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장악의 미학 (5)
“염라마군이?!”
“그렇다니까! 지금 하남은 난리가 났다더군! 허리춤에 칼 찬 놈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숭산(崇山)으로 향하고 있다더라니까?”
“세상에…… 소림의 현판을 접수하겠다니, 대체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나라고 알 수 있나?”
“아무리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도 그렇지, 참. 배짱 하나는 대단하구만.”
“자네 말마따나 배짱은 좋은데…… 이거 너무 간 거 아닌가 싶으이.”
“너무 갔지. 너무 가도 지나치게 너무 갔지.”
“그동안 소교주가 보여 준 언행은 파격 그 자체였다네. 솔직히 난 말로만 들어 왔던 마교도에 대한 인상이 확 깨졌어. 오히려 의천맹이 사악하게 보일 정도였다네.”
“그건 나도 동감하네.”
“하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좋게 봐 줄 수가 없군. 아무리 그래도 소림의 현판을 접수하겠다니, 지나치게 오만한 것 아닌가?”
“오만한 것도 오만한 거지만, 상대에 대한 예우가 전혀 없어. 다름 아닌 소림일세. 정파 무림의 태양이란 말일세. 진짜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현판을 접수하러 간단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되었네.”
“나도 그리 생각하네.”
“내 직접 본 적은 없어도 나름 호쾌한 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망종이었나 싶기도 하네.”
“그건 아닐 걸세.”
“응?”
“건방진 건 건방진 거지만, 진정 아무런 생각도 없이 소림의 현판을 가져가겠다고 부르짖었겠는가?”
“생각이 있든 없든 너무 심했어.”
“생각해 보게. 염라마군은 그간 놀라운 행보로 자신을 증명해 왔네. 심지어 후기지수들과 담화회까지 열 정도로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지. 그건 철혈성주도 보여 주지 못할 파격일세.”
“……음, 그건 그렇지만.”
“예의가 없는 것은 맞지만, 생각 없이 뱉은 말은 아닐 걸세. 분명 뭔가가 있어.”
송금백은 이렇게 말했다. 민중은 우매하지 않다고. 지혜롭고 날카롭지만, 그저 게으를 뿐이라고.
그의 눈은 정확했다. 사람들은 서량의 행보에 경악하며 불편함을 토로했지만, 지금껏 그가 보여 주었던 언행을 잊지는 않았다.
지탄의 소리가 나오는 만큼 기대의 시선도 강렬하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는 무슨 의도를 갖고 소림으로 향하는가?
정말로 소림의 현판을 접수하겠다는 생각인 것인가? 그도 아니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인가? 아니면 평화롭게 해결될 사안인가?
중원의 시선이 모조리 집중된 무림의 성지 숭산(崇山).
그곳으로 마차 한 대가 여유롭게 달려가고 있었다.
* * *
가장 먼저 나선 것은, 금강권문(金剛拳門)의 최고수라는 동철권사(銅鐵拳士) 한경이었다.
“멈추시오!!”
쩌렁쩌렁하게 퍼져 나가는 목소리는 그의 별호처럼 강철을 연상케 했다.
멀찍이 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한경과 마차를 바라보았다.
두두두.
여섯 마리의 한혈마가 이끄는 고풍스러운 마차는 한경의 외침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빠르게 달리진 않았지만, 마냥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한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갈(喝)!”
쿠우웅!
우렁찬 사자후와 함께 강렬한 진각을 밟는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진각이었다. 소림의 일각진산(一脚振山)이란 수법으로, 기세를 고양시키는 심공(心功)의 위력이 있었다.
하지만.
두두두.
마차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경은 화가 나기에 앞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는 수백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경의 일갈과 진각에는 무시 못 할 진기가 어려 있었다. 그 정도 기파라면 제아무리 명마(名馬)라도 겁을 집어먹어야 정상이거늘, 여섯 마리의 한혈마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주인을 그만큼 믿는 건지, 아니면 영물이라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우우웅!
한경은 진기를 잔뜩 끌어 올렸다.
소림의 속가제자가 세워 백오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금강권문은 하남에서도 알아주는 권법 문파였다. 그런 권문의 비전인 철금강신기(鐵金剛神氣)는 절정의 신공으로 이름이 높았다.
히히힝!
그제야 한혈마들이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연신 투레질을 하면서도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마부를 몹시 믿는 모양이었다.
한경이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나는 소림의 속가문파인 금강권문의 제일고수 한경이라 하오! 내 감히 신교의 소교주께 독대를 청하오!”
낭랑하게 퍼지는 외침에 강인한 자신감과 드높은 자존심이 어려 있었다.
실력을 떠나 그 기개만큼은 알아줄 만했다.
달그닥, 달그닥.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서서히 멈추었다.
한경의 외침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선 위치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부석에 앉은 사내, 마동필이 말했다.
“길을 비키시오.”
한경이 눈을 빛냈다.
“흉포한 기를 품고 계시는군. 하지만 놀라운 경지외다. 이 한 모로서는 감히 당적키 힘든…….”
“길을 비키라 하였소.”
한경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내 언사가 쓸데없이 길었던 것 같소. 다시 말하오. 나는 금강권문의…….”
“갈 길이 바쁜 이들의 앞을 억지로 막아서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소.”
“뭐, 뭐라고?”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당신과 할 말은 없으니, 이만 비켜 주시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자리였다. 한경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금강권문 제일고수라 칭할 만큼 강한 그는, 무공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대들은 소림으로 향하고 있소!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림의 가르침을 받은 이로서 당신들을……!”
그때였다.
크르르릉.
멀쩡히 따라오고 있었음에도 어찌 그리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는지, 마차 좌우에서 두 마리의 영물이 나타나 무시무시한 울음을 토해 냈다.
황금빛 서기를 뿌리는 거대한 여우와, 그 여우보다 족히 두 배는 큰 듯한 붉은 안광의 대호는 한경을 노려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헉!”
“어, 엄청나게 크다!”
“염왕이수(閻王二獸)! 마군이 부리는 차사(差使)들이다!”
염라마군이 부리는 두 마리의 영물은 신비와 낭만으로 점철된 강호에서도 가히 독보적인 아성을 구가하는 존재들이었다.
천중지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호왕과 팽가와의 혈전에서 활약한 금호는 그 존재만으로도 호사가들의 열광을 이끌어 내기 충분했고, 사람들은 어느새 두 영물을 염라마군 서량이 부리는 저승의 사자(使者)라 불렀다.
한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단연코 이처럼 신비롭고도 두려운 맹수들을 본 적이 없었다.
마주 서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뿜어져 나오는 짐승 특유의 살기와 도인(道人)을 연상케 하는 허허로운 기도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이익!”
두 주먹에 잔뜩 힘을 준 한경이 재차 외쳤다.
“이, 이런 짐승들로 이 사람을 협박하는 것이오? 이 한 모와 독대를 하기가 그리도 두려운 것이오?!”
초월적인 영물을 앞에 두고, 선을 넘는 발언을 하는 한경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체로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정작 말을 뱉은 한경조차도 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의 과민 반응 자체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발악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선은 넘었다. 한경이 연이어 외쳤다.
“신교의 소교주는 당장 내려서 소림의 현판을 가져가겠다는 발언에 대해 직접적인 해명을……!”
「커어엉!!」
“컥!”
공기를 찢어발기는 엄청난 포효에 한경이 비틀거렸다.
영기(靈氣)가 한가득 실린 금호의 포효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주위의 수많은 사람도 내력이 들끓고 전신에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스르륵.
금호과 서서히 한경에게 다가갔다.
순간 한경은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이놈!”
퍼어억!
한경의 주먹이 금호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하지만.
“……!”
금호는 심유한 눈으로 한경을 내려다보았다. 바위도 으스러트리는 강력한 일권(一拳)에 맞고도,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 한경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금호가 앞발을 들었다.
툭.
큼직한 앞발이 한경을 밀자 그가 주춤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마치 ‘장난은 끝났지?’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금호가 길을 열고, 그 뒤를 호왕이 따랐다.
히히히힝!!
길이 열리자 한혈마들이 투레질을 하며 다시 마차를 끌었다. 이번만큼은 한경도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염라마군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부리는 신비한 영물들이 길을 열었을 뿐이다.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천하 명장이 만든 고풍스러운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두 마리의 영물은 그들의 길을 고고하게 나아갔다.
하지만 그들을 막는 이들은 한경이 끝이 아니었다.
“멈추시오! 나는 복마창회(伏魔槍會)의 귀원이오!”
“혜검불심문(慧劍佛心門)의 소항이 신교의 소교주님과의 독대를 청합니다.”
“이 철심무곤(鐵心武棍) 견극을 넘어서지 않고선 소림으로 향하지 못할 것이외다!”
소림으로 향하는 길을 수많은 문파의 무인들이 나타나 막아섰다. 그들 대다수가 소림의 속가 출신이었고, 소림과의 연이 각별하거나 소림을 숭앙하는 무인들도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허창에서 숭산 앞 등봉현(登封縣)까지 오는 길은 빨랐지만, 등봉현에서 숭산 초입에 오르는 길까지는 너무나도 더뎠다.
수많은 문파와, 수많은 무인이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하나 같이 서량과의 독대를 청하거나, 불심의 성지(聖地)로 마인(魔人)이 들어서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도 일행은 나아갔다.
빠르게 가고자 한다면, 앞을 막은 모두를 해치우며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금호와 호왕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며, 마동필 혼자만으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행은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무력 충돌은 한 번도 없었으며, 그저 장중한 기도와 허를 찌르는 언사로 길을 뚫었다.
시간이 흘러 마차가 숭산 초입에 도달했을 즈음.
그때부터 일행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껏 그들의 행보를 막았던 사람 중 고수 아닌 이가 없었고, 유명하지 않은 무인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번번이 물러나야만 했다. 창칼 한번 겨눠 보지 못한 채.
사람들은 깨달았다.
누구도 저 마차를 막을 수가 없다. 소림의 산중고수나 중원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초고수들이 나타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염라마군의 힘이었고, 천마신교의 위용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행에게 놀란 만큼, 일행 역시 소림의 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마군 일행에게 상대가 될 수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일행을 막으려 들었다.
무림에서 소림이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힘이 한참이나 부족해도 애써 용기를 내 무림 최악의 공포라는 마교도의 앞을 막는다.
무림의 우상 소림.
무림의 공포 마교.
신(神)과 마(魔), 불(佛)과 악(惡)의 접점에서, 비로소 두 집단이 가진 힘의 크기가 드러난 것이다.
더 이상 마차를 막길 포기한 군중은 마차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기나긴 행렬을 뒤에 달게 된 마차가 숭산 초입에 들어서 위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아미타불(阿彌陀佛).”
한 줄기 불호성이 온 산을 울렸다.
굉장히 큰 소리였지만 결코 위협적이지 않았다. 경건하면서도 차분하게 퍼져 나가는 음파에 금색 빛무리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덜컹!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 너머 큼직한 바위 위에 승려 한 명이 반장(半掌)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먼 길을 돌아, 비로소 이곳에 도달한 욕계의 귀인(貴人)들을 뵙습니다.”
승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한당(羅漢堂)을 맡고 있는 정각(正角)입니다.”
소림의 무력을 담당한다는 나한당의 수좌.
단 한 사람의 등장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엄청났다.
덜컥!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