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신화(神話)가 시작되다 (2)
팽산(彭山)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푸화아악!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핏물.
일도(一刀)에 일살(一殺)이었다. 칼이 한 번 휘둘러지면 꼭 한 명이 죽었다.
퍼어어억!
박살 나 흩어지는 두개골.
일권(一拳)에 일살(一殺)이었다. 주먹이 한 번 휘둘러지면 한 명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어디 칼과 주먹뿐일까.
마교도 놈의 몸뚱이는 그 자체로 흉기였다. 간격이 긴 칼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것 같지만, 주먹질과 발길질이라고 크게 모자라지도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걸리면 죽는다. 감당하기 벅찬 공격을 받을 땐 물러나거나 방어를 하면서, 반격을 시작할 때면 꼭 한 명은 죽였다.
‘어찌 저리 강하단 말인가!’
상식적인 수준의 강함이 아니었다.
전설의 경지인 반로환동도 당연히 아니다. 불타오르는 생기(生氣)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정말 서른도 안 된 연배라는 건데, 그 나이에 단신으로 패왕대를 몰아붙이고 팽가의 전대 노고수들을 차근차근 베어 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저놈은 상리에서 벗어난 놈이었다.
팽산이 외쳤다.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마귀다! 오늘 저놈을 잡지 못하면 큰 우환이 될 것이다!”
쿠르르릉!
철혈기(鐵血氣)를 잔뜩 끌어 올린 팽산.
팽가의 전대 대장로로서, 전대 가주의 허가하에 팽가 최고의 도법을 전수받은 그.
소가주인 팽열조차 전수받지 못한 전설적인 무공이 그의 도신(刀身)에 대호(大虎)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현제들은 마귀를 포위하라!”
파아아악!
미친 듯이 패왕대를 상대하던 서량은 순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어 냈다.
어느새 패왕대원들은 뒤로 물러났고, 이십여 명밖에 남지 않은 노고수들이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번쩍!
그리고 그 위.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더 어두운 그림자를 그려 낸 팽산.
육십 근 중도를 들어 올린 그가 무서운 속도로 칼을 휘둘렀다.
콰아앙!
서량의 팔이 희미하게 떨렸다. 강한 탄력으로 천마도를 올려 쳤지만,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팽산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놈! 얼마나 사악한 마공을 익혔기에 이리 강한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너희는 얼마나 물렁물렁한 무공을 익혔기에 나 하나도 제대로 상대 못 하나?”
“요망한!”
콰아앙!
도신에 폭경을 섞어 거리를 벌린 팽산.
일순간 그의 몸에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어렸다.
크허어엉!
도신에서 범의 포효가 들린다.
호왕의 포효가 아니었다. 진기가 주입된 도명(刀鳴)이 진짜 범의 포효처럼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이 무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호포(虎咆)의 도명과 도신에 드리워진 반투명한 범의 줄무늬가 이 무공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하북팽가의 전설을 만들어 준 무공.
천하제일검가 남궁세가에 제왕검(帝王劍)이 있다면, 팽가에는 호신(虎神)의 칼이 있어 강북 무림에 위세를 떨쳤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카앗!”
팽산의 외침도 범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파아아악!
탄력적으로 돌진한 팽산이 빠르고 치밀한 일격을 내쳐 왔다.
화아아악!
찬란한 황금빛 도광(刀光)이 세상을 지울 듯 웅혼한 강격을 선사했다. 속도도 속도지만 칼날이 짓쳐 들기도 전에 전해지는 도압(刀壓)에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콰앙!
서량이 몸을 주춤거렸다.
반면 팽산은 서너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혼신의 힘을 다해 후려쳤는데, 정작 공격한 쪽이 튕겨 나간 것이다.
오호단문도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팽산은 실망하지 않았다.
저 마귀는 상식을 초월한 놈이었다. 이 정도는 그도 충분히 예상했다.
후웅!
육중한 거도가 바람을 가르자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소리가 울렸다.
팽산이 무시무시한 난격(亂擊)을 퍼부었다.
쩌저저저정!
마치 산처럼 거대한 범이 앞발을 미친 듯이 휘두르는 것 같다.
강하고 난폭하다. 빠르지만 유연하다.
맹수 중의 맹수, 산중대왕의 움직임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정교하고 부드러웠으며, 헛웃음이 나올 만큼 강했다.
쾌도(快刀)로 팽산의 도법을 막아 가는 서량.
‘확실히 강하군.’
오호단문도를 구사하는 고수가 화경을 깨달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강한 무공이었다.
쩌저저정! 콰콰쾅!
미친 듯이 부딪치는 칼날에서 굉음까지 터져 나왔다. 서로의 진기가 점차 위력을 키워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익!’
팽산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반면 서량의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다 못해, 오히려 더욱 냉랭해지는 듯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후욱!
팽산이 중도를 쳐들었다. 오호단문도의 절기인 대호참귀(大虎斬鬼)를 펼치려는 것이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쉬이익! 퍼억!
“컥!”
팽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 천마도가 박힌 것이다.
‘어떻게?!’
빨라도 너무 빨랐다.
팽산 정도의 고수에게 빈틈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서량은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한 상대의 공방을, 그저 더 빠른 속도로 뚫어 버린 것이다.
“쓰임새를 잘 알고 활용해야 강한 무공도 빛을 보는 법이지. 강한 무공이라고 항상 좋은 결과를 내는 게 아니야.”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인상적이었다.”
화경의 고수와 초절정고수가 구사하는 무공의 속도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서량이 오직 더 빠른 속도만으로 팽산을 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오호단문도에 대한 팽산의 이해가 깊지 않기 때문이었다. 실전에서 몇 번이고 써 봤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스르륵.
팽산이 쓰러졌다.
“이노옴!”
“죽여라!”
드디어 노고수들의 입에서도 죽이자는 소리가 나왔다.
형제가 죽었으니 이성을 잃을 만도 하다. 노고수들이 진정 죽일 기세로 칼을 휘둘렀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제압이 아닌 살상을 하려고 칼을 휘두른다. 이전보다 훨씬 살벌한 기세였다.
상대하기 훨씬 까다로워진 것일까?
“좋아!”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서량에겐 이들의 살의가 오히려 반가웠다.
파바바바박!
노고수들의 칼날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서량이 움직였다.
키키키킹! 퍼어엉!
“헉!”
노고수들은 물론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패왕대원들까지, 모두가 경악했다.
이십여 명의 노고수들 중 서량을 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칼은 모조리 땅을 긁거나 허공을 베었을 뿐이었다.
그럼 서량은 어디로 갔는가?
퍼어억! 콰직!
노고수 한 명의 상체가 갈라지고, 또 다른 고수의 고관절이 완전히 부러졌다.
‘언제?!’
서량이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
쿠웅!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강력한 진각과 함께 서량이 재차 몸을 움직였다. 마치 뱀이 수풀을 헤쳐 나가듯, 기가 막히게 유연하면서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서량이 천마도를 사선으로 올려 쳤다.
촤아아아악!
“크아악!”
잘려 나간 팔과 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노고수들이 재차 서량을 노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고 부드러웠다. 마치 공격이 들어올 곳을 미리 알고 피하는 것 같았다.
퍼억! 퍼어어억!
도끼로 찍어 내듯 칼을 휘두르자, 그 흉포한 공격에 노고수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
서량의 눈이 청홍의 마광을 뿜어냈다.
‘보인다.’
붉은 살의로 번뜩이는 노고수들의 공격.
그들의 공격이 어디로 향할지 환히 보였다. 정확히는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졌다.
살기(殺氣)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압을 위해 무공을 구사했을 때는 칼날에 살기가 깃들어 있지 않았다. 더 느리고, 덜 위력적이지었지만 살기를 읽기가 힘들어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극마에 오르며 구유마공과 하나가 된 천라육통식(天羅六通式)이 불타는 살기 앞에 저절로 펼쳐지고 있었다. 살기를 읽은 서량의 육감이 그들의 투로와 움직임을 순식간에 파악해 냈다.
그래서 이런 대응이 가능한 것이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얼마나 강한 공격이 들어올지를 전부 꿰뚫어 볼 수 있기에 공략이 몇 배로 쉬워진 것이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 강한 자.
비무와 논무(論武)에선 최고를 논할 수 없지만, 생사가 갈리는 실전 능력이라면 단연코 중원제일이다. 그간의 경험이, 그의 초감각이 살기에 저절로 대응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미친 짓도 가능했다.
콰득!
한 고수의 목을 부러트린 서량이 시체가 된 그를 후방의 패왕대에게 던졌다.
패왕대원 셋은 얼떨결에 그 시체를 받아 냈다. 이미 죽어 버렸다지만 가문의 존장이 아니던가.
서량의 몸이 그 자리에서 훅, 하고 사라졌다.
콰앙!
전신 가득 군림마황기를 둘러쳐 몸통 박치기를 감행한다.
그 고법(靠法) 일격에 시체는 완전히 박살 나 버렸고, 시체를 들고 있던 대원 셋의 육신도 여기저기가 부러져 버렸다. 공성추가 날아와 처박힌 것과 다를 바 없는 위력이었다.
“죽일 놈!”
화아아악!
더 강한 살의가 몰아쳐 온다.
살의는 분노를 키웠고, 강해진 분노는 다시 살의를 끌어올렸다.
이내 패왕대원들의 칼날에서, 지금껏 보여 주지 않은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서량이 양팔을 벌렸다.
“와라.”
“이노옴!!”
콰르르릉!
패왕대의 패왕진이 극성으로 가동되었다.
쏟아지는 압력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백이 넘는 고수들이 쏟아 내는 기압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그때였다.
콰득! 퍼어억! 콰앙!
금호와 호왕이 힘을 합쳐 좌측 외곽의 무사들을 마구 물어뜯었다.
서량에게로 쏟아지던 진력(陣力)이 출렁거렸다. 진력이 흔들리니 그 자리에 살기가 채워졌다.
그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번쩍! 콰르릉!
일격필살의 도법에 패왕대원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아차 싶어 진력을 집중했지만, 이미 서량은 그곳에 없었다. 또 다른 살기의 흐름을 타고 올라간 그가 미친 듯이 도권장각(刀拳掌脚)을 휘둘렀다.
콰아앙! 콰아아앙!
더 이상 전략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이제는 순수한 막싸움이었다. 패왕대는 진을 풀어 호왕과 금호을 막아 냈고, 나머지 병력은 몽땅 서량에게로 투입되었다.
‘확실히.’
착실하게 적들을 베어 넘기는 서량은, 역시나 패왕대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진법이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살기가 지독해지면 지독해질수록 서량의 대응도 완전(完全)해진다.
패왕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살기를 죽일 수는 없으니, 진법을 포기하고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죽고 죽이는 싸움,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적을 섬멸하려는 호쾌한 전장이 개막한 것이다.
피범벅이 된 서량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망갈 생각들 마라!”
“으아아아아!”
어느새 서량의 뒤로 돌아온 금호와 호왕.
일인이수와 팽가의 정예 병력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한 시진 뒤.
하남 천중산과 서평현(西平縣) 사이의 작은 평원에는 삼백이 훌쩍 넘는 시신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쏟아지는 비에 핏물이 섞여 강을 이루자 수많은 까마귀와 들짐승이 모여들였다.
그리고 그곳에 서량과 두 영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