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세상을 뒤흔들다 (1)
“그렇단 말이지.”
“……예.”
재미있군.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수십 년을 싸워 왔다. 그 과정에서 범인(凡人)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 사고를 겪어 봤다.
그런 담사영에게도 근래 벌어진 일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화산, 종남에 이어서 용두방주까지 실종이 되었다…… 허허,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군.”
화산 장문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소 놀라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종남 장문인과 휘하 검수들이 모조리 증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일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개방의 용두방주이자 그의 정보 수집에 상당한 도움이 되던 거물도 실종되었다.
비로소 담사영은 깨달았다.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이 사태를 일으킨 이름 모를 주동자가 노리는 것이 정파 무림임을, 아니 자신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강 노선배에게선 연락이 왔느냐.”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연락이 오는 대로 즉시 보고하라.”
“예!”
“이만 나가 보도록.”
무사가 나가고, 담사영은 회랑을 지나쳐 개인 정원으로 향했다.
‘끓어오르는군.’
자신을 아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정쟁(政爭)에 관해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무림인임에도, 무재(武才)보다 뛰어난 두뇌로 최고의 자리를 거머쥔 괴물이라고 평했다.
담사영은 그러한 평가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었다. 자부심이 아닌, 냉정한 눈으로 스스로를 봤을 때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맹주가 되고, 나아가 실권을 잡고 나서 그는 더 이상 머리를 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을 이루었으며,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도, 감히 불만을 표하는 이도 없었다.
조금은 무료한 나날들. 꿈을 이룬 순간 그의 거대한 욕망은 완전히 해소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천하(天下)로 눈을 돌렸다. 평생 앞만 보고 달렸기에 쉬는 법을 몰랐다.
정파 무림을 넘어 사파 무림, 나아가 마도 무림까지 모두 집어삼키고자 한 열망. 무림사 누구도 이뤄 내지 못한 천하일통.
새로운 꿈을 꾸었을 때, 그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 욕망에는 커다란 것이 빠져 있었다.
바로 참된 의욕이었다.
‘타성에 젖은 욕망은 껍데기나 다를 바 없는 것. 결국 나도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하는 소심한 늙은이에 불과했던가.’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그득한 조소였다.
‘그래서 그 좋은 칼도 잃어버린 것이지.’
살왕.
맹주가 되기 전 수하로 삼아, 맹주가 되고 나서도 숱하게 써먹었던 암중살병(暗中殺兵).
그는 알고 있었다. 그놈은 결코 자신을 위해 죽을 놈이 아니라는 걸.
천성적으로 누구 밑에 있을 놈이 아니었다. 그놈 자신이 패주(覇主)의 그릇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망하던 놈이었다.
그 귀한 혈고까지 이용해 놈을 잡아 둔 이유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떠나면 죽이고, 안 떠나면 쓴다. 어차피 놈의 무공에 대해선 전부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당할 일도 없었다.
‘어쩌면 그 녀석을 붙잡아 두면서 과거의 나를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르겠군.’
놈이야말로 자신의 역사다.
그런 놈이 혈고를 배출하고 도주했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천라지망까지 동원해서 죽인 것이다.
그 순간, 담사영은 깨달았다.
놈의 죽음은 곧 담사영이라는 인물 역사의 전편(前篇)의 소멸이었다는 것을. 살수지왕이 죽은 그 시점에, 다시 역사의 후편(後篇)의 서술을 시작했어야 했다는 걸.
“오랜만에 보는군요.”
정원 정자에 앉아 있던 한 중년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맹주님의 그런 얼굴, 몇 년 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담사영은 정자에 올라가지 않았다. 인공 연못 앞에 서서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정자에 있던 중년 사내가 그의 뒤로 다가왔다.
담사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 쪽은 어떻더냐?”
“비슷합니다.”
“그 늙은이들이 여전히 진을 치고 있는 모양이구나.”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까요. 아시잖습니까?”
“아니,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예?”
담사영이 몸을 돌렸다.
중년 사내는 흠칫 놀랐다. 담사영의 눈빛이 무섭게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해결할 방법은 너무도 많다. 다만 선을 넘지 않으려 했을 뿐이지.”
“…….”
“한 달을 주마. 널 제어하려 드는 그 늙은이들을 모조리 네놈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급한 일이 있으신지요?”
“급한 일? 그렇다면 그럴 수 있고, 아니라면 아닐 수 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담사영이 싸늘하게 웃었다.
“이 늙은 맹주의 식어 버린 가슴에 드디어 불이 붙었거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역사서의 후편을 써 나갈 마음을 먹었어.”
“예?”
“지금 즉시 시작하라. 한 달 후, 너를 중심으로 맹의 전력을 강화할 것이다.”
중년 사내의 얼굴에 격동이 깃들었다.
담사영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진 모른다. 하지만 뭔가 거대한 일을 시작하려 한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것도.
“세상에 알려 줘야지. 강호삼세의 최고가 본맹이라는 것을.”
담사영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천하일통을 이룰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것을.”
* * *
“군림성교(君臨聖敎)! 천마불사(天魔不死)!”
여덟 자구의 신마경어(神魔敬語)가 차가운 공기를 뒤흔들었다.
선두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고구가 외쳤다.
“형법당주 외, 호법원 산하 마인 일백사 명이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한옆에서 그 광경을 보던 남궁단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서량이 미소로 그들을 맞았다.
“오랜만이군.”
우렁찬 인사와는 대조되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더욱 서량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고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한 수 늘었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본업은 내팽개치고 달밤에 칼춤 좀 췄겠는데?”
“약속을 지키지 아니한 누군가 때문에 고생 좀 했지요.”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고구가 말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일전, 그가 소교주가 되기 전에 고구는 일 년 동안 자신과 비무를 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그리고 서량은 그 요청을 수락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통에 잊고 있었다. 명백한 그의 잘못이었다.
“그간 못했던 거, 몰아서 하지.”
“알겠습니다.”
서량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공야치가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왔나.”
“예.”
“고생 많았어.”
“소교주님에 비하면 제 고생은 고생도 아니지요.”
“그런 말은 마. 당신 위치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공야치가 고개를 숙였다. 당금 무림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위대한 무인이 자신을 인정해 주었다.
전평의 죽음으로 다소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자고.”
“예.”
“그건 그렇고…….”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선배님들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구의 바로 뒤에서 부복하고 있던 네 명의 고수가 일어났다.
하나 같이 연륜이 느껴지는 얼굴들. 하지만 주름진 얼굴과는 달리, 그들의 몸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연마되어 있었다.
그중 대표인 양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호법원주가 난리를 치더군요. 그래서 왔습니다. 나중에 원주에게 나쁘지 않은 호위였다고 언질 한 번만 해 주십시오.”
“이를 말입니까. 벌써부터 든든해지는 느낌입니다.”
“껄껄.”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교하시지요.”
서량이 호법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잘 단련된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마동필과 함께 작전을 뛰었던 삼 조원들도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웬만한 중소 문파 정도는 반나절 만에 괴멸시킬 전력이었다.
이토록 든든한 호위가 생겼으니, 사방이 적인 중원에서 활동하기가 무척 든든했다.
하지만.
“선배님들께서는 호법들과 중원 유람 후, 그들과 함께 다시 귀교하셨으면 합니다.”
순간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깜짝 놀랐다.
“소교주님?! 그게 무슨……?”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호법들이 이곳으로 온 것은 큰 실수입니다.”
“예?”
멍하니 서량을 보던 양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평온한 눈빛 속 엄중한 기색이 깃들어 있다. 소교주님은 지금 무척이나 진지했다.
“제가 신교에서 나온 후,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호법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저들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됩니다.”
“상세한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다 죽을 겁니다.”
“……예?”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위험할 정도의 상황이 온다는 것은, 사태가 그만큼 심각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호법들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양정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저의 위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신교의 많은 마인들이 저를 위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저는 교인(敎人)들의 의미 없는 개죽음은 결사반대합니다.”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닙니다, 소교주님. 소교주님을 위한 죽음이라면 그 어떤 죽음보다도 찬란할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백 명의 호법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분위기가 그러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모두에게 찬란한 죽음일지언정, 저에게는 아닙니다.”
“소교주님.”
“전쟁이 발발해서 적과의 교전으로 죽는다면, 안타까울지언정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날 위해서 죽는다면, 난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겁니다.”
양정이 입을 쩍 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대 호법들은 물론, 백인의 현역 호법들도 모두 놀랐다.
다만 고구만은 놀라지 않았다. 마동필을 제외하면, 그나마 이곳에서 서량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합니다. 돌아가십시오. 저는 이들만으로 충분합니다.”
“소교주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그러다 소교주님께서 위험해지는 순간이 오면 어찌하려 그러십니까?”
“나만 죽겠지요.”
“소, 소교주님!”
“나 자신이 죽을지언정 소교주만은 살리겠다.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아마 제가 죽는다면 선배님을 포함, 신교의 마인들이 큰 충격을 받겠지요.”
“…….”
“분명한 자신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니, 돌아가십시오. 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크르릉.
모두가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선 자리 뒤,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영수 두 마리가 걸어 나왔다.
“동필이만으로도 제 호위는 충분합니다. 거기에 사람은 아니지만 어떠한 고수도 물리칠 수 있는 두 영물 친구들도 있지요.
장담컨대, 이들이 있다면 천하십대고수 중 누구라도 저를 죽일 수 없습니다. 어떤 문파라도 저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
“생각해 둔 바가 있어서 드리는 말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틀렸습니다.”
“예?”
양정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힘이 빠진, 그러나 유쾌함도 느껴지는 미소였다.
“저는 일선에서 물러난 이로서, 그저 소교주님의 의중이 궁금해서 여쭈어본 것뿐입니다.
소교주님께서 그러시겠다 하면 누가 있어 소교주님의 명을 거스르겠습니까.”
양정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괜한 설득은 필요가 없었군요.”
“그렇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던 서량이 돌연 남궁단을 바라보았다.
“가주님.”
그들의 대화에 압도되었던 남궁단이 깜짝 놀랐다.
“말씀하시구려.”
“이 근처에 괜찮은 주루가 있습니까? 당장 하루를 통째로 빌릴 수 있는 주루 말입니다.”
“물론이외다. 본가 산하의 주루만 해도 열 곳이 넘소이다.”
“하루만 빌려도 되겠습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서량이 손으로 호법들을 가리켰다.
“그래도 고생해서 왔는데 밥도 안 먹이고 보내려니 다소 신경이 쓰입니다. 하룻밤 동안 함께 피로를 날린 뒤에 떠나보낼 생각입니다.”
남궁단이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사업하는 이로서 어찌 손님을 가려 받을 수 있겠소. 돈만 내시면 언제든 잡아 드리리다.”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량이 마인들을 향해 외쳤다.
“오느라 고생들 많았어! 혓바닥이 꼬부라지도록 마셔 보자고!”
마동필이 헛기침을 하며 서량에게 다가왔다.
“소교주님.”
“왜?”
“아직 아침입니다만.”
“그게 뭐 어때서?”
“……아, 예.”
서둘러 호법들을 일으켜 세우곤 웃으며 농담을 던져 대는 서량.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보던 남궁단의 얼굴에 은근한 부러움이 떠올랐다.
‘중심은 단단하되 여유와 부드러움을 함양한 사람이구나. 아랫사람을 저리 생각할 줄 아니, 휘하 마인들도 감격할 수밖에 없겠지.’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남궁단.
그의 눈빛이 차츰 진지해졌다.
‘하루라…….’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이 튼 아침, 하늘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얘기할 시간이 없겠군.’
그는 서량과 할 얘기가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깊은.
남궁단이 낭랑하게 외쳤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안내해 드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