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세상을 뒤흔들다 (2)
“어이쿠! 나이가 드니 조금만 다쳐도 삭신이 이만저만 쑤시는 게 아니로다.”
툭툭 어깨를 두들기는 남궁언의 모습은 전형적인 골방 늙은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어떠한 피로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은 후련함이 가득했다.
“그놈 참, 칼질 한번 야무졌소. 살기만 조금 걷어 내면 조만간 도(道)에 이를 만도 할 텐데.”
“그 정도였습니까?”
“놈의 칼에는 어떠한 잡기(雜技)도 보이지 않았소.
무공의 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지. 다만 칼 자체가 너무 살생에 젖어 있어. 살기를 걷어 낸다면 빠른 시간 안에 심검(心劍)에 이를 수 있으련만.”
“……!”
“물론 칼에서 살기를 걷어 내긴 힘들 게요.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만.”
남궁단이 한숨을 쉬었다.
“서 소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로군요.”
“무림이란 세상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진 모르겠다만, 다시 나기 힘든 무인임이 분명하오.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야. 그 노련한 칼 놀림과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기공전(氣功戰)은 전장에서 수십 년을 활동한 노강호의 그것과 같았소.”
남궁언이 피식 웃었다.
“모르고 붙었다면 내 동년배와 겨루었다고 착각했을 정도였으니.”
남궁단은 처음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상대를 이토록 극찬하는 것을.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있어 서 소교를 두고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문제는…….”
“예?”
“……아니오. 본인이 그리 자신하고 있으니, 분명 방도를 찾아내겠지.”
고개를 젓던 남궁언이 맑은 눈으로 남궁단을 보았다.
“해서, 가주께서는 그이에게 하려던 말은 잘 전했소?”
“알고 계셨습니까?”
“당금 안휘의 분위기가 무척 소란스럽소이다. 안휘와 인접한 지방들까지도. 가주라면 분명 서 소교에게 고민을 풀어놓으리라 생각했소.”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사마(正邪魔)로 나눌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안타깝지만 본가는 안휘를 휘어잡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입니다.
비록 적이지만 서 소교는 의(義)와 협(俠)을 아는 사람이니, 충분히 부탁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대답은?”
“…….”
“역시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겠다 하였군.”
“그에게는 중원으로 나온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젖혀 두고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긴 어려웠겠지요. 다만…….”
“다만?”
“길을 나아감에 있어, 문제를 발견한다면 외면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서 소교의 성격이라면 분명 불의(不義)를 보고도 그저 지나치진 않을 겁니다.”
남궁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가만 보니, 가주께서는 서 소교에게 홀딱 반해 버린 모양이오.”
남궁단이 마주 웃었다.
“충분히 반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능력도, 성품도.”
“비록 마(魔)를 표방한 집단이지만 우리가 아는 마(魔)와는 다르오.”
“세상에는 그러한 마도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필시 서 소교의 마도(魔道)에, 피비린내가 짙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궁단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맑은 햇살 덕에 마음에 여유가 깃들었다.
“무림에 분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주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 *
“아, 배고파.”
“…….”
“화아야.”
“네?”
“육포 좀 먹으면 안 될까?”
앵화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일각 전에도 드셨잖아요.”
“배가 고프잖아, 배가.”
“그렇게 자꾸 드시면 육포가 사흘도 안 돼서 동날 거예요.”
“다시 구하면 되잖아. 내가 돈 낼게.”
“참으세요.”
“며칠 동안 누워만 있느라고 밥다운 밥도 못 먹었단 말이야.”
“남궁가에서 지극정성으로 약식(藥食)을 만들어 드렸다고 하던데요.”
“약식도 양이 차야 약식이지.”
“어쨌든 조금만 더 참아 보세요. 만날 그렇게 드시다가 살찌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살 까짓거 찌면 또 어때서 그래.”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실 수 있다니, 참 부럽네요.”
여상린이 투덜거렸다.
“사람은 입이 즐거워야 삶의 질이 올라가는 법이야. 안 그래도 살벌한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데, 먹는 재미도 없으면 어떻게 살란 말이야? 안 그래?”
앵화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따가 밥 먹을 거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으세요. 알았죠?”
“헤헤, 알았어.”
여상린이 시시덕거리며 앵화가 건넨 육포를 씹었다.
옆에서 두 사람이 하는 꼴을 멀뚱히 보던 고구가 서량을 보며 말했다.
“제법 상큼한 조합이군요.”
서량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항상 그렇지. 딱딱한 것보단 낫잖아?”
“그렇습니까?”
“아닌가 보지?”
“예.”
“딱딱한 인간 같으니.”
고구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더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때, 여상린이 육포를 씹으며 말을 꺼냈다.
“저기요.”
“…….”
“저기요!”
고구가 여상린을 힐끔거렸다.
“나 말인가?”
“네. 그쪽이요.”
그쪽이라…….
참으로 당황스러운 표현이 아닌가. 천마신교의 형법당주라면 만마(萬魔)가 두려워하는 악귀 그 자체다.
그런 사람더러 그쪽이라니, 당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희 때문에 불편하신가요?”
“조금.”
고구는 언제나 솔직했다.
물론 여상린 역시 고구처럼 솔직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거 못 참거든요? 좀 시끄러워도 참아 주세요.”
“…….”
“도저히 못 참겠다 싶으면 말해 주시구요. 그 정도는 동행자로서 조율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분위기 칙칙하게 만드는 건 못 참아요. 알았죠?”
고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 여일했다.
“없는 사람인 셈 쳐라.”
“원하신다면요.”
고구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말도 섞기 싫은 듯한 기색이었다.
여상린이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유치하게 그러지들 마라.”
“왠지 나중에 분란이 터질 것 같아서요. 미리 서로 성격 알아 두면 좋잖아요?”
“싸우자는 거지 그게.”
“다행히도 소교주님이 잘 중재해 주실 거잖아요?”
“말은 잘한다.”
그때, 고구가 말했다.
“소교주님께서 중재를 하셔야 할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도 언사를 조심하도록.”
“흐음?”
여상린이 그리 말하니, 고구도 이참에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그대가 소교주님과 친분을 맺은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며, 참견할 생각도 없다. 다만 그대도 빙궁의 요인(要人)인 만큼 나름의 격을 갖추도록 하라.”
“지금은 격이 없어 보이나요?”
“그렇다.”
“어떤 면에서요?”
“격이란 곧 상대를 인정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데에 뿌리를 둔다. 그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초면에 그런 언사로 상대의 기분을 흐트러트린 사람이 격을 갖추었다고 보긴 어렵겠지.”
고구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소한 한 마디가 말도 안 되는 화(禍)를 부를 수 있는 게 세상이다. 내게는 상관없지만, 적어도 소교주님께는 정도 이상의 무례를 저지르진 말도록.”
그 말을 끝으로 고구는 입을 닫아 버렸다.
물끄러미 고구를 보던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워낙에 딱딱한 인간들을 안 좋아해서요. 저도 모르게 말이 날카롭게 나간 모양이네요. 사과드려요.”
고개까지 살짝 숙이는데 나름의 진중함이 깃들어 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것이다.
고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인 건지, 아닌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불쾌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언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놀랍게도, 그 언쟁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마차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앞으로의 동행에서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을 것 같았다.
서량이 힐끔 여상린을 바라보았다.
여상린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혀를 내밀었다.
‘못 말리겠군.’
어쩌면 여상린은 고구의 이런 반응을 끌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흉한 것.”
“왜요!”
“됐다. 먹던 거나 먹…… 벌써 다 처먹었네, 저거.”
서량이 힐끔 고구를 보았다.
“신교에는 별일 없나?”
“있습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일이 있다고? 어떤?”
“소교주님께서 중원에 나와 계신 상황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마인들의 훈련량이 배로 늘었습니다.”
이 양반이 진짜.
“난 또 뭔 일 터진 줄 알고 놀랐잖아.”
“충분히 큰일입니다.”
“열심히 훈련하면 강해지고 좋지 뭘.”
“소교주님께서 중원에 나와 계신 상황 자체가 큰일입니다. 오죽하면 호법들까지 보냈겠습니까.”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말씀하셨듯, 소교주님께선 분명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서량이 헛기침을 뱉었다.
“찔리는군.”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상린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완전 의외네.’
듣기로는 소교주님과 함께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다고 하였다. 한데 지금 보니, 고구라는 자 앞에서 소교주님이 왠지 힘을 못 쓰는 느낌이었다.
‘뭐 책잡힌 거라도 있으신가?’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밖에서 마동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어, 알았다.”
마차에서 내린 일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가 선 곳은 널따란 관도 옆 숲의 입구였다. 저 멀리 저잣거리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활기와 숲의 공기가 기분을 들뜨게 하였다.
“확실히 날이 싸늘해졌어.”
서량이 고구에게 말했다.
“동필이랑 주루에 좀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잘 지키고 있어.”
“명을 받듭니다.”
여상린이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내상이나 치료해. 아직 다 안 나았잖아.”
“쳇.”
그렇게 서량과 마동필이 관도를 걸었다.
마동필이 주변을 살폈다.
“놀랍군요.”
“뭐가?”
“금호와 호왕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상당히 떨어져 있는 모양이지요?”
“마차 뒤에 있었다.”
“예에?!”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기(氣)를 조절하는 법을 배운 모양이야. 영물인데도 배움에 인색하지 않으니, 확실히 보통 놈들이 아니지.”
마동필은 혀를 내둘렀다.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수장과 비견되는 무력이라면 능히 천하를 바라볼 만한 경지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 자신의 기감으로도 두 영물의 기척을 읽지 못한 것이다.
“진짜 괴물이 되었군요.”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많아지겠지.”
그때였다.
쿠웅!
저 멀리 저잣거리에서 대지를 흔드는 강렬한 울림이 터졌다.
마동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공이 섞였군요.”
여기까지 전달되는 충격에 심상치 않은 내력이 느껴졌다.
물론 두 사람이 긴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드넓은 천하에서, 이 정도 내력을 뽐낼 수 있는 고수를 만나긴 우연히라도 힘들다.
작정하지 않은 이상은.
서량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공야치가 건넨 서신이었다.
“공손세가(公孫世家)라…….”
남궁세가의 위세가 워낙에 대단해서 그렇지, 공손세가 역시 만만한 가문은 아니었다.
오대세가에 비할 순 없지만, 어지간한 중소 문파 정도는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곳이 바로 공손세가였다.
그는 공야치의 말을 떠올렸다.
- 제대로 일보(一步)를 내디뎌 보겠다 하시니, 이참에 사고 한번 치시지요. 저희도 도와주실 겸 말입니다.”
서량이 웃으며 서신을 접었다.
“시랑이 나타나면 나라 안에 전쟁이 일어난다, 라…… 참 사건 사고가 많아, 내 주변에는.”
우우우!
저 멀리서 금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