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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299화 (299/774)

299화. 염라마군(閻羅魔君) (5)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궁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갈 소저로군요.”

제갈소영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뵈어요. 옛날에 몇 번 뵈었죠?”

“네, 기억나네요.”

남궁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갈세가?”

제갈소영이 남궁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남궁 소협과는 처음이군요. 인사드려요. 제갈…….”

“그건 됐고, 방금 뭐라고 하셨소?”

“네?”

“이쪽에서 듣기에 상당히 거슬리는 말을 한 것 같소만.”

그야말로 단도직입적이다. 격식 있는 인사는 나누기도 싫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제갈소영이 손뼉을 쳤다.

“아! 제가 입이 방정이었군요.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사과하시오.”

남궁룡의 얼굴에는 확연한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제갈소영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물론 사과드려야지요. 죄송해요.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다만 제가 친 마도파라고 한 것은…….”

“누가 그따위 것 때문에 그러는 줄 아시오?”

“네?”

이때만큼은 제갈소영도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룡이 장 씨 남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이분들이오. 당장 사과하시오.”

장 씨 남매에게 사과하라니?

제갈소영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곳을 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똑같았다.

“이분들에게 말인가요?”

“그렇소.”

“……?”

“귀천(貴賤)이라는 말은 그리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말이오. 사과하시오.”

제갈소영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남궁 소협의 말씀은 제가 이분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단 뜻인가요?”

“그렇소.”

“고작 귀천이라는 단어 때문에요?”

“고작?”

남궁룡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일순간 공기가 뒤바뀔 정도로 시린 눈빛이었다. 제갈소영은 흠칫했다.

“당신은 이들 남매에게 내세울 것 하나 없으면서 은연중 모욕을 가했소. 설령 내세울 게 있다 한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지나친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소?”

“…….”

“당신이 진정 정도(正道)의 무가(武家)에서 나고 자란 이라면 그 말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오. 더는 긴말 않을 테니 사과하시오.”

단숨에 제갈소영을 무례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발언이었다.

물론 남궁룡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데가 없었다.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제갈소영의 실수는 명백했다. 그녀는 사과를 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녀가 제갈세가의 여식이란 점이었다.

“놀랍군요. 설마 남궁 소협이 다른 사람의 편을 들다니요. 그것도 이름도 안 난 문파의 자제들을 위해서요.”

“이름이 나건 안 나건, 당신의 언사는 분명 문제가 있소.”

“어머, 제 언사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죠?”

“방금까지 한 말은 어디로 들은 거요?”

제갈소영이 웃으며 말했다.

“귀천이라…… 그 말이 이분들을 가리키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남궁룡이 인상을 찡그렸다.

“문무겸전이 아니라 말장난에 능한 가문이었군.”

순간 제갈소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귀가 어두우시오? 말장난에 능한 가문이라 했소.”

“……남궁 소협. 제갈세가를 모욕한 거라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나는 제갈세가를 언급하지 않았소만? 왜 귀 가문을 가리켰다고 생각하시오?”

제갈소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괜한 말장난을 쳤다가 가문이 모욕을 받았는데도 아무런 말을 못 하게 생겼다.

남궁룡이 표정을 바로 했다.

“좋소. 말장난 따위는 집어치웁시다.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건 분명히 하시오. 최소한의 도리는 아는 사람이라 믿겠소.”

남궁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천방지축에 혈기 넘치던 동생이 참으로 듬직하게 크지 않았나. 아직은 다소 거칠고 날카롭지만, 이 정도면 참 바르게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뒤를 생각지 않고 내지르는 것은 분명한 문제지만 말이다.

제갈소영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당황하지 말자.’

그녀가 남궁 남매를 건드린 것은 그저 단순한 시샘 때문이었다.

자신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남궁화는 그녀보다 더 아름다웠고, 누구보다도 기품이 있었다. 지금껏 자신을 보던 청년들이 남궁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것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조금 짓궂은 행동이었지만,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문득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흥미로워하는 자들, 불편해하는 자들,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자들 등등 가지각색의 눈빛이었다.

제갈소영의 눈가가 살짝 떨려 왔다.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분명히 말하는데, 저는 결코 이 사람들에게…….”

그때였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멀리서도 용케 이 소동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재빨리 다가온 제갈군이 고개를 숙였다.

“제 동생이 철이 없어서 괜한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오라비인 제가 대신 사과할 테니, 이만 노여움을 푸시길.”

“제 동생도 언사가 많이 거칠었음을 인정해요.”

남궁화가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작은 일도 크게 만들곤 한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제갈군의 사과와 남궁화의 사과는 매우 달랐다.

각기 동생의 실수를 대신 사과하겠다고 말하지만, 격이 다르다. 제갈군은 애써 문제를 덮으려는 기색이 강했고, 남궁화는 진심으로 제 동생이 잘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갈군이 한숨을 쉬었다.

“하면 이 문제는 이만…….”

“네, 이만 마무리 지어야죠. 그러니 제갈 소저는 속히 저 두 분께 사죄를 드리세요.”

제갈 남매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이보세요, 남궁 소저.”

“말씀하세요.”

“이 문제는 우리끼리 사과하는 거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우리 문제는 이대로 끝내도 괜찮겠지요. 하지만 이분들은 분명 사과를 받아야만 해요.”

남궁화가 장 씨 남매를 바라보았다.

장 씨 남매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를 받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이런 문제를 수도 없이 겪어 무뎌진 탓에 표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장 소협. 우리 남매가 너무 과하게 나선 것은 아닐는지요?”

“예?”

“…….”

“아, 그 부분 말씀이로군요.”

장천수가 씁쓸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굳이 사과까지 받아 내 가면서 사건을 키우고 싶진 않군요.”

마음의 불편함은 분명하지만 이대로 묻어 두자.

담담했던 남궁화의 얼굴에 은은한 위엄이 깃들었다.

“그래선 안 돼요.”

“예?”

“장 소협과 그리 깊은 친분을 나누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지만, 감히 한 말씀 드릴게요.”

“……?”

“모욕에 익숙해져선 안 돼요.”

“……!”

“바른 것은 바르다 말하고, 틀린 것은 틀리다 말하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아니,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한데 왜 이유 없이 받은 모욕은 그냥 묻어 두려 하시나요? 그것이 본인의 문제라서 그런가요?”

“저는 다만…….”

“장 소협이 지금껏 배우고 쌓아 온 성품과 인격은 결코 무시해도 될 만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자들도 문제지만, 과소평가하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름다워서도, 이룬 경지가 뛰어나서도 아니었다.

그녀의 언행이, 품성이 누구보다도 당당한 정도(正道)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삼자가 나설 문제는 아니었죠. 아마 두 분께서는 저희가 상상도 못 할 경험을 겪어 오셨을 거예요. 어쩌면 제 말은,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치기 어린 발언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남궁화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한 쌍의 안광에서 불이라도 뿜어지는 듯하다.

“그래도 언제까지 불의(不義) 앞에서 숨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후기지수들은 순간 등줄기를 훑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조금은 유치하고, 상당히 이상적이며, 뜬구름 잡는 소리로까지 느껴지는 말.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정도(正道)다.

바른길, 도리를 지키는 길. 수천 년 무림사에서 정파가 단 한 번도 멸망하지 않은 이유는 수준 높은 무공이 아닌 그러한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제갈 남매도, 장 씨 남매도, 나아가 이곳을 보는 모두를 침묵시킨 남궁화의 목소리.

그 묘한 정적은, 한 사람 때문에 깨져 버렸다.

“명연설이었소. 조금 간지럽긴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뒤쪽으로 향했다.

팽열이 뒷짐을 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 남매에게 사과를 종용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 아니겠소? 보는 사람도 많은데 말이오.”

남궁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보는 사람이 있다고 마땅히 해야 할 사과도 못 할 만큼 치졸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뼈가 있는 말이었다.

제갈 남매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 사과를 하지 않으면 진짜 치졸한 사람이 되게 생긴 것이다.

팽열이 고개를 저었다.

“소저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하지만 우리는 오대세가의 후예들이외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모르겠소? 오대세가는 수백 년이 넘도록 정파를 지탱해 온 기둥이오. 우리의 사과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를 담고 있소. 함부로 고개를 숙여선 안 되는 위치라는 거요.”

남궁화가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나요?”

팽열이 씨익 웃었다.

“그 정도 자신감도 없이 어찌 거친 무림을 살아갈 수 있겠소?”

“귀하가 특별하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특별해요.”

“그게 바로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거요. 그 특별함을 증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력 아니겠소?”

“그 특별함은 귀하가 아니라 귀하의 가문이 만든 것 아닌가요?”

“다를 게 있소? 핏줄도 재능이외다. 있는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잖소.”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룡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대단한 오대세가의 후예라는 위인들이 심성은 안 닦고 주둥이만 닦았군.”

순간 일대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팽열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귀가 어두운 사람이 많군.”

“……건방진.”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다.

하지만 팽열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에 철저한 비웃음을 그려 넣었다.

“생각해 보니, 저 제갈 동생이 했던 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지 뭔가.”

남궁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남궁가가 마교를 두둔한다는 소문이 중원 천지에 퍼져 있다. 악랄하기로 소문이 난 마인들의 뒤를 봐주는 가문이니, 그따위 언사가 입에 붙을 만도 해.”

다시 한번 정적이 일었다.

남궁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마교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필요할 정도로 만만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나요?”

“그거야 모르지. 중요한 점은 남궁세가가 마교와 친분이 깊다는 거지.”

“아뇨, 팽 소협의 말은 틀렸어요.”

“아니라고 발뺌할 셈인가?”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을 존중할 뿐이에요. 적어도 우리가 만났던 마인은 존중할 만했어요. 하지만 마인을 직접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이렇다, 저렇다 선입견만 가진 음탕한 얼치기에게는…… 글쎄요? 별로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군요.”

순간 팽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음탕한 얼치기란 말은 누가 들어도 그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이 요망한 연놈들이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남궁화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와중에 다행이지. 그대의 주둥이보다는 품격이 있는 것 같으니.”

“이년!”

서로를 향한 분노가 급속도로 증폭된다.

후기지수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두 고수의 기파가 위협적인 분위기를 생성했기 때문이다.

팽열이 이를 갈았다.

“오늘 너희 연놈들의 죄를 물어 남궁의 뻔뻔함을 세상에 알려 주마.”

“아쉽군. 네가 그리 음탕한 머저리만 아니었다면 우린 제법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어쩜 그리 내 마음을 잘 아는지.”

차아아앙!

더 이상의 도발은 없었다. 팽열이 황금빛 거도를 뽑아 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크허허헝!!

사방 천지를 뒤흔드는 우렁찬 포효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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