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염라마군(閻羅魔君) (2)
파앙!
“이 정도인데…….”
앵화가 볼을 긁적였다.
“어때요?”
“…….”
“……그렇게 못 봐 줄 정도인가요?”
“아니.”
여상린은 얼빠진 표정을 수습했다.
“굉장한데?”
“그, 그래요?”
“정말이야. 진짜라고.”
앵화가 얼떨떨한 얼굴로 뻗은 손을 거두었다.
여상린이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공심법을 연마했다고 했지?”
“네. 환희원 소속 시녀들은 전부 내공을 연마해요.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가사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거든요.”
“하지만 제대로 무공을 연마해 본 지는 얼마 안 됐잖아?”
“네에. 소교주님께서 감찰사로 출교하시기 전이니까…….”
“그새 발경(發勁)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거네? 정말 대단한데?”
여상린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실, 앵화의 무재(武才)는 그리 대단하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익혀 온 내공심법 덕에 혈도가 탄탄했고, 혈맥 또한 다부졌으며, 신체도 유연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어릴 때부터 내공을 연마한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장점이었다.
진짜 대단한 것은 기공(氣功)에 관한 앵화의 감각이었다.
앵화는 인내심이 무척 뛰어난 편이라 어떤 일이든 진득하게 집중할 줄 알았다. 즉, 내공을 연마하기에 알맞은 성품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재능이 기(氣)의 활용까지 닿는 것은 아니었다. 내공을 연마하는 것과 기를 운용, 활용, 나아가 응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앵화는 달랐다.
“마공이라서 더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발경이면 절대 무시 못 해. 제대로 들어가면 일류고수라도 일격에 전투 불능까지 만들 수 있겠어.”
“그, 그 정도인가요?”
앵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여상린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그, 그렇게 좋아?”
“악! 아파요!”
“너무 기뻐하진 마. 기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것과 실전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천하제일고수도 살수의 칼에 죽는 세상이잖아? 나도 그렇지만, 너도 한참 멀었어.”
“헤헤.”
그래도 좋긴 좋은 모양이다. 앵화는 쥐어박힌 머리를 문지르면서도 실없이 웃었다.
웃으며 그녀를 보던 여상린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재능도 전염이 되는 걸까? 아니면 노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서 그런 걸까?’
서량 주변에는 하나같이 재능 있는 사람들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천마신교의 소교주니,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닐 리는 없잖은가.
그러나 앵화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소교주님의 무(武)에 관한 집중은 누구보다도 뛰어나. 아니, 집중 정도가 아니라 숨 쉬는 것 자체를 무(武)와 동일시한 사람이지.’
그녀가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바위 앞에 마동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운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명상에 들어간 것 같았다.
‘마 호위도 그래. 마 호위의 무공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늘었어. 그전까지도 노력은 했으되, 소교주님을 보고 새로이 깨달은 게 분명해.’
앵화도 비슷할 것이다.
어쩌면 서량의 무리(武理)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은 마동필이 아니라 앵화일지도 모른다. 항상 옆에서 수련하는 걸 보고, 마동필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보고 들었을 테니까.
‘나도 힘내야지.’
사실 여상린은 무공에 큰 뜻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서량과 함께 여러 사건을 거치며, 그녀는 성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 위험천만한 세상은 어중간하게 강해선 편하게 살아갈 수 없다.
이왕 무공에 손을 댔으면 누구보다도 강해질 생각을 해야 했다.
‘최소한 내 목숨을 지킬 정도, 그리고 일행에게 폐가 되지 않을 정도로는 연마해야 돼.’
그렇게 여상린이 다짐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크르릉.
바위 옆에서 죽은 듯 엎드려 있던 호왕이, 바위 못지않은 크기의 대가리를 들었다.
목을 울리며 서쪽을 바라보는 눈빛은 무척이나 붉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흉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붉은 보석, 홍옥(紅玉)과 같은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여상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괴물 호랑이가 왜 그러지?”
그때였다.
우웅.
공기 중으로 전달되는 미세한 진기의 흐름.
여상린의 눈도 호왕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진기를 개방하고 정신을 집중하니, 그곳에서 격렬한 내공이 부딪치는 게 느껴졌다.
‘싸움?’
아니다.
실전과 같은 싸움이되, 살기가 묻어 나오진 않는다. 비무였다.
그리고 이 내공은 여상린도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놀러 가야겠다.”
“네?”
“앵화는 상천수의 투로 백 번 더 밟기!”
“아, 네!”
여상린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쪽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쿵.
그러자 호왕도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상린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호왕이 딴청을 피우듯 눈을 깔곤 꼬리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꼬리 굵기가 거의 여상린의 허리만 한데도 무척이나 유연하게 움직였다.
“같이 갈래?”
크릉.
“태워 줄래?”
크르릉.
“앗싸!”
여상린이 폴짝 뛰어 호왕의 목에 올라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호왕이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체념한 호왕이 거체를 움직였다.
쿵. 쿵. 쿵.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린다.
여상린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엄청나네. 너 정말 영물은 영물이구나?”
무게가 실제로 천 근이 넘는다. 시쳇말로 집채만 한 몸뚱이를 가진 대호 중의 대호였다.
자연적으로 날 수 없는 생물임이 분명했다. 이런 과도한 덩치는 오히려 생존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동작이 굼떠 사냥에 부적합하고, 은신도 못 할 것이다.
그런데도 호왕은 초절정고수를 상대할 만큼 무서운 전투 능력을 지녔다고 했다. 당연히 힘과 속도가 평범한 맹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날 것이다.
신기한 것은 금호처럼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없다는 것이다. 여상린은 다른 것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후우, 좋네.”
범의 등에 탄 기분은 무척 묘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웅지와 세상을 가진 듯한 충족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워낙에 커서 한 걸음, 한 걸음에 주변 풍경이 바뀔 정도였다. 덕분에 비무가 벌어진 곳까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스륵.
나뭇잎을 젖히자 여상린의 눈에 널찍한 공터가 보였다.
그리고 두 초고수의 몸놀림도.
파바바박!
신들린 듯 움직이는 서량,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쫓는 고구.
‘굉장하네.’
육안으로 잘 잡히지도 않는다.
그것이 바로 초절정고수의 속도였다. 인간을 초월한 괴물들만이 낼 수 있는 속도인 것이다.
파바바바박!
장검이 이리저리 휘어지며 사방에 매서운 검기를 뿌렸다.
‘연검?’
여상린이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연검은 채찍보다 연성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사방이 검격이요, 팔방이 검광이다. 고구가 휘두르는 검결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중원의 공포로 군림하던 신교의 무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라면?’
여상린의 눈이 깊어졌다.
‘무리다. 내 실력으로는 저 정도 검결에서 벗어날 수 없어. 길어야 일곱 합…….’
파아아아앙!
순간 무서운 속도로 움직인 서량이 주먹을 휘둘렀다.
파파파파팡!
일권을 휘둘렀는데 굉음은 수십 번을 연달아 터진다.
사위를 에워싼 검망(劍網)이 모습을 감추었다. 고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파아앙!
서량의 발길질이 단번에 고구의 머리를 노렸다.
폭발적인 각법이었다. 마치 화포의 포격이 날아드는 것 같았다.
저런 것을 막는 건 누구라도 무리다. 고구 역시 그걸 깨달았는지 재빨리 상체를 낮추었다.
퍼엉!
하단으로 치고 들어오려던 고구의 몸이 움찔거렸다.
여상린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저런 방법을…….’
허공을 가른 각법이 공기를 터트려 충격파를 생성했다. 그 충격파가 고구의 움직임을 반 박자 늦춰 버린 것이다.
그 뒤로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고구의 열세가 드러났다. 공기를 터트리며 휘둘러지는 권각에, 고구는 번번이 물러나기 바빴다.
하지만 물러나기만 해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흡!”
콰앙!
발로 대지를 찍어 후퇴를 멈춘 고구가 곧바로 장을 내쳤다.
검격이 아닌 장법이다. 놀랍게도 장법 초식의 유연함이 검술에 뒤지지 않았다.
그때, 서량이 합장하듯 양손을 맞댔다.
콰앙!
“컥!”
고구의 팔이 뒤로 튕겨 나갔다.
투로를 다 풀어내기도 전에 막혀 버렸다. 충격파로 공격선이 제압당한 것이다.
여상린의 눈이 번뜩였다.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에 물러나게 만든다. 내공이 강해서가 아니야. 투로의 허점을 비집어 발경을 터트린 거야.’
기가 막히는 수법이었다.
‘순간적으로 생각해 낸 방법인가? 아니면 본래 저런 무공이 있었던 건가?’
뭐가 됐든 서량의 안목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순간의 대응이든 본래의 무공이든, 저리 적절하게 발경을 터트린다는 것 자체가 무신(武神)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걸 증명했다.
고구가 다시 달려들려 했다.
그때, 서량의 주먹에서 새하얀 광채가 무섭도록 증폭됐다.
콰아아앙! 화아아아악!
여상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대지를 향해 내갈긴 일격. 그 일격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폭풍이 사방을 덮쳤다.
후우우웅.
바람이 잠잠해지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투기(鬪氣)도 식었다.
멍하니 서량을 보던 고구가 고개를 숙였다.
“많이 배웠습니다.”
“알겠어?”
“조금은.”
“자네는 기(氣)보다는 기(技)에 더 능해. 그래서 위급한 순간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기공전보다 투로 위주의 초식을 풀어내려 하지. 물론 그것도 대단하지만, 자네보다 한 수 위의 고수에겐 어지간해선 통하지 않아.”
“그렇군요.”
“기(技)를 한계까지 연마했으니, 이제는 기(氣)를 연마해 봐. 기공전의 수준이 초식을 연마한 수준에 도달하면, 분명 신세계가 열릴 거야.”
고구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큰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고구가 등을 돌렸다. 따로 수련을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웃으며 고구의 뒷모습을 보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숨어서 엿보지 말고 이만 나와.”
“……헤헤.”
여상린이 호왕의 목덜미를 툭툭 쳤다.
하지만 호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심유한 눈으로 서량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여상린은 투덜거리며 호왕의 등에서 내려왔다.
“인상적인 비무였어요.”
“보였어?”
“아뇨.”
“그런데 뭐가 인상적이야.”
“적어도 제가 가야 할 길은 보였으니까요.”
서량의 눈이 빛났다.
“제대로 뛰어들어 보려고?”
“그래야 될 것 같아서요.”
“흐음.”
물끄러미 여상린을 보던 서량이 멀어져 가는 고구를 향해 외쳤다.
“고 당주!”
“하교하실 말씀이라도?”
“다 불러와.”
“예?”
“동필이, 앵화, 금호까지 몽땅 데려와!”
서량이 두 주먹을 마주 부딪쳤다.
“이왕 의욕 생긴 거, 오늘 아주 날 잡은 셈 치자. 우리 애들 수준이나 왕창 끌어올려 보자!”
* * *
사흘이 지났다.
한참 수련에 열을 쏟던 일행에게 공야치가 찾아왔다.
“소교주님.”
“어, 왔어?”
“…….”
“표정이 왜 그리 썩었냐?”
공야치의 눈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제가 소교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도움이라? 그것 좋지. 무슨 일인데?”
“소교주님과도 무관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
“……정파의 후기지수(後起之秀)들에 관련된 일입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애들 싸움은 언제나 어른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지. 궁금한걸? 무슨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