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장악의 미학 (1)
“맹주님!”
“무슨 일인가.”
“강 노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하오문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답니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하오문으로 침투한 강 노선배, 강우창(姜羽敞)이 마침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단다.
“대기 문파는 얼마나 되지?”
“아미(蛾眉), 당가(唐家), 점창(點蒼), 황보(皇甫)와 모용(慕容), 그리고 본문인 청성(靑城)이 대기 중입니다.”
“소림과 무당은?”
“침묵 중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소림과 무당은 빠졌단다.
하지만 담사영은 실망하지 않았다. 두 문파의 도움은 애초에 바라지 않았으니까.
“다른 구파는?”
“화산과 종남은 수장의 실종으로 당장 움직이기 어려우며, 공동(空洞)과 곤륜(崑崙) 지역에는 하오문의 세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다만 공동은 대기 중입니다. 언제라도 움직일 준비를 해 두겠다고 합니다.”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겠군.”
담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소림과 무당이 아쉬워. 하남과 호북에 가장 많이 분포해 있을 터인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별수 없지. 이번엔 간만에 맹의 분타를 운용해야겠어. 그 정도만 해도 견제는 가능하겠지.”
“다른 지역의 일이 끝나면, 이후 그곳으로 전력을 밀어 넣으면 될 것입니다.”
“그래야겠네. 이 기회에 음지(陰地)에서 쌀을 갉아먹는 해충들을 싹 박멸해 보세.”
중년 사내, 청성 장문인 송풍신협(松風神俠) 우이한(宇移閑)이 고개를 숙였다.
“제 이계(二計)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시게.”
우이한이 나가자, 담사영은 다시 사람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맹주님.”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의천맹의 천지각주(天地閣主)가 눈을 빛냈다.
“하남 허창(許昌) 인근입니다.”
“만약 놈이 움직인다면, 어디로 향할 거라 예상하는가?”
“구 할의 확률로 북쪽, 정주(鄭州)까지 치고 올라올 거라 예상됩니다.”
“이유는?”
“하오문의 거점 중 놈과 가장 가까운 곳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다면 놈이 움직일 확률 자체는 얼마나 되는가?”
“구 할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저희 천지각에서 검토해 본 결과 십 할의 확률을 확신합니다.”
“천지각의 분석이라면 가히 믿을 만하지.”
담사영이 씨익 웃었다.
“현양(玄陽)을 보내게.”
현양.
과거 진인(眞人)이라 불릴 정도로 도(道)에 심취해 있었으나, 담사영과 만나 타락해 버린 무당파의 전대 고수.
무당의 전설이라 불리는 원무검신(元武劍神) 현천진인의 사제이자, 전대 도사들 중 유일하게 속세의 광기에 젖은 탁한 검이다.
그리고 그는, 담사영이 꼭꼭 숨겨 둔 수많은 칼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위험한 칼이기도 했다.
“맹주님.”
“말씀하시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놈이 현양진인마저 이긴다면 어떻게…….”
“그럼 그것대로 좋은 일 아니겠는가?”
“예?”
“현양은 현천진인의 사제일세. 그가 무당에서 반쯤 내쳐진 사람이라 한들, 그의 본적은 여전히 무당일세.”
천지각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말씀은?”
“무당은 화산, 종남 등과는 이름값부터가 달라. 괜히 소림과 함께 태산북두라 불리는 게 아닐세. 세상은 정파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소림과 무당만큼은 아직 민중의 가슴에 살아 있는 의협의 화신이지.”
“……!”
“그런 무당파의 전대 고수와 칼부림을 벌인다……. 그 소문이 퍼지는 순간, 그간 놈이 쌓아 올린 명성은 모조리 물거품이 될 걸세.”
소름이 돋았다.
현양은 맹주님의 가장 강한 칼은 아니지만, 그냥저냥 부러트릴 만한 칼도 아니었다. 이 무서운 위정자는 그 소중한 칼이 부러져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놈에게 그 정도 가치가 있는 것인지요?”
담사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진지해진 표정에서 차가운 광기가 엿보였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네. 하지만 절대로 만만하게 볼 놈이 아니야. 이 짧은 시간에 벌써 우호적인 여론까지 형성시켜 놓았어. 하오문이 도와주었다 해도, 그 기세가 무섭네.”
“그렇군요.”
“불씨를 초기에 잡지 못하면 산불로 번지게 되지. 나는 그 산불이 이곳까지 번질까 무섭다네.”
서슴없이 무섭다고 말한다.
그것이 담사영이 대단한 이유였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아가,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도 알았다.
그러한 성격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으리라.
“자,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어린 마룡(魔龍)을 절벽 끄트머리까지 밀어붙여 보세나.”
* * *
쿠르르릉!
살왕기차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달렸다.
평소에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산천을 달렸던 금호와 호왕도 살왕기차에 바짝 붙어 뒤를 따랐다. 평범한 맹수라면 불가능한 체력이지만, 두 영물은 천하 명마인 한혈마들의 지구력을 아무런 문제 없이 따라잡았다.
서량이 외쳤다.
“동필아! 더 빨리!”
방음이 완벽한 마차인데도 마동필은 서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예!”
쿠르릉! 콰아앙!
거칠기 짝이 없는 길, 마차는 큼직한 돌을 깨부수며 전진했다.
마동필의 마차 모는 실력은 눈이 부실 만큼 대단했다. 지금껏 보여 준 실력과는 또 다르다. 그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제길, 지금 가도 늦었을 텐데.”
그답지 않게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서량에게 고구가 말했다.
“하오문에서 달리 연락을 취해 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
서량은 초조해하면서도 상황을 냉철하게 주시했다.
“하오문을 도와줄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세력은 본교야. 어떻게 해서든 연락을 취해 올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허창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 그래선 안 돼. 하오문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최대한 붙어 있는 게 나아.”
여상린이 말했다.
“소교주님의 말씀이 옳아요. 하지만 소교주님, 그렇게 되면 신교와 하오문이 연수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거예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렇게 되면…….”
“그렇다고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그리고 본교와 하오문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의천맹주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쪽에서 터트리기 전에 소교주님이 직접 알리는 게 타격이 적다는 뜻인가요?”
“차라리.”
여상린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은 이렇게 움직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격의 문제도, 세력의 문제도 아니었다.
“소교주님.”
“알아.”
“…….”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서량이 이를 악물었다.
“나 정도 위치의 사람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이리 다급하게 움직이는 건 좋지 않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네.”
지금껏 서량이 중원에 큰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언행을 보여 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한다. 위험에 휩싸이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신교를 가벼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이 쉬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이자, 한 번 움직이면 천하가 떠들썩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일수록 언행이 무거워야 하며, 그래야 세력에 무게감이 실린다.
사람들이 서량의 움직임을 파격적으로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불길처럼 타올라야 할 때가 있다면, 태산처럼 묵직하게 버티고 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지금의 서량은 분명 선을 넘었다.
바로 지금, 하오문을 도우러 달려가는 이 시점에서.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량과 여상린, 앵화가 고구를 바라보았다.
고구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아는 소교주님께서는 한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분명 대단하지만, 나쁘게 해석하면 끝이 왔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위험을 안고 살아가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이었다.
소교주가 되고 난 후, 고구는 서량을 두고 이리 직접적으로 평가한 적이 없었다. 그 자체로 불경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서량은 평소처럼 농담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말해 봐.”
“이번 사건이 끝난 후, 직접 만나시기를 권고드립니다.”
“누구를?”
“의천맹주입니다.”
순간 마차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눈을 가늘게 뜬 서량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늙은이를?”
“꼭 맹주가 아니어도 됩니다. 소림의 방장이든 무당의 장문인이든 누구라도 좋습니다.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사람과 직접 만나십시오.”
고구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 결단이 어떤 결단인지 고구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량은 고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즉각 깨달았다.
이리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서량 개인에게도, 천마신교에게도 좋지 않다.
그렇다고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마차를 멈춰 세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칠기 짝이 없는 행보는 그만두고 진짜 거물들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보라는 뜻이었다.
개인의 복수도, 개인의 꿈도 그 이후부터가 시작이다. 고구의 말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의 말이 옳아. 더 이상 날뛰는 것은 의미가 없겠어.”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종전의 초조함은 많이 사라진 표정이었다.
“당주 말대로 하지.”
고구가 고개를 숙였다.
“미천한 소인의 언사가 다소 거칠었음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 주십시오.”
“큰 깨우침을 준 사람에게 상을 주진 못할망정 무슨 벌을 내려. 그러지 말게.”
서량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숨을 고른 그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어렸다.
“그래, 더 이상 말단부를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이 정도로 솥을 달궈 놨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육수를 우릴 때다.”
여상린이 미소를 지었다.
‘새삼 대단하다니까.’
그녀는 서량이 어떤 성격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권력자가 수하의 조언을 진지하게 고심하고, 생각을 바꾸기까지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이 서량의 강점이었다. 그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이었다.
마치 의천맹주 담사영처럼.
서 있는 위치도, 성격도, 목적도 다르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나 닮아 있었다.
“아, 저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뭐지?”
“오라버니의 일이 다 끝났대요.”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일이 끝났다면, 빙궁을 싹 정리했다는 거야?”
“네. 권력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고 연락이 왔어요. 당장은 무리겠지만 조만간 돌아오겠다고 하던데요?”
“그놈도 걸물은 걸물이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정리를 끝냈어? 제법 복잡한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오라버니가 소교주님보다 머리가 굳긴 했죠. 하지만 추진력만큼은 소교주님 이상일걸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거면 됐어.”
당장 큰 사건이 터졌고, 그것을 해결하러 가는 길이지만.
마음이 든든했다. 서슴없이 잘못을 지적해 주는 동료가 있고, 옳은 길을 제시해 주는 수하가 있다. 그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초조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사건 후딱 정리해 보자고.”
다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나아가는 마차.
그러나 그들은 백 리를 채 못 가서 멈추어야만 했다.
끼기기기기기긱!
마차가 멈추고, 마동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교주님.”
“안다.”
서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위험한 칼을 보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