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장악의 미학 (3)
싸늘한 정적이 일었다.
이십 초는커녕 일 합 만에 상대를 쳐 죽인 서량의 무위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무공보다도 압권인 것은 그가 저지른 일 자체였다.
무당의 도사가 죽었다.
북숭소림, 남존무당이라 대변되는 태산북두의 도사를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도 만인의 추앙을 받던 전대의 현자 배 도사였다.
별다른 고민도 없었다. 병력까지 동원해서 막으러 왔으니,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인 것 같았다.
고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외치려 할 때.
“……?”
고구가 옆을 돌아보았다. 마동필이 손으로 그를 막은 것이다.
살짝 고개를 젓는 마동필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은 거리.
서량이 입을 열었다.
“동필, 고 당주.”
“예!”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잡아 죽여라.”
평소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섬뜩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마동필과 고구가 움직였다.
파아아악!
순식간에 전면으로 치고 나가는 두 사람.
그뿐만이 아니었다.
커허허헝!
금호와 호왕도 그 뒤를 따랐다. 한발 늦게 움직였지만, 달려 나가는 속도는 두 사람보다 빨랐다.
콰아앙! 퍼어엉!
“크아아악!”
“아아악!”
“도, 도망쳐라! 모두 산개(散開)를……!”
콰직!
끔찍한 굉음과 폭음, 그리고 소름 끼치는 비명이 사위를 울렸다.
금호와 호왕의 전투력은 초절정고수에 필적한다. 말하자면, 현양과 함께 온 병력은 지금 구파 장문인급의 고수 네 명에게 공격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바바바박!
현양과 함께 온 고수들은 오십에 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은신과 신법에 능할 뿐, 실제 실력은 일류라 불리기 애매했다. 애초에 전력이 아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최대한 빨리 알리기 위한 정보책으로 동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인이수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신법은 대단했지만, 금호와 호왕의 포효는 거리를 무시하고 내상을 입힐 수 있었다.
잠시 후.
스르륵.
이인이수가 피범벅이 된 몸으로 서량에게 다가왔다.
“전부 해치웠습니다.”
평소였다면 고생했다는 말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량은 그러지 않았다.
“마차를 밖으로 빼내고 나면, 시체를 모조리 이곳에 모아.”
곧 살왕기차가 길목에서 빠져나가고, 수십의 시체들이 길목 안으로 던져졌다.
우우우웅.
서량이 천마도를 쥐었다.
폭발적으로 끌어 올린 구유마기가 천마도에 담겼다.
콰아아앙!
길목 좌우로 뻗어 있던 나무들이 무차별로 박살 나며 시체 더미 위로 쓰러졌다. 인화도법의 지옥풍이 휩쓸고 간 영역에, 멀쩡한 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파괴를 자행한 서량은 이내 무간의 불길을 피워 냈다.
퍼엉! 화르르르륵!
시체를 덮은 나무에 불길이 붙었다.
불은 삽시간에 거대한 목묘(木墓) 전체를 불태웠다. 불길이 어찌나 맹렬한지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도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
화르르르륵!
서량의 좌수에서 어두운 불꽃이 일었다.
마동필과 고구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서량이 피워 내는 저 불꽃이 어떤 무공인지 알아본 것이다.
‘소천겁화?!’
군림마황기의 수법 중 하나로, 상마진화를 극단적으로 개발시킨 마공. 떠들기 좋아하는 마인들은 천마지화(天魔之火)라 부르는 욕계(欲界)의 불꽃이었다.
서량은 그대로 소천겁화를 날렸다.
퍼어어엉! 화아아악!
순간적으로 화력이 두 배 이상 상승했다.
불꽃의 크기는 그대로지만, 열기가 더욱 거세졌다. 이전의 불꽃이 뼈를 태울 정도였다면, 지금의 불꽃은 뼈는 물론 지반까지 녹일 정도로 지독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불이 잠잠해졌다.
나무의 잔해는 십분지 일밖에 남지 않았고, 그 외에 모든 것들이 녹아 버렸다. 현양과 오십의 정보책들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제야 서량이 몸을 돌렸다.
“됐군.”
고구가 입을 열었다.
“증거를 없애 버리신 겁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잠깐 가려 본 거지. 이것도 물증이라면 물증이겠지만, 무당의 도사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고구가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소교주님. 이미 끝난 일이지만…… 그러시면 안 되었습니다.”
서량은 가타부타 얘기하지 않았다.
서량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고구 역시 입을 닫았다. 소교주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고구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오르시지요.”
“잠시 기다리지.”
“예?”
천마도를 마차 안에 던져 둔 서량이 팔짱을 끼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분위기였다. 지금껏 서량이 보여 주던 것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소교주님?”
“생각을 해 봤다.”
“예?”
서량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당의 도사와 마주쳤을 때,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결심했어. 길을 바꾸기로.”
길을 바꾸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지금껏 공야치가 알아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사소한 문제가 몇 번 있었지만, 공야치는 언제나 내가 원하던 때에, 원하던 그림을 그려서 내게 전달했지.”
“……?”
“내가 직접 가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그러니까 정주로 향하려 한 거야. 하지만 그걸 공야치가 원할까?”
지금껏 조용하던 여상린이 입을 열었다.
“원하지 않겠죠.”
“그래.”
“공야 소문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소교주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하오문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선 말이죠.”
“맞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외인에게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겠지요. 설령 하오문의 영달이 걸린 일이라도, 공야 소문주는 소교주님께 도움을 받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거예요.”
“정확히는, 자신의 계획에 나라는 변수가 튀어나올 거라는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겠지.”
서량의 눈이 빛났다.
“공야치는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해답을 만들어 낼 머리가 있는 사람이다. 녀석은 내가 끼어드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야.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알아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으니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거야.”
여상린이 말했다.
“말씀해 주세요. 소교주님께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길을 바꾸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모두가 서량을 주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일단 하오문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서신을 받고 움직여도 늦진 않으니까.”
약간 김이 샌다.
여상린이 투덜거렸다.
“뭐예요? 분위기 잔뜩 잡아서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결국은 또 나중에 풀어 주겠다는 거예요?”
“응?”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분위기를 잡다니? 누가? 내가?”
“네.”
“내가 언제?”
“참나.”
서량이 고구와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여상린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했다.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분위기 잡은 적 없다니까. 아니, 그리고 지금 농담이나 주절거릴 때가 아니잖아? 하오문이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야. 충분히 심각해야 정상이라고.”
“됐네요. 난 뭐 하늘이라도 무너지는 줄 알았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그렇게 심각했나 싶었던 것이다.
물론, 심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하오문이 흔들리면 앞으로의 행보가 많이 고단해질 것이다. 누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지, 강호의 정세는 어떤지조차 실시간으로 보고받지 못할 테니까.
그것은 중원행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정보력의 상실은 곧 전력의 상실이다. 하오문이 그를 돕지 못하면, 그때부터 여유로운 생활과는 안녕인 것이다.
‘공야치…….’
서량의 눈이 빛났다.
‘하오문주는 지금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실질적으로 하오문을 쥐고 흔드는 것은 공야치야. 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공야치는 어떤 강수를 두게 될까?’
그때, 여상린이 말했다.
“근데 소교주님.”
“어엉?”
여상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하오문이 어떻게 공격을 받고 있는 걸까요?”
“말했잖아. 각 지역에 흩어진 하오문 분타의 위치와 인명부의 정보가 유출됐다고.”
“그러니까 그걸 누가 했냐고요.”
“의천맹주라니까.”
“아, 정말! 그건 저도 알아요! 의천맹주가 사주했겠죠! 그런데 그 명령을 실질적으로 완수한 사람이 누구냐고요! 얼마나 대단한 인력이 동원됐기에 정보제일이라는 하오문을 털어 버릴 수 있어요? 천하십대고수도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아, 그거?”
서량이 팔짱을 꼈다.
“음…… 사실 나도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나 조직은 없다. 아니, 하나 있긴 하군.”
“있다고요? 누구요?”
“무색사(無色寺) 정도면 가능하겠지.”
여상린은 물론 마동필과 앵화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색사라니?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구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작 색출, 잠입은 물론 요인 암살에 정보 유출, 때에 따라선 조직 소거의 작업까지도 문제없이 완수할 수 있다는 그 전설의 문파 말입니까?”
“알고 있군.”
“물론입니다.”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문파라기보다는, 그냥 칙칙한 놈들만 잔뜩 모인 조직이라고 봐야 해. 때에 따라선 학관이라고 볼 수도 있고. 하여튼 기괴한 조직이야.”
“살수 문파인가요?”
“살수 문파? 때에 따라선 그렇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무색사는 음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암살전(暗殺戰), 대외정보전(對外情報戰), 폭파전(爆破戰), 첩보전(諜報戰)까지 아우르는 무지막지한 놈들이야. 한마디로 그쪽 관련 일은 못 하는 게 없지.”
여상린이 입을 떡 벌렸다.
뭔가 무시무시한 말을 들어 버린 것 같았다.
“암살…… 대외, 뭐요?”
“그냥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놈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지.”
서량의 얼굴이 다시 진지해졌다.
“하오문의 정보 통제 능력은 개방에 필적한다. 아니, 살아남기 위해 커 온 조직의 특성상 개방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아. 그런 하오문의 정보를 몽땅 털어 버릴 정도면 무색사가 아니곤 불가능하겠지.”
“그런 무시무시한 조직이 있다고요?!”
“그렇…… 잠깐!”
서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뭐야? 생각해 보니 진짜 무색사밖에 없잖아?!’
무색사는 강호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후학을 양성할 뿐이고, 그나마도 쉬이 들이진 않는다.
그들이 왜 재능 있는 자들을 납치해서 살수, 정보원 등으로 키우는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의 목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담사영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그 늙은이가 또다시 무색사에 명령을 내렸다는 건데……? 아무리 하오문이 귀찮아도 삼회권(三回權) 중 하나를 소비해서 명령할 정도는 아닌…….’
순간 한 줄기 번개가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빌어먹을! 그랬구나!’
하오문이 이 지경에 빠진 것은, 그들이 의천맹의 일에 사사건건 다리를 걸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 때문이었어! 그 늙은이는 하오문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내 팔다리를 잘라 내기 위해서 하오문을 친 거야!’
순간 오싹한 감정이 밀려왔다.
‘늙은이가 날 노리고 있다.’
하오문을 노렸든 자신을 노렸든, 결국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다?
절대 그리 생각해선 안 된다. 경관을 해쳐서 나무를 자르는 것과, 땔감이 필요해서 나무를 자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어. 공야치만이 아니라 나 역시 긴장이 풀려 있었군.’
하오문을 도와주지 못하도록 봉쇄하기 위해 현양을 보낸 건 줄 알았다.
틀렸다. 현양을 보낸 것은, 하오문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서량 때문이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를 일개 마졸로 격하시켜서, 벼랑 끝까지 밀어 버릴 속셈이었던 것이다.
‘실수했어.’
명백히 그의 실수였다.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하오문이 이렇게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래서, 확실하게 반격할 방법도 생겼다.’
착잡했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 공야치. 나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어.’
일행은 다시 서량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만큼은 여상린도 분위기를 잡네, 마네 하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반 시진 후.
“하오문의 음상단주가 신교의 소교를 뵙습니다! 소문주님의 서신을 갖고 왔습니다!”
서신을 받아 펼친 서량의 눈이 빛났다.
“……역시 담판을 지으러 가는 건가.”
그가 음상단주에게 말했다.
“벌써 떠났나?”
“그렇습니다.”
“도착 전까지 내 말을 전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전해 주게. 나는 더 이상 자네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음상단주의 눈빛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하게. 자네가 벌이는 일에 신경을 쓰진 않겠지만, 나도 이제 철퇴를 들겠다고.”
“……예?”
서량이 마동필을 보며 외쳤다.
“동필아! 서쪽으로 길을 잡아라!”
“서쪽 말씀이신지요?”
“소림 찍고, 무당 가자.”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서량의 눈이 이글거렸다.
“늙은이가 목검은 재미없다잖냐. 그럼 진검 뽑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