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신화(神話)가 시작되다 (1)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오니, 부디 저의 충정을 알아 주시길 간곡히 청하나이다!”
절을 하며 외치는 무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호요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호법님. 이미 소교주님께서 호법들을 돌려보낸 이상 다시 보내는 것은…….”
“아니! 그래도 보내야 하오! 소교주님은 차후 본교를 이끌어 갈 인신(人神)이시오! 호위가 꼭 필요하단 말이오!”
“대호법님.”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소! 중원의 잡것들이 소교주님을 핍박할지도 모르는 일이거늘, 총군사는 어찌 그리 담담할 수 있는 것이오! 호법원이 아니라 구대마존을 출교시켜도 모자랄 일 아니겠소!”
그때였다.
째애애앵!!
두 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태사의에 앉아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이천상.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것이다.
무담이 입술을 깨물었다.
“교주님께 무례를 범한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하나 신교의 작은 주인으로서 그리 빈약한 전력을 호위 삼은 전례는 지금껏 한 번도……!”
“대호법.”
“……예, 교주님.”
“괜찮네.”
“교주님!”
무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시 한번 소신의……!”
순간 무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 예상한 교주님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미묘했다.
어떤 표정인지 제대로 해석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화가 나셨다거나 귀찮아하시는 건 아닌 듯했다.
“교주님?”
화르르륵.
이천상의 손에서 시커먼 불길이 피어올랐다. 대전을 통째로 불태워 버릴 듯 무서운 화력을 발하는 암화(暗火)에 부서진 술잔 조각들이 녹아내렸다.
순간 무담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소천겁화!’
군림마황기의 열양공 소천겁화였다. 상마진화(上魔眞火)를 극단적으로 개발시킨 마공으로, 강철도 순식간에 녹여 버린다는 천고의 무학이었다.
“대호법. 보이는가?”
“……예?”
이천상이 손을 올렸다.
시커먼 불길이 그의 얼굴 반쪽을 가렸다.
화르르르륵!!
그렇지 않아도 빛깔이 어둡던 불꽃이 조금씩, 조금씩 더 짙어졌다. 이제는 새까만 불꽃 때문에 이천상의 손도 보이지 않았다.
무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천상의 선천마기가 뿜어지매, 극마에 도달한 마력이 제멋대로 들끓고 있었다.
극마의 이른 고수조차 본인의 마기를 통제하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
그것이 이천상의 힘이었다. 천마의 힘이었다.
마력의 발산만으로 천하 모든 마(魔)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마신인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자네는 이 나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충심을 확인하려 드는 질문이 아니었다. 무담도, 호요성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무담이 침을 삼키고 답했다.
“그래야만 하는 순간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온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량이도 마찬가지일세.”
“예?”
“여전히 부족하고 단련의 여지도 한참이나 남았지만, 녀석은 근본적으로 나와 같아졌단 말일세.”
“……?!”
이천상이 창가로 눈을 돌렸다.
나른한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은 뿌듯함이었다.
“설마하니 마황기를 그런 식으로 다룰 줄은 몰랐군.”
여전히 듣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천상에겐 보였다.
수천, 수만 리 떨어진 중원 땅에서 자신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무슨 일을 행하고 있는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무공을 연성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는 웃을 수 있었다.
“집착하면 멀어지니 그저 흘러가는 강물처럼 나를 던져 두어라…… 땡중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지?”
마(魔)는 곧 욕망이다.
욕망은 집착이며, 집착은 합일(合一)이다. 욕망의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 즉 합일로 일체를 이루어야 진정한 마(魔)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신도 그랬고, 구대마존도 그랬으며, 신교의 선조들 모두가 그러했다.
그러나 자신의 후계자는 달랐다.
“멀어짐으로써 하나가 되었다라…….”
가만히 창가를 바라보던 이천상이 이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무담과 호요성의 얼굴에 충격이 드러났다.
교주님께서 저리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시다니? 그들은 결단코 이런 모습을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이천상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평생을 공들인 작품이 완성된 듯, 자신의 꿈을 이루기라도 한 듯 가감 없이 기쁨을 표현했다.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리던 이천상이 호요성을 보았다.
“총군사.”
“예? 아, 예!”
“비궁주(秘宮主)에게 연락하게. 내가 보잔다고.”
호요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면 무담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신교 내에서 비궁주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교주와 총군사 둘 뿐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단순히 보자는 내용만 전하면 되겠습니까?”
“십대천마(十大天魔)의 마위(魔位)를 마련할 것이라 전하게.”
“……!!”
“지금 당장.”
* * *
‘달라.’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와중.
서량은 확신했다. 자신의 무공이 뭔가 달라졌음을.
‘그래, 이것이 상생이었다.’
구유마공, 그리고 군림마황기.
두 마공을 동시에 구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두 마공이 우위를 다투려는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적은 많았지만, 이처럼 동시에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적은 없었다.
두 개의 마공 중 무엇도 버릴 수 없다면, 두 개의 마공 모두를 끌어안아야 한다. 하지만 각자의 특성이 너무도 명확해서 함께 안고 가기가 지나치게 위험하다.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언제까지 이 위험천만한 무기들을 몸 안에 숨겨 둔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아아!’
그것은, 소위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두 마공의 차이는 명확하다. 하지만 두 마공은 근본적인 공통점을 안고 있었다.
바로 서량이었다.
두 마공은 이미 서량을 주인으로 받들고 있었다. 구유마공은 지옥문을 열어 스스로를 바쳤고, 군림마황기는 욕계문을 열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결국 그들은 평생 서량과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마(魔)는 정(正)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정도(正道) 역시 마찬가지.’
수천 년 무림사에 누구도 강호일통을 하지 못한 것은 그만한 걸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잠시 세상을 하나로 만들 순 있어도, 결국에는 찢어져서 공존한다. 세상에는 땅도 있고 바다도 있듯, 정사마 역시 각자의 특성이 뚜렷하다.
서량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화를 바랐고, 후기지수들과 대담의 장도 연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서량은 세상의 이치를, 이 대자연의 법도를 자신에게 적용했다.
구유마공은 땅이다. 군림마황기는 하늘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품은 나는 무엇인가?
‘이제야 나는 진정 한계가 없음을 알았다.’
패왕대의 선두까지 남은 거리는 오 장.
차차창!
묵직한 중도를 꺼내 든 도객들이 살의 넘치는 눈으로 서량을 노려보았다.
이제 남은 거리는 삼 장.
화르르륵! 파지직!
구유의 겁화가 천마도에 깃들고, 마황의 전광이 왼손에 깃들었다.
각기 붉은 화염과 청색 뇌전을 머금은 양손.
마치 불을 뿜고 뇌전을 쏘아 대는 신화 속 괴력난신이라도 된 듯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고, 누구도 그에게 덤벼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패왕대와의 거리가 일 장까지 줄어들었다.
서량이 외쳤다.
“물어뜯어라!!”
콰아앙!
호왕이 사람 몸뚱이만 한 앞발로 패왕대를 공격했다.
옆에선 서량의 청홍마기(靑紅魔氣)를 받아 든 금호가 또다시 포효했다.
크허어어엉!!
“크아아악!”
“아아악!”
미처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지상 최강의 영물이 내지르는 포효를 코앞에서 들었다.
그 포효는 호왕의 포효와 차원이 달랐다. 서량의 마력을 받아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영기를 품은 금호는 한순간이나마 절대무적의 괴수로 탈바꿈했다.
푸화아아악!
선두에 선 패왕대원 오십여 명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끔찍하게도, 그중 절반 이상이 칠공에서 피를 토했다. 뇌가 곤죽이 된 그들은 언뜻 봐도 즉사를 면치 못한 것 같았다.
그 속으로 서량과 금호가 뛰어들었다.
퍼어어엉! 콰지지직!
“커헉!”
“끄아아악!”
군림마황기로 펼쳐 낸 만압금마장은 적들의 사기마저도 금(禁)하는 무공이 되었다.
장력에 맞은 도객 다섯 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극한의 마기가 담긴 경력은 단숨에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빠져나온 마기의 폭풍은 주변 도객들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죽여라!”
“죽여!!”
소교주를 사로잡으라 했지, 죽이라는 명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량을 사로잡으려는 시도를 할 수가 없었다. 사로잡기는커녕 반대로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쩌저저저저정! 콰아앙!
“제길!”
“뒤를 받쳐 줘! 물러나지 마라!”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물러날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도객들이 제각기 칼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난전에도 서로의 투로를 방해하지 않는 기가 막힌 도법이었다.
서량의 천마도가 허공을 갈랐다.
쩌저저정! 푸화아악!
여덟 자루의 칼이 부러지고, 도객들의 머리통 여덟 개가 하늘을 날았다.
자연스레 패왕진(覇王陣)을 형성하여 진력(陣力)을 받으려 했는데, 시작도 전에 주축이 되는 고수들이 죽었다. 그것도 단 일도(一刀)였다.
그때, 서량은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십여 명의 노고수들이 상방을 점하여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벽력도 다섯, 적성도 다섯이었다.
‘늦어.’
천마도로 대응하기엔 자세가 불안정하다. 능천마라수나 만압금마장을 쓰려면 군림마황기의 장전(裝塡) 시간이 필요하다.
순간 붉은 화기를 피워 내던 천마도에 시퍼런 뇌전이 일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공이 바뀐다. 구유마공이 아닌 군림마황기를 머금은 천마도가 자연스레 허공을 갈랐다.
쩌저정! 퍼어엉!
찰나지간 열여덟 번이나 휘둘러진 천마도가 십여 자루의 칼날을 막아 내고, 심지어 한 고수의 몸을 두 쪽 내 버렸다.
파지지직!
좌우로 갈라진 시신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신에선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상처가 뇌전으로 모조리 타 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파지지지지직!!
칼을 내리니, 천마도의 도첨(刀尖)에서 시퍼런 구형의 뇌전이 이글거렸다.
군림마황기의 수많은 도법 중 하나인 뇌공만마일식(雷公萬魔一式)이었다. 단 한 초식에 불과하지만, 그 위력과 속도를 극한까지 뽑아낸 반격쾌도술(反擊快刀術)이었다.
두 마공을 동시에 운용하면서, 순간순간에 맞는 무공까지 뽑아낸다.
의지가 곧 무공이요, 무공은 곧 살법이 된다. 마(魔)의 극치에 달한 자가, 과거 버렸다고 생각한 사신(死神)으로서의 깨달음까지 재차 구현해 냈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살왕으로서의 과거를 버렸지만.
이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임을 깨달았기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나, 둘 버렸던 것들이 지금에 이르러 다시금 서량을 되찾아 오고 있었다. 두 개의 마공을 품을 정도라면, 살왕으로서의 살법이라고 품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퍼어엉! 콰직!
시퍼런 뇌광으로 물든 천마도가 허공을 가르고, 붉은 뇌화로 타오르는 벽력권이 사위를 휩쓸었다.
금호의 송곳니는 도객들의 보도를 깨부쉈으며, 호왕의 앞발은 그들의 몸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터어어엉!
서량이 금호의 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가 천마도를 양손으로 쥐었다.
콰아앙!
패왕진 한복판에 인화의 칼바람을 새겨 넣은 서량이 천마도를 중단으로 세웠다.
푸욱!
도객 한 명의 목을 감아 부러트리고 등판에 찔러 넣은 천마도가 흉골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피거품을 문 채로 죽은 도객의 목을 끌어안은 서량이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이제 몸이 풀렸어.”
두려움을 모르는 팽가의 정예 도객들.
그들의 얼굴에, 본인들도 깨닫지 못한 공포가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