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마(魔)의 극치 (6)
검왕(劍王) 남궁언.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당대 가주인 남궁단의 아버지이며, 당금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열 명 중 하나다.
검의 극치에 달한 자.
그보다 강한 고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보다 더 검을 깨우친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파 검문의 수좌라는 무당과 화산의 고수들도 남궁언 앞에선 감히 어깨를 펴지 못한다.
그와 당당히 마주할 고수를 찾으려면 각 산문(山門)에서도 최고 원로를 데려와야 할 것이다.
그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 만 가지 검법에 능통하다는 절대자가 나타난 것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겠지만 말일세.”
서량을 보는 남궁언, 노인답지 않게 맑은 두 눈에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직접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가 없네. 이립도 안 되어 보이는 나이에 그만한 무(武)를 쌓다니, 자네와 같은 이는 고금에 다시없을 걸세.”
“과찬이십니다.”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는 서량.
그런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걸까. 남궁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두 노소 사이를 지나갔다.
남궁언이 허리를 두들겼다.
“나이를 먹으니 몸이 영 예전 같지가 않아. 옆에 앉아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서슴없이 자리를 비워 준다.
‘놀라운 녀석이로다.’
남궁언은 서량의 무공보다 언행에 더 놀랐다.
마인의 입장에서 남궁세가는 분명 적이다.
하물며 자신은 그러한 남궁세가에서도 정점에 오른 이로, 저 젊은 마룡(魔龍)이 경계하고 또 경계해도 모자랄 노룡(老龍)이 아니던가.
선뜻 옆자리를 비워 준다? 그것은 곧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었다.
무공에 그만큼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 앉겠네.”
“그러십시오.”
그렇게 두 노소가 나란히 앉아 정원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무림 최고의 거물이 나타났지만 서량은 놀라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한 번은 검왕을 만나게 될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리라는 것도.
“굉장하더군요.”
“으음?”
“노선배님이나 남궁가주나 똑같이 굉장한 사람들입니다.”
“허헛, 왜 그리 생각하나?”
“세상에 대협(大俠)이라 불리는 사람이 많다지만 진짜는 한 줌에 불과하지요. 마인인 제가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남궁가주는 진짜 대협입니다.”
남궁언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정도의 사람이 그리 말해 주니, 내가 그래도 자식 농사는 잘 지은 것 같네.”
“최고로 잘 지으신 것 같습니다.”
“한데 나는 왜 굉장한가? 무공이 뛰어나서?”
“놀라지 않으셔서요.”
“놀라지 않다니? 나는 충분히 놀랐네. 고백하자면, 칠십 넘도록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놀란 적은 달리 없었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서량이 담담한 눈으로 남궁언을 바라보았다.
“삼십 년 동안 대외 활동을 하지 않은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 버젓이 가문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노선배께서는 그리 놀라시지 않으시는군요.”
남궁언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자네들이 들어오는 게 못마땅했다면, 진즉에 나서서 가주를 막았을 걸세.”
“그건 거짓말 같습니다.”
“거짓말이라니?”
“노선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일지언정, 노선배는 결코 가주를 막지 않았을 겁니다. 이유인즉, 그만큼 가주를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남궁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가만히 있다가 한 방 맞았구먼.”
남궁언의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듣기가 좋았다. 서량에게 없는 기억이지만, 만일 친조부가 있었다면 이처럼 편안했을 것 같았다.
놀랍게도 서량은, 처음 본 남궁언에게서 진실로 그러한 편안함을 느꼈다.
서량의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남궁언의 그릇이 크기 때문인지는 오로지 둘만 알리라.
“자네 말이 맞네. 내가 내 아들에게 가주직을 물려준 것은, 그 아이가 최소한 남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가주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야.”
“…….”
“고로 나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고, 존중하며, 앞으로도 존중할 것일세.”
서량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부자지간의 정이 무척 깊습니다. 보기 좋아요.”
“그런가? 허허.”
낮고 둔탁한, 그러나 편안한 음성이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자네 사부는 어떤 사람인가?”
“교주님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명백한 적인 천마신교의 마인에게 교주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다.
경우에 따라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궁언에게 다른 의도는 없었고, 서량 역시 그것을 알았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해(不可解)입니다.”
“불가해라…… 자네 정도 되는 인재를 길러 낸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만, 불가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애초에 상식 안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내리기도 어렵습니다.”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남궁언은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제자가 스승을 평가한다? 중원의 정서상 그것은 다소 무례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서량은 그것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남궁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평가하는 데 있어 솔직하고, 그러한 평가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발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덕분에 현재 남궁가의 검사들은 대다수가 담백한 성정을 지녔다.
솔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비범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군.”
“당연합니다.”
물끄러미 서량을 보던 남궁언이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한하지?”
“예?”
“가주는 마인을 본 적이 없네. 신교가 대외 활동의 축소화를 천명한 것이 삼십 년 전이니, 그땐 가주도 어렸지.”
“그랬군요.”
“하지만 나는 마인을 본 적이 있네.”
서량이 남궁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의 눈빛 만큼은 무척 진지해져 있었다.
“내가 봤던 마인들은 뭐랄까…… 딱히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이들이었지.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제어불능(制御不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량이 모르는 과거였다. 살왕으로서도, 그리고 마군으로서도.
“막연히 상상하던 악랄한 마인도 있었고,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의로운 마인도 있었네.
비록 서로가 걷는 길이 달라 제법 부딪쳤지만, 나는 거기서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네.”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천마신교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하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남궁언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상했지. 인신 공양?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혓바닥에 가시가 돋는 집단? 말도 안 되네.
그런 집단이 천년이나 유지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까마득한 과거에는 정말 그랬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모르겠네.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아.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네.”
남궁언이 손을 뻗어 서량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서슴없는 행동, 이번만큼은 서량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자네들은 이곳 남궁의 품으로 왔어.
잠시 머물다 떠날 적(敵)이지만, 들여선 안 될 이들이라 생각했다면 가주는 결코 자네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걸세.”
남궁언이 히죽 웃었다. 진지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한 짓궂음이 묻어 나왔다.
“젊었을 적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거지. 자네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야.”
서량은 고소를 지었다.
“정작 저만 몰랐었군요.”
“무엇을?”
“저는 처음 신교로 들어왔을 때,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었습니다.”
“허허. 왜?”
“신교를 제대로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문 속의 악귀 집단 그 자체라고 생각했었지요.”
남궁언이 크게 웃었다.
“그런 어린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 신교의 차기 주인으로 내정되었군. 세상만사 참으로 모를 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렇군요.”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였으니까.
하지만 어린아이가 맞기도 했다. 그때의 그는 확실히 어리다 할 수 있었다.
남궁언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참으로 좋은 밤일세! 호기심이 동해 와 봤네만, 자네가 이리도 괜찮은 사람일 줄은 몰랐어.”
“과찬이십니다.”
“자네 나이에 그만한 무공을 쌓았음에도 교만하지 않은 것 자체가 경이일세.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정파의 후기지수들도 자네를 본받았으면 싶네.”
환갑이 다 되어 갑니다, 선배.
고소를 짓는 서량을 보며 남궁언이 말했다.
“내일쯤 떠날 생각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그럴 것 같았네. 자네 같은 사람들은 쓸데없이 빚을 지는 걸 싫어하지.
보아하니 머리도 좋은 것 같은데, 본가가 소문에 휩쓸리는 걸 원치 않을 것 아닌가?”
귀신이 따로 없군.
“몸이 나았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지요.”
“그렇기도 하겠지.”
남궁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선에서 물러났네. 세상에 나서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저 평생의 벗인 검(劍) 한 자루와 담소를 나누는 게 취미일세.”
“저희에겐 천만다행이군요.”
“허허, 속단하지 말게. 혹여 본가가 힘에 부칠 상황이 오면, 언제고 중원 최고의 검객이 나서는 걸 두 눈으로 보게 될 걸세.”
“남궁가는 건드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남궁언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구나. 참으로 재미있어.”
“…….”
“세상에는 언제 나설지도 모르겠고, 간만에 만난 얘기할 맛 나는 젊은이는 내일 떠난다고 하네. 이 재미를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나도 아쉽구먼.”
서량의 눈이 번쩍였다.
남궁언이 일어서기도 전부터 그는 상대의 맹렬한 투기(鬪氣)를 느꼈다. 저 나이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활화산 같은 투지였다.
서량이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상대가 되겠습니까?”
“엄살 피우지 말게. 보지 않아도 알겠어. 자네가 가진 불꽃 같은 도신(刀身)이 얼마나 매섭고 격렬한지.”
남궁언이 뒷짐을 지고 내려왔다.
그러곤 몸을 돌려 서량을 보았다.
“어떤가? 몸이나 풀 겸, 한 수 시원하게 겨뤄 보지 않을 텐가?”
가만히 남궁언을 보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남궁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감정 표현이 무척이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왜? 자네도 손이 근질거릴 텐데?”
“여기서 겨루고 싶지 않습니다. 칼을 들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시지요.”
어중간하게 겨루는 건 싫다는 뜻. 제대로 붙어 보자는 패기 넘치는 말이었다.
“크하하핫! 좋아! 당연히 그래야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싶었더니, 역시 인연은 인연이었던 게야!”
남궁언이 손을 뻗었다.
후우웅! 번쩍!
한 줄기 광채와 함께 허공에서 검 한 자루가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어디에서부터 날아왔는지조차 육안으로 확인이 안 된다. 궁극에 이른 허공섭물, 내공의 깊이가 상상을 초월했다.
서량도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창가에서 느릿느릿 날아온 천마도가 그의 손에 잡혔다.
“굉장한 마도(魔刀)로군. 말도 안 되는 거력을 숨기고 있어. 자네의 애도(愛刀)인가?”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좋네, 아주 좋아!”
남궁언이 저 멀리 보이는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산 보이나? 저곳이 천하제일기산(天下第一奇山)이라 불리는 황산(黃山)일세.”
“황산을 보면 오악(五岳)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밤이지만 나름의 흥취가 있지. 좀 멀리 있긴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놀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무대일세. 저곳으로 갈 텐가?”
“좋습니다.”
“근래 저곳에 산더미처럼 큰 호랑이와 황금빛 털을 지닌 여우 요괴가 어슬렁거린다고 하더군.
당연히 헛소문에 불과하겠지만, 마치 우리 둘을 부르는 것 같지 않은가?”
서량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더니 거기서 뛰놀고 있었던가?”
“음? 뭐라고 했나?”
“아닙니다.”
파라락!
늘어진 옷자락을 뒤로 넘긴 서량이 발을 탁탁 굴렀다.
“가 보실까요?”
“가세.”
파아아앙!
두 노소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신법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