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마도(魔道)가 낳은 괴물 (3)
공야치 덕분에 큼직한 주루를 통째로 빌릴 수 있었다.
대낮부터 시작된 젊은이들의 토론은 새벽까지 지속되었다.
당장 무슨 주제로 토론을 할까 걱정이었지만, 의외로 서량은 능수능란하게 좌중을 이끌었다.
덕분에 조금은 조심스럽게, 조금은 소심하게 시작된 토론은 금세 과열되었다. 각자가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놀랍게도 서량은 모든 사람들과 돌아가면서 진지한 얘기를 나누었다. 과거의 이야기는 많지 않았고, 정파의 현주소와 마도 무림은 어떤 식으로 무림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인지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남궁화는 신기했다.
‘이런 자리도 만들어질 수 있구나.’
서량이 빠진 자리에는 저희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진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 종종 고성이 오갔지만, 지나치게 과격한 언쟁은 신기할 정도로 없었다.
상대가 보고 들은 것을 서로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이리라.
‘생각들이 자유로워. 그리고 깊다.’
남궁을 제외한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인원들은 전부 빠진 자리였다.
말하자면 중소 문파의 후기지수들만 남았다는 것인데, 그들의 식견은 실로 놀라웠다. 무학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오히려 세상 경험은 그들보다 훨씬 많은 듯했다.
거칠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위 명문에 비하면 세력도, 금력도, 명성도 한참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찍이 세상에 나가 몸으로 부딪치며 클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래서 명문의 무사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보는 사람이 많았다. 무공은 남궁 남매보다 낮을지언정 식견과 감각, 생각의 깊이는 오히려 훨씬 나은 경우도 많았다.
그런 그들이 한마음으로 외치는 말이 있었다.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정의를 부르짖기 위해 그리 말하는 게 아니었다.
첫째로, 가장 많이 죽어 나가는 건 결국 중소 문파의 무림인들이다.
정파가 강한 이유이기도 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인들이 선두에 설 때도 많았지만, 결국 정파 무림의 진짜 힘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소 문파에서 나온다.
그래서 가장 많이 희생되는 것도 그들이다. 당연히 협의(俠義)만을 지키자고 전쟁이 벌어지는 걸 보고 있을 순 없었다.
둘째, 전후(戰後)에 살아남기 힘들다.
대문파들, 명문의 무가들은 대부분 추측기도 힘든 보화(寶貨)를 축적한다. 하지만 중소 문파들은 금력부터 사업 기반까지, 한 번 망가지면 돌이킬 수가 없다.
결국, 살아남아도 지옥일 뿐이다.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멀쩡한 삶을 이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자, 남궁 남매의 허를 찌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바뀌는 것이 없다.
그렇다.
정파와 마도가 전쟁을 벌이거나, 사파와 마도가 싸우는 일도 있었다. 물론 정파와 사파가 전쟁을 치른 역사도 많았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희생이 있었다면, 그 희생을 발판 삼아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무림은 정사마(正邪魔)를 유지한 채 바뀌질 않았다.
의미 없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결국 똑같은 세상의 반복이라면, 애초에 싸우지 말고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분란이 터져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그 분란 중 대부분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벌어집니다.”
중소 문파의 자제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파나 마도의 무인들과 섣불리 분쟁을 벌이려 들지 않았다.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명문가의 무인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현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만, 각 문파의 명성과 힘에 기대는 사람이 훨씬 많다.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는 세력이 있으니, 그만큼 위험한 일을 벌이기도 쉬운 것이다.
“저희는 평화를 위합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어릴 적 어른들께서 말씀하시던 낭만 가득한 강호를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남궁화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서량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럼 바꾸면 되잖아.”
“소교주도 알겠지만, 그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물론 쉽지 않지. 변하지 않는 세상에 그대들이 지쳐 버린 것도 알겠어. 정확히는 자네들의 부모 세대지만 말이야.”
서량의 눈이 빛났다.
“그래도 지속했어야 했어. 세상은 반짝 바뀌지 않아. 지속적으로, 꾸준히 조금씩 바뀌는 거야.”
“예, 그렇지요. 그러나 누구도 그 일을 주도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웃기 바쁘지요.”
“나는 그 말을 핑계라며 비웃지 않겠어. 세인들의 관심과 비웃음을 이겨 내는 자리가 얼마나 힘들지 알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그것은 십대고수를 상대하는 것보다 힘들겠지요.”
“그래도 해야 해.”
“…….”
“그래도 해야 한다. 패배감에 물든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후우.”
“힘든 길이라고 꼭 옳은 길이라고 볼 수는 없지. 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일에 쉬운 길 따위는 없어. 너희의 자리는 너희가 만드는 거다. 누구도 너희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는 않잖아.”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구파와 오대세가를 뒤집어엎으라는 게 아니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과격한 방법에는 반드시 후폭풍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너희가 바라는 세상이 평화라면, 최대한 평화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겠지.”
씁쓸함이 감도는 현장.
그때, 누군가가 웃으며 물었다.
“한데, 소교주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해 줘도 되는 겁니까? 오히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멸망시키라고 부추겨야 정상이잖아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어디 가서 개백정 소리는 들을지 몰라도, 나름의 격을 아는 사람이야.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라야 칼질하는 맛이 있지.”
“전쟁 싫어한다면서요?”
“어? 그랬던가? 그래도 뭐, 혹시 모르잖아?”
좌중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서량은 은근히 좌중의 분위기를 좌우할 줄 알았다. 진지하게 같이 대화에 임하지만, 너무 심각해진 분위기를 농담 몇 마디로 풀 줄도 알았다.
놀랍게도, 처음 본 마교의 소교주와 후기지수들이 한나절도 되지 않아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진 것이다. 상대를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 소통은 된단 말이다.
“한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소교주가 중원에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확실하게 들은 것 같진 않아서요.”
“죽일 연놈들이 있어서.”
“……누구요?”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 그나저나 너희, 생각은 하고 이 자리에 참여한 거 맞지?”
“말 돌리시네.”
“쓰읍.”
“무슨 생각이요?”
“마교의 소교주와 단체로 대담을 나눴다고 하면 정파 무림의 윗대가리들이 절대 좋게 보진 않을 거야. 같이 오지 않은 애들 중 상당수가 그 이유 때문에 참가하지 않았을걸?”
의외로 그들은 그 부분을 별달리 문제로 삼지 않았다.
“우리가 왜 천중지회에 참여했는지 아십니까?”
“명문가 놈들한테 아부 떨려고?”
“…….”
“알았어, 이놈들아. 왜 참여했는데?”
“아니요, 소교주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 겁니다.”
“대뜸 인정이네?”
“하지만 우리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습니까? 저희 대부분이 도태될까 봐 참여한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의 문파가 아부를 떨지 않으면, 아부 떨어서 성장한 다른 문파에게 잡아먹힌다?”
“……비슷합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진짜 화려하게들 산다.”
“그러고 싶지 않다니까요, 우리도.”
투덜거리는 모습이 조금은 장난스러워 보이고, 그만큼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소교주가 등장하면서 그 화려한 자리가 완전히 박살 나 버렸지요. 애초에 알랑방귀 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단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제한 거네?”
“감사드려야 합니까?”
“됐어, 인마. 그래서?”
“어차피 자리도 파투 난 거, 적인 천마신교에 대해 뭐라도 알게 되면 좋잖습니까? 호기심도 있고요. 그래서 온 겁니다.”
“아하? 책임을 물려고 하면 나한테 화살을 돌리면 된다?”
“가장 쉬운 방법이 될 수 있겠죠.”
“망할 것들. 너희 진짜 잔대가리 잘 돌아간다.”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뭐, 이제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희들의 대적인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 놈은 어떤 놈 같아 보이냐?”
“재미있지만 위험한 사람이요.”
“그 정도면 선방했군.”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괜찮은 자리였어. 너희끼리 더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디 가세요?”
“아까 못 들었어? 팽가가 날 잡으러 온다잖아.”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청년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가 한번 얘기를…….”
“아서라. 팽가의 소가주 놈 보고도 몰라? 애초에 말이 통하는 놈들이 아니야.”
“그래도 쫓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쫓겨? 누가?”
“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도망치려는 게 아니야.”
서량의 눈에 은은한 혈광이 어렸다.
“다 작살내러 가는 거지.”
침묵에 잠긴 공간에 한기가 덧씌워졌다.
“나는 분란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날 건드리려는 놈들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게 분란입니다.”
“너희가 머리를 굴리며 살아남았다면, 난 목숨 내놓고 막무가내로 살아온 놈이거든.”
“위험할 겁니다.”
“대가를 치르는 거지. 나처럼 살면 최소한 쓸데없이 답답할 일은 없거든.”
서량이 자세를 바로 했다.
“오늘 이 자리 어땠어? 괜찮았어?”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림의 정세에 대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대화에 임해 본 것은 분명 처음이었다. 신기했고 놀라웠다.
“너희는 대단한 거야.”
“우리가 뭘…….”
“아무리 본 적 없는 마인이라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거야. 심지어 내가 처음 난입했을 때 꽤나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지. 그런데도 너희는 이렇게 날 따라와 줬어. 군중 심리든 뭐든 말이지.”
“…….”
“너희가 날 모르듯, 나 역시 너희를 모른다. 이 자리가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정(正)과 마(魔) 사이에 공백이 있기 때문이야.”
“그렇지요.”
“누군가는 그 공백을 증오로 채우려고 든다. 누군가는 슬픔으로, 누군가는 공허로 놔두려고 하지.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서량이 미소를 띠었다.
“난 그 삼십 년의 공백을 평화로 채우고 싶다.”
“……!”
“우린 아직 서로 간에 믿음이 없어. 하지만 최소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맛은 볼 수 있었지. 시작은 미비했지만, 이제 가능성이 열렸다.”
서량이 몸을 돌렸다.
“일 년 뒤 오늘, 나는 다시 너희들과 만나고 싶다.”
서량의 뒷모습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혼란이 깃들었다.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자신들을 만나 주지 않는다. 하지만 대적인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은 자신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 말이, 그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때까지 죽지들 마라, 이 애송이들아.”
잠시 후, 저 멀리서 마차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보는 남궁화의 눈이 깊어졌다.
“……왜 아버지가 저 사람을 존중했는지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