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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293화 (293/774)

293화. 세상을 뒤흔들다 (4)

“가, 감사합니다.”

공손명의 잘린 팔에선 아직도 피가 뿜어지고 있었다. 살벌한 광경에 종구도 공포에 젖었지만, 그는 최소한의 도리를 잊지는 않았다.

서량이 손을 저었다.

“감사는 무슨.”

“아닙니다. 의인(義人) 덕에 주루를 지키게 되었으니, 이는 목숨을 다해도 갚지 못할 은(恩)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종구의 얼굴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비록 루주는 따로 있다지만, 그 역시 루주와 함께 이곳을 세운 사람이었다. 인생을 바쳐 이룩한 탑을 지킬 수 있었으니, 그 감사함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렇게 안심할 때는 아닌 것 같소.”

“예?”

“공손세가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문파는 중원을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소. 물론 공손세가를 따위로 취급하는 대문파도 많지만, 그들이 쌓아 온 힘을 무시할 순 없지.”

“……!”

“우리야 이런 식으로 얽혔지만, 그들이 또 엄한 수작을 부리면 이곳 비연루도 다시 고난의 길을 걷게 되지 않겠소?”

종구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대인(大人)! 어서 여길 벗어나십시오!”

“엥?”

“공손세가는 분명 병력을 이끌고 이곳을 치러 올 것입니다! 대인께서 이곳에 계시다가는 봉변을 면치 못할 겁니다! 어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서량은 멍한 눈으로 종구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제정신인가?’

두 번 보고, 세 번을 봐도 진심이다. 종구는 진심으로 자신과 마동필을 걱정하고 있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하군.’

제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한 번 도움을 받았으면, 그 이상의 도움을 원하기 마련이다.

한데 종구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도와준 은인들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어서 여기를 뜨라고 한다.

‘이런 성정으로 거친 세상을 살아가긴 어렵겠지.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성격으로 평생을 살아왔기에 주루의 총관도 할 수 있었으리라.

서량이 말했다.

“그건 잠시 후에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대인!”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사태가 급박했지만 종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지금껏 뒤를 봐주는 무림 문파는 없었소?”

“……없었습니다.”

“따로 왈패들과 손을 잡은 적도 없고?”

종구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이유가 있소?”

“굳이 이유를 들라면 무림 문파와 손을 잡으면 언제고 반드시 해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구가 한숨을 쉬었다.

“난세에 약자가 살아남는 방법으론 울타리가 되어 줄 강자 밑에 들어가는 게 가장 쉽고 빠르겠지요. 하지만 강함은 상대적입니다. 언제고 또 다른 강자가 나타나 이권을 강탈해 가면, 중간에서 피를 보는 것은 저희 같은 소상(小商)들입니다.”

“해서 무림 문파와는 손을 잡지 않았다?”

“당장은 그렇습니다. 초기에는 다소 힘들겠지만, 조심스럽게 사업을 확장해서 충분한 금력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소. 당장은 손을 잡지 않겠다고 했는데, 혹시 봐 둔 곳이라도 있는 거요?”

잠시 망설이던 종구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남궁세가와 거래를 트고자 했습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남궁과?”

“그렇습니다. 제가 비록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남궁세가의 협의지도(俠義之道)가 공손세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해서?”

“어차피 이곳에서 황산의 남궁까진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습니다. 해서 이곳을 남궁의 분타 중 하나로 삼아 저희 상권을 지킴과 동시에, 남궁가의 눈이 되어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서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무림 문파와 손을 잡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이왕 그럴 거면 안휘 최강의 문파와 손을 잡아 미래를 도모하겠다?”

“……그렇습니다.”

이런 깜찍한 사람을 보았나.

‘마냥 소심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렇게까지 멀리 내다보고 있었던가?’

서량은 종구에게 순수하게 감탄했다.

한없이 선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하기야 착하기만 해서는 이 난세에 마흔이 넘도록 살아남긴 힘들 것이다.

문파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본인이 먼저 손을 뻗는다.

사업을 확장해 능력과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먼저요, 거래는 그다음이다. 남에게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강한 심지가 엿보였다.

“대단하시오.”

“아,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꿈만 크게 꾸었을 뿐입니다. 힘없는 정의는 이리도 공허한 것을요.”

종구의 얼굴에 약자의 비애가 묻어 나왔다.

서량이 마동필을 보았다.

무뚝뚝한 얼굴 위로 은근한 놀라움이 떠올라 있었다. 그 역시 종구의 포부에 감탄한 것이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보시오, 총관.”

“예, 대인.”

“혹, 굳이 남궁세가가 아니더라도 괜찮소?”

“예?”

“남궁세가만큼 강한 무력(武力)은 없지만, 남궁세가가 갖지 못한 힘을 지닌 문파가 하나 있소. 혹시 그러한 문파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소?”

종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문파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하오문.”

“……!”

“하오문의 정보력은 중원 전역을 관통하고 있소. 게다가 개방주가 실종된 지금, 하오문은 정보계의 천하제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소.”

종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량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믿음이 안 갈 수도 있소. 하오문은 언제나 음지를 지향해 왔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계약을 맺은 주루에 상납을 받지도, 폭압을 저지르지도 않소. 말하자면 상부상조인 셈…….”

“물론입니다!”

“……엥?”

종구의 얼굴에 격동이 깃들었다.

“하오문과 연을 맺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그리할 것입니다!”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남궁세가보다 하오문이 더 낫다는……?”

“적어도 저희처럼 주루를 운영하는 상인들로선 하오문이야말로 가장 연을 맺고 싶은 문파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오문이 음지를 지향하기 때문에 오히려 소상들에게는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문파 간의 분쟁에 휩쓸릴 일이 없고, 피해 복구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오문의 금력은 숫자로 환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덕분에 계약한 주루나 상점이 부당한 피해를 보면 앞장서서 구제해 주곤 했다.

더하여, 뒷골목 파락호들도 감히 건드리질 못하니 상인들로선 그야말로 최적의 문파였다.

물론 공손세가처럼 악랄한 경우는 정말 흔치가 않다. 말하자면 비연루가 운이 없었던 셈이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하오문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군. 알았소, 하면 이 주루를 하오문과 연결해 드리리다.”

“예에?!”

종구는 깜짝 놀랐다.

“그, 그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괜히 하오문 얘기를 꺼냈겠소?”

종구의 얼굴에 감격이 떠올랐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정말이지…….”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연결만 해 주는 거요. 하오문 측과 계약이 제대로 성사될지, 말지는 총관과 루주에게 달려 있소.”

“무, 물론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감당키 힘든 은혜입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오늘의 사태를 마무리 지어 봅시다.”

“예?”

“공손세가 건이 남았잖소?”

순간 종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어서 피하셔야…….”

“괜찮소. 고작 그따위 놈들에게 당할 정도로 어설프게 살아온 인생이 아니올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불안 가득한 종구의 얼굴 뒤로.

아무 의자에나 앉은 서량이 눈을 빛냈다. 선명한 핏빛이던 그의 동공이 어느새 은은한 청색 광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물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놈들이야. 소문주가 일을 잘했군.”

잠시 후.

후우우웅.

주루 밖에서 은은한 영기(靈氣)가 풍겨 나왔다. 금호가 뿜어내는 기운이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동필아, 가자.”

“예.”

덜컹!

주루의 문을 열고 나온 서량의 눈에 황금빛 털을 휘날리는 금호가 보였다.

“괴, 괴물인가?”

“늑대? 여우?”

“세상에…… 저런 짐승이 있었다니!”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은 홀린 듯 금호를 바라보았다.

대호처럼 큰 덩치에, 여우인 듯 늑대인 듯 기묘한 생김새를 한 짐승을 본다면 누구라도 놀라 나자빠질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단순한 맹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고 있는지라, 사람을 해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륵.

서량이 나오자 금호가 엎드렸다.

몸체가 워낙 크니 엎드렸는데도 머리가 성인 남성 허리 위에 온다.

서량이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호가 크르릉 소리를 내며 서량의 허벅지에 주둥이를 비볐다.

“오는군.”

저 멀리 인파가 좌우로 쫙 갈라졌다.

갈라진 인파 사이로 백은 족히 넘을 듯한 무사들이 절제된 보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도를 내뿜고 있는데,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예기였다.

그리고 그 무사 집단의 선두에는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새겨진 중년 사내가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본 것 같군.’

그 늙은이가 맹주에 취임했을 때.

각 지역에서 어느 정도 힘이 있다는 문파의 좌장들이 각자의 후계와 함께 맹주의 술을 받았다.

그때 한 번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무 살의 어린 청년이었던 그때도 저놈의 얼굴엔 살벌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쉽게 잊기 힘든 인상이었다.

‘그때의 젊은 후계자가, 나잇살 처먹은 지금은 지방 상권을 유린하는 독재자가 되었군.’

세상일이라는 게 참 알기 어렵다니까.

척.

공손세가의 병력이 걸음을 멈추었다.

선두에 선 가주, 공손황(公孫凰)이 눈을 빛냈다.

“네놈들이냐?”

족히 이십여 장은 떨어져 있는데도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굉장한 내공 조예였다. 공손명과 같은 절정고수지만, 이룬 경지가 차원이 달랐다. 서량이나 마동필은 순식간에 그 과정을 통과해 버렸지만 절정고수 사이에도 격차는 극심하다.

저 공손황은 벌써 초절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일문의 수장으로 부족함이 없는 무공이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공손가주?”

“그렇다.”

“오란다고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공손황은 흔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어떤 무뢰배인지 직접 봐 두고 싶었지. 근래 들어 본가를 건드리는 놈들을 찾아보긴 힘들어서 말이야.”

담담한 목소리에 굉장한 자부심이 깃들었다.

실제로 그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금일 공손가의 힘을 제대로 보여 줌과 동시에, 비연루를 완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속셈일 터였다.

“투검각주와 휘하 무사들을 쓰러트릴 정도라면 굉장한 고수임이 분명하겠지. 허나 네놈들은 실수했어. 감히 본가를…….”

“아아, 됐어. 그런 뻔한 대사는 숱하게 들어 봤다. 너절하다고.”

공손황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거다. 관부가 제 역할을 못 하는 때니만큼, 관부는 명망 있는 지역 유지라 할 수 있는 무림 문파가 치안을 담당케 하지. 한데 어째서 너희는 강도처럼 주루를 빼앗으려 드는 거냐?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 줘도 모자랄 판에.”

서량의 목소리는 공손황의 그것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담고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는 목소리. 강한 신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공손황이 외쳤다.

“닥쳐라! 어디서 그따위 요언을……!”

“수입의 육 할을 달라는 계약서를 들고 왔잖나. 그게 강도지 뭐냐?”

사람들이 해연히 놀라 공손황을 바라보았다. 수입의 육 할을 내놓으라니? 그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공손황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이것들이 감히 그따위 눈깔로 누굴 보는 것이야!!”

화아아악!

“헉!”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공손황을 위시한 무사들의 살기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공손황이 다시 외쳤다.

“긴말 않겠다! 스스로 팔 하나를 잘라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팔?”

“그렇다!”

“팔이라…… 그거 좋지.”

콰득!

공손황의 눈이 부릅 뜨였다.

저 멀리 서 있던 서량이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서량이 손을 흔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엔 뜯겨 나간 팔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로 공손황의 팔이었다.

푸화아악!

“끄아악!”

뒤늦게 터진 피. 공손황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서량의 안광이 깊은 청색으로 물들었다.

“다음은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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