것이다.
협의 상징이라는 개방의 수좌가 저따위 언사를 뱉는다는 건, 그만큼 개방이 썩었다는 걸 의미하리라.
‘부끄럽군.’
천산파 역시 의천맹 소속이었다. 지금은 멸문해 사라졌지만, 이렇게 변할 바에야 잘 사라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검(正劍)을 뽑을 가치도 없는 자였다. 고구가 수도(手刀)를 휘둘렀다.
푸화아악!
“끄르륵.”
목이 갈라진 전평이 양손으로 쏟아지는 핏물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목젖과 대동맥이 갈라졌다. 목을 통째로 벤 것과 다를 바 없는 치명상이었다.
덜덜 떨던 전평이 결국 축 늘어졌다.
십만개방, 천하제일방이라 불리는 개방의 주인치고는 너무 허무한 죽음이었다.
고구는 가만히 서서 전평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누구도 모를 것이다.
잠시 후, 양정 일행이 다가왔다.
“끝났는가?”
“그렇습니다.”
양정이 전평을 내려다보곤 혀를 찼다.
“끔찍하게 죽었군. 하긴, 존중해 줄 만한 가치가 없는 자이긴 했네.”
“그렇습니다.”
“데리고 가세. 소문주에게 맡기고, 우리는 소교주님을 뵈러 가야지.”
“그래야지요.”
고구가 숲 저편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비쳐 드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뵙겠군.”
* * *
“후우.”
특실 정원으로 나온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구만.”
상현달이다. 모양새는 별로 좋지 않지만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백색이었다. 그만큼 하늘이 맑다는 뜻이리라.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왼팔을 빙빙 돌렸다.
‘음, 됐다.’
내기가 완벽하게 안정되었다. 내상도 다 잡혔고, 기의 흐름 역시 도도하기만 했다.
다만 체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천마도를 제어하기 위해 내공은 물론 근육의 힘까지 몽땅 짜냈는데, 그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면 충분히 회복되겠지. 내일쯤 떠나야겠군.’
남궁세가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 남궁세가를 위해서라도 떠나 주는 게 맞다.
계단에 털썩 걸터앉은 서량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도 방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밤공기만 맡아도 기분이 좋았다.
그가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경치가 제법 좋지 않은가?”
서량이 고개를 돌렸다.
특실 저편, 작은 소로에서 뒷짐을 진 노인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 차지 않은 달이지만 월하(月下)에 건실한 노소(老少)가 만났으니, 남은 공백을 채워 볼 수 있겠지.”
서량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대 가주님 되십니까?”
“그렇다네.”
노인, 남궁언(南宮堰)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검왕(劍王)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