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장악의 미학 (4)
“하오문이?”
“그렇습니다.”
송금백의 눈이 빛났다.
“의천맹주가 칼을 뽑았군.”
“그것도 작정하고 뽑은 것 같습니다.”
“어설프게 벨 거면 칼자루에 손도 대지 않을 위인이다. 시원하게 뽑았으니, 말 그대로 절단을 내려 들겠지.”
“구파와 오대세가까지 불러들였으니, 하오문도 속수무책일 겁니다.”
“정확히는…….”
“예.”
얼굴이 한층 진지해진 황곤이 말을 이었다.
“서 소교가 위태로워졌지요.”
고작 하오문에 비상이 걸렸다고 서량 정도 되는 위인이 위태로워졌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말하는 황곤도, 그의 말을 듣는 송금백도 서량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귀찮은 하오문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서 소교를 벼랑으로 밀기 위한 사전 작업임이 분명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본래 바둑을 직접 두는 사람보다 관전하는 삼자의 눈이 더 날카로운 법이다. 두 사람은 이 일의 본질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하오문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 즉시 서 소교를 향한 맹공을 퍼부을 걸세. 물론 머저리 같은 팽가처럼 무력으로 압박하려 들진 않겠지.”
“예. 지금 상황에서 무력으로 서 소교를 해치우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입니다. 그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식이 있으니까요.”
송금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개방이 힘을 잃고 하오문까지 마비된 이상, 중원 북부에서 의천맹보다 정보력이 좋은 단체는 존재하지 않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 정보 단체가 주춤한 틈을 타 의천맹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고, 동시에 서 소교의 명성에 먹칠을 하려 들 것입니다.”
“그렇겠지.”
송금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여간 참 저질스러운 방식이야.”
“하지만 결과만큼은 확실한 방식입니다. 거리낄 것이 없게 된 의천맹은 여론을 제멋대로 조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겁니다. 이대로 가다간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서 소교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아니지.”
“예?”
송금백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분명 똑똑한 사람이야.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연출된 분위기는 여론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일세.”
“아, 물론 대중이 그리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천하에 민심(民心)만큼 무섭고 격렬한 것이 없다네. 그래서 지혜롭고, 그래서 날카롭지.”
송금백이 술잔을 기울였다.
독한 화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속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대중은 아주 똑똑하다네. 다만 게으를 뿐이야. 다 알고 있지만, 결국 궐기(蹶起)하기도 힘들고, 따지고 들기도 귀찮으니 흘러가듯 살아갈 뿐이라네.”
“…….”
“의천맹주가 진정 서 소교를 벼랑으로 밀어 버리려면 두 달이 아니라 반년, 아니 일 년은 족히 공들여야 할 걸세. 서 소교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 이상은.”
곰곰이 생각해 본 황곤이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송금백은 황곤의 이런 부분을 좋아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이 모르는 걸 당당하게 인정하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네. 의천맹주는 독사 중의 독사라,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서 소교를 나락에 빠트릴지 모르겠어. 어쩌면 우리의 예상을 깨고 보름도 안 되어 서 소교를 조리해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요.”
황곤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면, 성주님께서는 어찌하실 것입니까?”
“무엇을?”
“이대로 놔두실 것입니까? 서 소교를 돕지는 않을 생각이신지요?”
송금백이 눈을 끔뻑였다.
“내가? 내가 왜 그놈을 돕나? 명분도 없는데.”
“사파의 총수이신 성주님께서는 명분이 필요치 않은 분이잖습니까?”
공손한 목소리로 무자비하게 비수를 찔러 댄다. 송금백이 툴툴거렸다.
“날 너무 막무가내로 보는구먼. 내가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일세.”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닌가?”
“저는 철혈성의 군사입니다. 성주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냐에 따라 제 업무도 달라지지요.”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네. 가만히 놔두기도, 뭔가 도움을 주기도 찝찝해.”
“그렇다면 도움을 주지 않아야겠군요.”
“왜 그리 생각하나?”
“찝찝할 때는 그저 보신(保身)이 최고입니다.”
“자네, 언제 나한테 크게 혼날 걸세.”
황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송금백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뭐, 자네 말도 틀리진 않아.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네. 서 소교 쪽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어느 정도 들어주기로 하고, 그게 아니면 방관하기로.”
“딱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전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주님! 지급으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지급으로? 어디서?”
“송신처 불명입니다!”
송금백이 황곤에게 턱짓했다. 황곤이 공손하게 대전 밖에서 서신을 들고 왔다.
황곤이 건넨 서신을 펼쳐 든 송금백.
이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왜 그러십니까?”
“허허, 허허허!”
황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린 송금백이 황곤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중원에 소문 하나를 퍼트리게. 닷새 안에 중원 전체로 퍼질 수 있도록 신경 좀 써야겠네.”
“소문이라면……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지요?”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소림의 현판을 접수하러 간다는 미친 소문.”
“……예?”
“어이없지? 나도 그렇다네. 하지만 놈이 이걸 부탁하는데 어쩌겠나?”
송금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누가 마교도 아니랄까 봐 사고도 창의적으로 치는군.”
* * *
닷새 후.
“그리 말씀하셨다고?”
“그렇습니다.”
음상단주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문주님께선 서 소교를 위해 하오문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런 헌신과 노력을 했는데도 그 사람은 일말의 도움도 주지 않겠다니…….”
“하하하!”
느닷없는 웃음소리에 음상단주는 깜짝 놀랐다. 이내 고개를 들어 공야치를 본 그는, 더더욱 놀랐다.
공야치가 웃고 있었다.
딱딱하기가 바위보다 더 하다는 하오문의 작은 주인이 목청껏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놀라워하던 음상단주는, 곧이어 걱정을 금치 못했다. 소문주께서 너무나 허탈해 웃음을 터트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내 감히 그분을 두고 이리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음(知音)이라 칭하고 싶군. 참으로 그분다운 발상이야. 더욱이 이리도 나를 생각해 주시니,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공야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후면 정파 무림의 최고 거두를 만나러 가는 길임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잔뜩 안고 있었던 긴장도 단번에 해소한 것 같았다.
음상단주는 혼란스러웠다.
“소문주님. 죄송하지만 저는 도저히 이해가…….”
“그래, 어쩌면 소교주님께서는 그리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어. 생각해 보니 나는 분명 그러했다. 본문의 일에 소문주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지.”
공야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흩어지는 구름 속으로 흐릿한 햇빛이 보였다.
“이제 보니, 의천맹주가 본문을 공격한 이유가 있었구나.”
“예?”
“본문이 그동안 정파 무림의 행사를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의천맹주가 칼을 뽑아 든 것은 소교주님 때문이었어.”
“그게 무슨……?”
“모르겠는가? 의천맹주는 소교주님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염라마군이라는 공포의 별호로 천하를 뒤흔들고 있는 소교주님을 벼랑 끝으로 밀어 버리기 위해 본문부터 쳐내고 있는 것이야.”
음상단주의 눈이 흔들렸다.
“그 말씀은, 저희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서 소교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당장의 이유를 찾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네.”
“어, 어찌 이런……!”
음상단주는 치를 떨었다.
이렇게 당하나 저렇게 당하나, 결국 당한 것은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유를 들어 보니 너무 억울했다.
신교의 소교주 때문에 하오문이 공격을 당하다니? 새삼 서량이 원망스러웠다.
공야치가 웃으며 물었다.
“왜? 화가 나는가?”
“물론입니다! 저희는 그자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했습니다! 이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져야지.”
“……예?”
“소교주님께 먼저 동맹을 맺자 손을 내민 사람은 나다. 자네 논리대로라면, 하오문이 이 지경이 된 근본적인 이유는 나일세. 내가 이리 만든 것이야.”
음상단주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문주님께선 아무런 죄가 없으십니다!”
“나아가 나처럼 미숙한 이에게 전권을 주신 문주님께 죄가 있고, 그런 문주님을 하오문의 수장으로 뽑은 전대 문주님께도 죄가 있지.”
음상단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라고 공야치가 말하는 바를 어찌 모르겠는가? 원망의 대상은 하오문을 공격한 의천맹이 되어야지, 그 이유를 만든 서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가슴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 사실을 담담히 인정하기에는 너무 큰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음상단주.”
“예, 소문주님.”
“나를 위해 기뻐해 주지 않을 텐가?”
“예?”
공야치가 유쾌하게 말했다.
“많은 문도들이 죽었다네. 분명 기뻐해야 할 상황은 아니지. 하지만 하오문을 이끌고 있는 소문주로서의 난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네.”
“어찌 기분이 좋으십니까?”
“정파와 사파, 나아가 중원의 모든 무림인이 두려워하는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께서 나를 필요로 하셨네. 나아가 나로 인해 그분이 날갯짓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은 나란 사람의 능력과 인품을 온전히 인정해 주고 계신다네.”
“……!”
“역대 하오문의 수장들 중 누가 있어 이리 과분한 대우를 받았겠는가? 하물며 소교주님께선 신교 역사상 최고의 마인이라 불리는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니신가?”
음상단주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하오문은 그 엄청난 정보력을 갖고도 언제나 음지를 전전했다. 그것이 하오문의 생존 전략이었고, 덕분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천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천한 문파가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을 비상시켰고, 또한 소교주씩이나 되는 사람의 걱정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수장조차 발톱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는 천마신교의 마왕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분을 인정해 주고 계신단 말이었다.
“그분은 내가 귀찮아져서, 내가 싫어져서, 날 버리기 위해서 이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신 게 아니야.”
“…….”
“이 나를, 천하디천한 하오문의 작은 주인을 누구보다도 믿기 때문에 끼어들지 않겠다 말씀하신 것이라네.”
음상단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공야치가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분의 능력을 믿었고, 그분은 나라는 사람의 저력을 믿고 계신다네. 내 어찌 그분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오문을 위해서, 나아가 그분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난 반드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걸세.”
“……소문주님께서는 분명 잘 해내실 것입니다.”
“고맙네.”
공야치가 품에서 질 좋은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반듯하게 접힌 서신이 들어 있는 듯했다.
“소교주님께서 소림과 무당으로 향하신다 하였지?”
“그렇습니다.”
“당분간 소교주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할 걸세. 하여 앞으로 내가 하려 하는 일과 여러 경우의 수를 적어 놓았네. 이것을 소교주님께 전해 드리게.”
음상단주의 눈이 흔들렸다.
“홀로 가려 하시는 겁니까?”
“전장에서 믿을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힘뿐이라네. 나 하나면 족해. 그 이상의 도움은 필요치 않네.”
그때였다.
하늘을 올려다본 공야치가 크게 웃었다.
“먹구름이 가시는구나. 저 하늘도 이 공야치의 결단에 감복한 모양이다.”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걸어가는 공야치.
의천맹의 커다란 성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장부의 기개와 수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묻어 나왔다. 딱딱한 가면으로 스스로를 숨겨 왔던 잠룡(潛龍)이, 구정물을 씻고 일어나 한 마리의 창룡(蒼龍)이 되어 날아간다.
어떠한 공포도, 긴장도 엿보이지 않는 공야치의 보무는 천지가 감탄할 만큼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성문 앞까지 도달한 공야치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하오문의 공야치가 담 맹주에게 독대를 청하러 만 리 길을 찾아왔소! 당장 성문을 열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