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마도(魔道)가 낳은 괴물 (4)
“일어나.”
“쿨럭!”
밭은기침을 뱉어 낼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다.
힘겹게 눈을 떴지만 동공이 흐릿하다. 정신이 없는 듯했다.
그때, 뱀처럼 구불거리는 검광(劍光)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푹!
“컥!”
뼈와 신경이 긁힌 듯한 날카로운 통증.
팽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용케 동맥을 건드리지 않고 쇄골과 흉골 사이에 연검을 꽂아 넣은 고구가 그대로 마기를 전달했다.
치이이이익!
“끄아아악!”
팽열의 사지가 덜덜 떨렸다.
체내로 주입된 무자비한 마기가 온갖 혈도를 헤집고 지나갔다.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전신의 신경이 전부 타 버리는 것 같았다.
고구가 손을 휘둘렀다.
부웅! 콰앙!
이제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 것인지.
그저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벽에 박힌 팽열의 꼴은 참으로 비참했다. 창백한 낯빛과는 대조적으로 턱 부근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육체가 신공으로 보호받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끄으윽! 여, 여기가 어디……?”
“도축장이다.”
도축장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팽열은 안간힘을 쓰며 눈을 끔뻑였다. 잘 잡히지 않던 초점이 조금씩 잡혔다.
“헉!”
제법 떨어진 거리에 서량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팽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서량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해 버린 것이다.
서량이 고구를 보았다.
“어때?”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연마가 잘 되었습니다. 튼튼하군요.”
“그거 다행이군. 벌써 몸에 이상이 있으면 안 되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팽열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이 일생일대 최악의 순간을 맞이했음을. 이놈들은 결코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을 것임을.
“이, 이 죽일 놈! 당장 풀지 못해?!”
퍼억!
“컥!”
팽열이 또다시 피를 토했다.
고구의 주먹은 위력만 좋은 게 아니었다. 복부의 어딜 어떻게 쳤는지, 속이 다 뒤집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구가 담담하게, 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사를 공손히 해라. 네깟 쓰레기가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다.”
“크으윽!”
팽열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왜…… 왜 이러는 거냐?”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뒷짐을 쥔 채로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철저한 무시였다.
팽열이 외쳤다.
“그 계집애 때문이냐?! 정말 그런 거라면 너희는 실수한 거야! 고작 그따위 일로 팽가의 소가주인 나를 겁박하다니!”
여전히 대답 없는 서량.
오히려 마동필과 여상린, 앵화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팽열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극심한 혐오가 깃들었다.
팽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껏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저따위 시선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중소 문파의 무림인들에게 보내던 눈빛보다 훨씬 험악한 눈빛이었다.
“감히……!”
우둑!
“으아아아악!”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는 아직도 상황 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그의 엄지를 으스러트린 고구가 말했다.
“소교주님.”
“왜?”
“저는 형법당주입니다.”
“알아. 그래서 뭐?”
“아시겠지만 형법당의 수장 노릇을 하려면 고문에도 능해야 합니다. 이 정도 재료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수 있지요.”
사람을 두고 재료란다. 팽열의 얼굴에 극심한 공포가 어렸다.
“안 돼.”
“사흘 안에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안 돼.”
등을 돌린 채라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서량의 목소리는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죽이든 살리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든 그건 전부 피해자 가문이 결정할 일이다. 숙수가 손님 밥상에 수저를 얹으면 안 되지.”
“간이 됐는지 맛도 못 봤습니다.”
“알아서 될 거야. 제 놈 가문의 병력이 산산조각 나는 꼴을 보면.”
우우우웅.
문이 반쯤 열린 살왕기차 안에서 천마도가 날아와 서량의 손에 잡혔다.
치이이익!
서량의 기분을 느낀 것일까.
마공을 개방하지 않았음에도 자흑색 칼날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필.”
“예, 소교주님.”
“서신을 확인해.”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동필은 문득 동쪽 하늘 저편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매는 하오문 최고의 전서응이라는 오왕(汚王)이었다.
삐이이익!
우렁찬 소리와 함께 재빠르게 하강한 오왕이 마동필의 팔뚝에 앉았다. 오왕의 발톱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웠지만, 마동필의 팔뚝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
오왕의 발목에 묶인 서신을 풀어 내용을 확인한 마동필이 외쳤다.
“팽가의 병력이 백 리 밖에서 접근 중이랍니다! 서신이 도착한 시간을 상정하면 삼십 리까지 좁혀졌을 거라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마동필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하남 일대 중소 문파에 비상령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중 절반 이상의 문파가 전시 체제로 돌입했다고 하며, 몇몇 문파들은 팽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합니다.”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우릴 노리려는 듯합니다.”
대담에 참여하지 않은 후기지수들이 가문으로 돌아가 소식을 전달한 것이다.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움직임이 실로 빠르다.
새삼 하오문과 동맹을 맺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발 빠른 정보망은 매 순간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하남은 분명 비가 잦은 지역이긴 했다. 하지만 한 달 후면 초겨울인데 또 비가 오려 한다. 얄궂은 날씨였다.
“동필아.”
“예, 소교주님.”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중원에서, 라는 말이 빠졌지만 마동필은 철썩같이 알아들었다.
“그렇습니다.”
“어땠어?”
마동필이 웃으며 답했다.
“그 대답은 중원 주유가 끝나면 들려 드리겠습니다.”
“아직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힘들다?”
“아주 좋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값진 경험 아니겠습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너답다.”
지금 상황에서, 왜 갑자기 저런 말씀을 하실까?
서량은 마동필의 의문을 곧바로 풀어 주었다.
“세상이 이상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모르겠다.”
“예?”
“확실한 것은, 이 드넓은 중원 천하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나는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는 거야. 그것이 진짜 힘을 갖춘 자를 변하게 하는 강호의 마력일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씀일까?
무엇에라도 홀린 양, 서량이 말을 이었다.
“모순적이지 않냐?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평화를 부르짖었는데, 지금은 또 다른 전장에 와 있다. 날 건드리려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새삼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주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예?”
“난 진정 평화를 바라지만, 세상을 평화로 이끄는 주역이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우우우우웅.
천마도의 도신에 은은한 청색 마기가 어렸다.
훅!
기다렸다는 듯, 저 머나먼 계곡 인근에서도 강렬한 기파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강철처럼 단단한 존재감이었다. 아직은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불꽃처럼 화려하고 산봉우리처럼 오연한 기파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천마도를 쥔 서량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마(魔)는 어떠한 미사여구를 붙여도 마(魔)에 불과해. 누구보다 마에 가까워진 난, 적들을 죽임에 있어 더 이상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마동필은 물론, 여상린과 앵화까지도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적의 힘을 거머쥔 자가 상대를 동정하지 않는다.
제한 없는 힘은 말 그대로 재앙이나 다를 바 없다. 지금껏 그에 관해 생각해 본 적 없던 그들은, 서량의 말을 듣고서야 살의에 물든 절대고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큰 힘을 가진 자가 명분을 무시하고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큰 힘을 가진 자에게 격이 필요한 이유였다.
서량이 걸음을 옮겼다.
파라라락!
양팔을 펼친 그의 뒷모습은 가히 날개 달린 마룡(魔龍)이 따로 없었다.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장포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번쩍! 번쩍!
천마도의 도신 위로 흐르는 군림마황기.
그러나 펄럭이는 장포 위로는 피 냄새 물씬 풍기는 구유마기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것은 그의 안광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손에 든 천마도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이는 것과 달리 우안(右眼)에선 붉은 겁화가 새어 나왔고, 좌안(左眼)에선 마황의 전광이 이글거렸다.
파지지직! 화르르륵!
자연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공기를 장악하는 충만한 마력.
청홍(靑紅)의 마안(魔眼)을 피워 내며, 중원 도맥(刀脈)의 정점이라는 팽가의 세력을 맞이한다.
콰르르릉!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선 천둥 번개가 휘몰아치고, 서량이 서 있는 절벽은 지진이라도 날 것처럼 흔들렸다.
‘이것이구나.’
지금의 그를 만들어 준 구유마공. 그것은 곧 과거와 현재를 증명한다.
앞으로의 그를 만들어 줄 군림마황기. 그것은 곧 현재와 미래를 증명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명백히 다름에도 결코 나뉠 수 없다. 그것은 무공도 마찬가지이며, 평화의 세상도 마찬가지이리라.
세상은 지금 평화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정사마(正邪魔)가 공존하는 것처럼.
구유마공과 군림마황기는 명백히 다르지만, 동시에 서량이란 세상 안에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바로 지금.
서량은 그것을 깨달았다.
두두두두!
그리고 그 순간에야 서량의 눈에 부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그 수는 족히 삼백을 헤아리며,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등 뒤에 큼직한 중도(重刀)를 멘 고수들의 기파 또한 천하 어떤 전투 부대보다 인상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팽가의 정예 패왕대(覇王隊)의 삼백 도수(刀手)와 한 명, 한 명이 초절정을 넘보는 전대의 노고수들이 무려 삼십여 명.
서량이 하얗게 웃었다.
“가자.”
섬뜩한 미소와는 상반되는 묵직하고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서량이 움직였다.
파아아악!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서량의 뒤로 황금빛 영물과 흑황의 마물이 뒤따랐다.
파파팡!
하늘을 난다.
허공답보의 신기(神技)를 구현하며 무서운 속도로 땅에 가까워진 서량이 그대로 천마도를 휘둘렀다.
콰콰쾅!!
수십 장을 날아간 천마의 도풍(刀風)이 대지에 거대한 흔적을 남겼다.
쿠르르릉!
“워워!!”
“속도를 늦춰라!”
화아아악!
삼백삼십의 고수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누구 하나 튀지 않고 동시에 속도를 늦추는 모습, 무척이나 인상적인 기마술이었다.
화아아악.
땅에는 십여 장이 훌쩍 넘는 도흔이 새겨져 있었다. 베이고 부서진 땅에서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뭐지?”
“고수다. 그것도 엄청난!”
“설마 이 흉포한 기(氣)는……?!”
그때였다.
크허허헝! 카아아앗!
천둥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포효에 팽가의 도객들을 당황을 감추지 못했고.
훅!
어느새 먼지를 뚫고 나타난 일인이수(一人二獸)가 그런 그들을 덮쳤다.
선두에 선 노고수들이 깜짝 놀라 칼을 뽑아 드는 순간.
퍼어어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서량의 몸이 그들을 통과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파르르륵!
장포 자락을 날개와도 같이 펄럭이며 팽가 병력의 후미로 내려앉은 서량.
스르르륵.
그와 동시에 노고수 세 사람의 몸이,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의 몸통과 함께 사선으로 갈라져 버렸다.
경악에 휩싸인 중원 최고의 도객들.
청홍의 마안을 번뜩이며, 서량이 말했다.
“밥은 자시고들 오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