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마(魔)의 극치 (9)
“뭐라? 신교에서?”
“그렇습니다.”
이른 새벽, 대충 의관을 정리한 남궁단이 재빨리 내원의 서쪽 샛길로 향했다.
외원의 정문이 아닌, 산길로 통하는 숨겨진 문이다. 비밀리 손님을 받아야 할 때 주로 쓰는 곳이었다.
잠시 후, 남궁단이 문 앞에 도착했다.
“허.”
그의 앞에 백 명이 넘는 고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진기를 갈무리하고 있지만, 은연중 피어오르는 기파가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선두에 선 네 명의 고수는 자신에 비해도 부족함이 전혀 없는 초절정고수들이었다.
‘굉장한 전력이구나.’
그때, 선두에 선 평범한 체격의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포권을 취했다.
“남궁가주를 뵙소이다. 신교의 형법당주 고구라 하오.”
남궁단은 감히 그의 인사를 가벼이 받지 못했다. 그 역시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남궁가를 이끄는 사람이오. 신교의 형법당주를 뵈어 영광이외다.”
고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곳에 본교의 소교주님이 계신다고 들었소. 그분을 모시러 왔으니, 안내해 주시길 바라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듣기에 따라 오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남궁단은 고구가 오만한 자라 생각지 않았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군.’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사람은 예의를 다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다만, 제아무리 휴전 중이라도 귀교의 마인들 모두를 본가로 들이기는 힘들겠소. 양해해 주시길.”
“이해하오. 소교주님은 나와 이 사람만 뵈러 가겠소.”
남궁단은 고구가 가리킨 사람을 보았다. 삼십 대 초중반에, 무뚝뚝하기가 고구와 비슷해 보이는 사내. 공야치였다.
“좋소, 들어오시오.”
대화가 시원시원하게 진행된다. 굳이 서로를 의심하지 않고 담백하게 용건만 주고받았다.
고구가 양정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들께서는 호법원과 함께 대기해 주십시오.”
“허허, 걱정 말고 들어갔다 오시오. 좀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우리도 인근에서 쉬고 있겠소.”
“알겠습니다.”
선배라도 일선에서 물러났으니 후배의 권위를 존중해 준다. 남궁단은 그런 마인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신교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고구와 공야치가 외원 가장 깊숙이 자리한 특실로 안내되었다.
“마 호위?”
나와 있던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알고 있었는가?”
“미세한 마기의 흐름을 읽었습니다.”
마동필이 공야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오.”
“천룡궁 건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오.”
“한데 소교주님께서는……?”
마동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마실을 나가셨소.”
뒤에 선 남궁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실이라니? 어디로 말이오?”
“검왕 노선배와 비무를 하신다고 잠시 자리를 비우셨소.”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고구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전하시군.”
* * *
어두운 새벽.
하지만 동쪽 인근이 조금은 밝아진 듯했다. 어느새 동이 틀 무렵이 된 것이다.
“헉헉!”
“후우. 후우.”
두 노소가 서로를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격식 있게 차려입은 의복은 걸레처럼 찢어졌고, 전신이 피투성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도검이 상대의 피부를 벤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다만 충격파와 기의 압력이, 융통무애하게 흐르던 내공 방벽마저 깨부술 정도로 강력했던 탓에 부가적인 상처를 많이 입었다.
그리고 둘 중 더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서량이었다.
“중원제일검이라……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심으로 개안(開眼)했습니다.”
“내가 할 말일세. 하늘의 실수로 말도 안 되는 천재가 났나 싶었거늘, 그게 아니었어. 천하에 누가 있어 자네만큼 싸움에 익숙하겠는가.”
남궁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명백히 자네보다 강하네. 그런 내가 이리도 힘들어하고 있어. 진짜 생사결을 벌였다면,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박빙의 승부였네.”
“십중팔구 제가 당했을 겁니다.”
“왜 그리 생각하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초전에 쓰셨던 그 기묘한 기술을 쓰지 않으셨잖습니까.”
“허허, 들켰나?”
남궁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난 심인도를 쓰지 않았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쓰지 못하기도 했네.
심인도는 그리 남발할 수 있는 무도(武道)가 아니야. 잘못 쓰면 도리어 내가 더 위험해지지.”
“그렇습니까? 심검(心劍)의 묘리와 비슷해 보였습니다만.”
“무공 못지않게 안목도 날카롭군. 맞네.”
“확실히 제가 졌군요.”
남궁언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자네도 그 ‘합기(合氣)’를 풀어놓지 않았잖은가.”
서량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노선배와 마찬가지로 함부로 쓸 게 못 되지요.”
“그렇구먼.”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남궁언이 조금 진지해진 낯으로 말했다.
“그 푸른색을 띠던 마공 말이네.”
“군림마황기 말씀이십니까?”
“마공의 이름이 군림마황기인가 보군.”
“본교 최고의 마공이지요.”
“그래 보였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그 붉은색을 띠던 마공보다 신묘해 보였어.”
극히 미세한 차이. 그 차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도 온 천하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아닐세. 자네, 군림마황기란 마공을 쓰면서 이상한 점 느끼지 못했나?”
서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이상한 점이라니요?”
“모르고 있었군. 하기야 그런 것은 당사자가 더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네.”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있었지. 그것도 치명적인.”
서량의 눈썹이 조여졌다.
치명적인 문제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가만히 서량을 보던 남궁언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말해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구먼.”
“그 치명적인 문제라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보통 그런 것은 본인이 깨우쳐야 정상이네만, 내가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다네.”
“그럼 주십시오.”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서량식의 장난이었다.
하지만 남궁언의 표정은 진지했다.
“애매하네.”
“도움을 주실 수 있다 하셨으면서 무엇이 애매합니까?”
“자네는 신교의 소교주일세. 다 늙어빠진 나야 자네와 칼을 겨룰 일이 없을 듯하네만, 본가의 젊은이들은 다르네.
자네가 조금 더 강해지면, 본가의 식솔들은 그만큼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살아야 하네.”
서량은 남궁언의 말에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다.
고수일수록 한 수의 차이는 크다. 하물며 서량은 십대고수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신교 측의 절대고수였다.
홀로 전황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존재. 그런 고수를 성장시킨다는 건 남궁언에게 분명 큰 부담이었다.
“더 큰 문제가 뭔지 아는가?”
“……모릅니다.”
“자네, 그 마공에 제대로 고삐를 두르지 않으면 언젠가 주변 일대가 피바다가 될 것이네.”
“……!”
“미쳐 버린다는 게야. 말 그대로 광마(狂魔)가 될 것일세.”
“광마…….”
“신공과 마공은 비교가 어렵지만, 굳이 수준을 나누자면 그 군림마황기라는 마공은 본가의 창궁무애신공보다도 뛰어나다고 볼 수 있네.
특히 위력적인 면에서 그렇지. 그런 마공을 익히다 미치게 되면, 중원 전체에 재앙이 될 걸세.”
남궁언은 진지했다.
서량은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자네, 혹시 근래에 그 마공의 성취를 올리기 위해 무리한 적이 있지 않나?”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량은 남궁언에게 광목림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세히 말했다.
남궁단이 왜 얘기를 전하지 않았는지 잠시 의아했지만, 생각해 보니 남궁언은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이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남궁언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감돌았다.
“목기(木氣)라…… 만약 그 사기에 목기가 아닌 다른 기운이 섞여 있었다면 자네는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걸세.”
“예?”
“오행의 목기는 동(東)의 청룡(靑龍)으로, 봄(春)을 상징하네. 만물이 싹틀 시기에 목기가 가장 왕성하다는 게야.
그래서 목기를 활용하는 무공은 대부분 활생(活生)에 능하다네.”
순간 서량의 머리를 스친 장면은 목령귀들의 말도 안 되는 회복력이었다.
잘린 팔이 회복될 정도는 아니지만, 몸에 난 상처 대부분이 급속도로 재생되던 신이한 능력.
“물론 사기는 마기의 종속되기 마련이라, 어쩌면 생존했을 수도 있네.
문제는, 자네가 그 사기를 정제했다 해도 마기에는 목기의 특성이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이네.”
“하면……?”
“끊임없이 성장할 걸세. 마공이 자네의 심혼을 지배할 때까지.”
“……!”
“과유불급이라 하였네. 어느 정도껏 취했어야지. 그 많은 목기를 받아들였으니 훗날 마공이 폭주할 위험이 있네.
물론, 당시의 상황을 들어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네만.”
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궁언이 한숨을 쉬었다.
“그 마공을 단독으로 익혔다면 아마 이런 일이 없었겠지. 하지만 자네는 그에 육박하는 또 다른 마공을 익히고 있어.
사람의 그릇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일세. 두 마공을 대성하기란, 진정 어려울 것이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할 거라 말했을 것이다. 다만 서량은 이립이 안 된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천재기에 어려울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서량은 생각했다.
‘그때 그 말이…….’
- 한계를 두지 말라. 넌 신교 최초로 두 개의 절대마공을 연성한 천마(天魔)다.
네가 걷는 길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길에 오른 자가, 더 욕심을 내지 못할망정 한계를 그어 둔다면 절대 대성하지 못하겠지.
꿈에서 이천상이 했던 말.
불현듯 그 말이 왜 떠올랐을까?
“후우, 가문을 생각하면 방도를 알려 줘선 안 되겠지만 자네 같은 동량지재(棟梁之材)가 스러지는 꼴은 나도 보기 힘들군.
언젠가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칠 수 있으니, 내 그 방도를 알려…….”
“아니, 괜찮습니다.”
“음? 괜찮다니?”
서량의 얼굴은 어느새 평소의 신색을 되찾았다.
“저는 군림마황기를 안정적으로 대성할 수 있습니다.”
“방법이 있는가?”
“당장 이거다, 하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남궁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아네만, 그런 것은 무재와 다른 영역일세. 자칫 잘못하면 정말…….”
그때였다.
저벅저벅.
남궁언의 고개가 저 멀리 떨어진 숲을 향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여우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여우처럼 생겼지만 절대 여우라 할 수 없었다. 보통의 여우보다 주둥이가 완강했으며, 크기도 대호만큼이나 컸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전신 가득 피어오르는 상서로운 기(氣).
남궁언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이럴 수가.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쿵. 쿵.
대지를 뒤흔드는 묵직한 발소리 또한 들려왔다.
금호가 나타난 곳에서 우측으로 한참 떨어진 숲에서 무지막지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지끈! 쿠궁!
그저 걸어오고 있을 뿐인데도 잡목들이 우수수 부러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체(巨體). 천근의 무게를 넘어가는 엄청난 크기의 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멍하니 두 영수(靈獸)를 보는 남궁언.
“그릇이 부족하다면, 그릇을 넓히면 그만이겠지요. 저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마(魔)의 극치를 향해 나아갈 작심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서량은 두 마리의 영수 사이로 걸어갔다.
반가운 듯 금호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조금은 귀찮은 듯 호왕이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다 털썩 드러누웠다.
“만약 그래도 제 그릇이 부족하다면.”
서량이 웃으며 남궁언을 돌아보았다.
“저를 도와줄 친구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금호가 그 큰 머리를 서량의 가슴에 비볐다. 서량이 금호의 머리털을 마구 헝클었다.
“이놈아, 잘 있었냐?”
크르릉.
금호가 서량의 몸을 핥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부글부글.
피딱지가 앉은 상처가 부글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저 멀리서 제 일행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저를 맞으러 온 모양입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남궁언은 서량의 그 미소가 참으로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다들 모였으니, 이제 진정 출도다운 출도를 해 봐야겠군요.”
“가 보려는가.”
“멋진 비무였습니다.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삼아, 다시 한번 나아가겠습니다.”
서량이 포권을 취했다.
“다시 뵙는 그 날까지 건강하십시오.”
가만히 서량을 보던 남궁언이 마주 포권했다.
“부디 마(魔)에 휩쓸리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