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장악의 미학 (6)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마차.
그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영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相)이었다. 조화롭게 자리 잡은 뚜렷한 선의 오관과 기민하게 반짝이는 눈빛. 여유 넘치는 표정과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의 비범한 용모에 자유분방한 멋을 더했다.
하지만 그 얼굴보다 놀라운 것은 체격이었다.
태산처럼 당당한 어깨와 날렵하게 뻗은 긴 팔다리, 장포에 가려져 있지만 얼핏 보아도 완전하게 다듬어진 몸.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장대한 기골이었다.
마공을 개방하지 않아도, 위협적인 기파를 발산하지 않아도.
그 청년을 본 수많은 사람은 그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염라마군.”
정사마(正邪魔)를 포함, 당대 후기지수의 정점이라 불리는 무인.
후기지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위업을 달성한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 거기에 있었다.
훅.
서량이 등장하자마자 산의 공기가 바뀌었다.
나한당주 정각의 기도가 장중하면서도 편안했다면, 서량의 기도는 무색투명하면서도 차갑고 강렬했다. 마치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서늘한 강철이 대면한 것 같았다.
두 고수가 서로를 마주 봄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듯했다.
정각의 두 눈에서 강렬한 광채가 뿜어졌다.
‘무시무시하구나!’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정각만이 유일하게 서량의 힘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극마…… 저 어린 연배에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철탑 같은 신체를 갖고 있지만, 언뜻 보기에 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 같다. 존재감은 대단했지만, 내력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서량의 경지가 너무나도 높기 때문이었다. 낮은 곳에서 어찌 까마득한 절벽 위를 살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각의 눈에는 보였다. 저 단단한 체격 안에 깃든 폭발적인 힘의 실체를.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핏빛 마수(魔獸)와 시퍼런 불꽃이 전신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고한 경지……! 방장 사형이나 전대 어르신들이 아니라면 감당할 수가 없겠다.’
그는 서량의 눈을 다시금 주시했다.
흑백 또렷한 눈은 온 천하가 두려워하는 마왕의 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담백했다.
그래서 더 무섭고, 놀라웠다.
“나한당을 맡고 있다…… 나한당주이시오?”
“그렇습니다. 귀하께서 근래 소문이 자자한 신교의 소교시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당주를 새로 뽑았나? 정심(正心)의 나이가 많기는 했지. 과연 소림이야. 고수가 많기도 하다.’
차분하면서도 느긋한 미소에 정각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대적인 마(魔)를 품고 있음에도 너무나 인간적인 미소를 그린다. 어울리지 않는 그 괴리감이 원초적인 공포를 두들겨 대고 있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천마신교의 소교, 서량이오.”
정각은 자신도 모르게 불호를 뱉었다.
“아미타불.”
우우우웅.
살짝 고개를 숙인 정각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서기가 발출되었다.
마동필의 금강야차마기나 금호의 요기(妖氣)와는 전혀 달랐다. 둘의 기(氣)보다 훨씬 밝고 찬란하면서도 안온한 진기였다.
그것이 바로 소림 정종의 신공, 대승범천(大乘梵天)의 내공력이었다.
“서 소교의 힘이 너무나도 강대하여 저도 모르게 내력을 발하였습니다. 수양이 낮은 빈승을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해하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나한당의 수장은 소림의 무력을 대표하는 이였다. 그 힘은 다른 구파 장문인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터, 그런 무승(武僧)이 염라마군의 힘을 버티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각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그럴 때도 아니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시오.”
“근래 중원에 도는 무서운 소문이 이곳 산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해서 부득불 확인하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정각의 눈이 빛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서 소교께서는 소림과 싸우러 오신 것입니까?”
깍듯한 태도 속에 강단 넘치는 나한의 불심이 고개를 들었다.
직설적인 질문에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소림과 다투게 될지, 아닐지는 보다 더 깊은 대화 이후에 결정할 일이오.”
“하면, 서 소교께서 소림의 현판을 가져가겠다는 소문이 다소 와전되었던 것이라 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오.”
“……?”
“나는 분명 강호에 그리 외쳤소. 소림의 현판을 가져가겠다고.”
정각의 눈이 가늘어졌다.
“섣부른 말이지만, 서 소교께서 범인(凡人)이 헤아릴 수 없는 심계를 품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겠습니다. 부디 서로 간에 오해가 없도록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차분하다.
대대로 나한당의 수좌는 불같은 성정과 강력한 무공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정각은 소문 속 나한당주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각의 성격이 역대 나한당주 중 유독 차분하기도 했지만, 서량의 품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만히 정각을 응시하던 서량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림은 강호 최고의 문파이자 무림의 어른이오. 당주도 그걸 모르진 않을 터.”
“빈승은 소림을 누구보다 사랑합니다만, 속세에서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감히 논하기 어렵습니다.”
“당주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오. 사람들은 분명 그리 생각하고 있으며, 소림 역시 수백 년에 걸쳐 강호에 그 영향력을 행사해 왔소.”
“…….”
“말하자면 소림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파 무림의 태양이란 말이오.”
정각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림을 칭찬하는 말 앞에서 굳이 아니라고 반박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서량의 뼈 있는 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명성을 바라지 않았을지라도 책임을 져야 할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바. 대체 소림은 정파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정각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말씀을…….”
“비리가 판을 치고 권력에 빌붙어 약자를 기만하는 이들이 횡행하고 있소! 사내(寺內)에 어떤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파 무림이 이리 망가지도록 방치한 데에 소림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오!”
느닷없이 정파 무림의 문제와 소림의 잘못을 언급하는 서량의 준엄한 목소리에 군중이 웅성거렸다.
우우우웅.
서량의 몸에서 은은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불심의 성지에서 피어오르는 절대의 마기. 군중의 입이 다물리고, 정각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지금의 구파를 보시오! 그간 구대문파는 민중에게 신선의 문파로 인식되어 왔고, 동시에 의협의 화신이라 불려 온 강호의 기둥이었소! 하지만 지금은 어떻소? 의천맹주의 간악한 흉계에 휘말려 돈과 권력에 찌들지 않았소!”
민감하고도 아픈 부분을 단번에 찌르고 들어온다.
정각은 당황했다.
“마도의 왕자인 내가 왜 소림까지 와서 이 난장을 부리는지 아시는가? 정파가 썩어 버리면 우리에게 이로울 일인데도 이 난리를 피우는 이유를 그대는 알고 있는가!”
서량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만큼 말투가 무겁고 거칠어졌다.
“우리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름을 인지하고 왕성한 교류가 지속된다면, 비록 부작용은 있을지라도 종국에는 중원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야!”
“……!”
“눈이 있으면 보았을 것이고, 귀가 있으면 들었을 것이다! 한데 입은 왜 가만히 놀려 두고 있는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정파를 위해, 강호의 어른으로서 한마디 호통을 치기가 그리도 귀찮았던가? 당신들이 추구하는 불심(佛心)에 천하의 안녕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인가!”
“말씀을…….”
정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디 말씀을 조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웃기는 소리! 세상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체면을 생각한다면 뒤는 안 봐도 뻔해! 당신들이 그리도 부르짖는 대승적 차원에서, 세상을 위해 사찰의 문을 열고 뛰쳐나올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가!”
“소림에는 소림의 문제가 있습니다.”
“소림의 문제가 세상의 문제와 직결될 만큼 큰 것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뱉었던 나의 발언을 철회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겠다.”
서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말해 보라. 세상이 썩어 가고 있는 것을 좌시해야 할 정도로 귀사(貴寺)의 문제가 심각한가?”
정각은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큰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설령 그토록 큰 문제가 있다 해도 외인에게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군중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소림을 대표하는 위치는 아니지만, 지금은 그의 말 한마디가 천하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내가 소림의 현판을 가져가겠다는 말에는 이런 뜻이 있었다. 소림이 세상의 위기에 눈을 감고 부처만 모시겠다면, 무림 문파로서의 소림사는 더 이상 강호에 존재해선 안 돼.”
“…….”
“수행자의 신분으로 부처만 모실 것인지, 이 유례없는 위기에 직접 나설 것인지 속히 판단하라. 후자를 선택한다면, 방장에게 무릎을 꿇고 백 날이든 천 날이든 사죄를 올리겠다. 하지만 전자를 선택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소림의 현판을 부술 것이다.”
쿠르르릉!
서량의 몸에서 뇌성이 울려 퍼졌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구유마기와 번갯불을 피워 내는 군림마황기가 선정(禪定)한 숭산을 흉흉하게 물들였다.
“이상이 내가 이곳, 불심의 성지이자 무림의 성지인 숭산으로 온 이유이다.”
누구보다 흉흉한 기를 뿜지만, 입으로는 천하의 안녕과 평화를 논한다. 그 심각한 괴리감이 진정성 충만한 목소리 안에 녹아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서량의 말을 들은 군중은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정각도 마찬가지였다.
‘사술? 현혹?’
아니다.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정각은 알 수 있었다.
서량은 필요 이상으로 열을 내고 있었다. 섣부른 생각이지만, 저 정도로 뜨거운 사람은 아닐 것이다. 정각은 서량이란 인물을 그렇게 보았다.
하지만.
서량의 목소리에 강한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사술(邪術)과 마공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는 있어도, 진심을 가릴 수는 없다.
‘그래도 이래서는 안 된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말이었지만 정각은 서량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감했다. 실제로 그 역시 소림의 행사에 불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문 정각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흥미롭구먼.”
모두의 시선이 정각의 뒤편, 작은 오솔길 너머로 향했다.
“육신에 천지를 찢어발길 힘을 품고 있으니, 가히 대마귀(大魔鬼)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거늘, 목소리에 담긴 진심에선 언뜻 불심(佛心)마저 엿보이는군. 신기해. 참으로 신기하도다.”
편안한 목소리였다.
정각의 차분한 목소리보다 훨씬 편하고 안온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상이 그런 게지.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무엇이든 극에 이르면 돌연 반전하기 마련이라던가? 태극 운운하던 현천, 그 호랑말코가 자주 하던 말이었는데 말이야.”
정각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것은 서량도 마찬가지였다. 오솔길을 내려오는 한 노승에게서, 감히 추측하기 어려운 기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편안하고 현기 그득한 목소리를 듣자 마기가 수그러든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귀하는?”
“떽! 천하의 안녕을 바라고 평화를 부르짖을 만큼 열혈인 놈이 예의는 어디다 팔아먹은 게야? 하기야, 그리도 거칠고 무례하니 되레 진심은 원석처럼 꾸밈이 없겠지.”
웃음 섞인 목소리에 기분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기가 잠잠해지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본래의 색을 되찾는다. 반면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강자…… 그것도 엄청난!’
마침내 나뭇가지를 젖히며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노승.
위아래로 저를 훑는 노승의 심유한 눈빛에 서량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흐음, 분명 남다른 속내가 있기는 한데…… 여유는 있지만 다급하고, 진심은 가득하나 노리는 바가 따로 있다? 재미있는 아해로구나.”
노승이 씨익 웃었다.
“나는 또 이천상 그놈이 찾아온 줄 알았더니, 녀석의 제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