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장악의 미학 (7)
“흐음, 겨우 하나인가? 그래도 질이 아주 좋구먼.”
담사영은 빙긋 웃었다.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는 수많은 꽃 중, 한 송이만이 정확히 열 가지의 색을 뿜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선명한 색을 띠는 꽃. 지금껏 그가 키워 왔던 십색지화 중 손에 꼽힐 만큼 잘 자란 놈이었다.
“어디 보자…… 오호? 아직 다 크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 얼마나 클지 기대가 되는군.”
클클 웃으며 꽃을 쓰다듬은 담사영이 허리를 폈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게 하나 있다네.”
“…….”
“처음엔 말일세, 제때 물만 주면 알아서 쑥쑥 크는 줄 알았지. 하지만 직접 키워 보니 그게 아니더군. 물을 주는 거야 기본이고, 좋은 토양도 필요하네. 나아가 온갖 정성을 쏟아야 예쁜 놈으로 자라나더라, 이 말일세.”
“…….”
“식물도 그럴진대 동물은 어떨 것이고, 사람은 어떨 것인가? 내 이리 꽃을 키우면서 많은 걸 배운다네. 뭐든 정성을 쏟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나기가 어려워.”
물 적신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십색지화를 보던 담사영이 눈을 빛냈다.
“저놈 정도면 방장한테 보내도 되겠군. 어쩌면 저놈으로 인해 방장의 불심(佛心)이 한층 깊어질지 또 누가 알겠나.”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던 담사영이 자리에 앉았다.
“차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싸구려 찻잎으로 우린 식은 차도 잘 마십니다.”
“허허, 역시 젊구먼. 나이가 들면 말일세, 젊을 때는 가리지 않던 음식도 하나, 둘 가리게 된다네. 차도 마찬가지지. 나는 용정(龍井)을 유독 좋아한다네.”
담사영은 손수 찻잎과 다기를 꺼내 차를 우렸다.
수십 년 동안 해 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우아한 동작이었다. 어떤 온도에 얼마나 향이 나는지를 정확하게 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상대방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쪼르르르.
“고아한 경관에 향 좋은 차라. 세상에 이런 신선놀음이 또 어디에 있겠나.”
“…….”
“마셔 보게.”
공손하게 한 모금 들이켠 사내, 공야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아주 좋습니다.”
담사영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 이래 봬도 용정을 우리는 솜씨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네. 영광인 줄 알게나.”
“물론입니다.”
목소리에 일체의 흔들림이 없다. 담담한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아 공야치를 보는 담사영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하오문의 소문주라…….’
다소 피폐해 보이기는 하지만 천하의 의천맹주와 독대를 하고 있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듯했다.
‘걸물이로군.’
이제는 죽고 없는 개방주 천곤개 전평보다 훨씬 지혜로운 눈빛을 하고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상대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담사영은 공야치의 눈빛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뚝심도 있고, 배포도 있어. 본인이 세운 기준이 확고하여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아. 그럼에도 유연함을 갖추고 있으니, 쉽게 보기 힘든 인재임은 확실해.’
무공에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훨씬 귀한 인재다. 중원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한들, 이런 재인(才人)은 정말 몇 없었다.
담사영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것 같네.”
“괜찮습니다.”
괜찮단다.
강호삼세의 일익을 담당하는 의천맹주 앞에서 말투 한번 가관이다. 하지만 담사영은 공야치의 말투를 책잡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이 자네를 제법 거칠게 다루었다고 들었네. 며칠이 지났지?”
“닷새였습니다.”
“닷새라…… 닷새 동안 빛도 안 들어오는 독방에 갇혀 지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담사영이 혀를 찼다.
“내 이 대담이 끝나면 아랫것들에게 사과를 받아 줌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님으로 온 사람한테 너무 과했군.”
닷새 동안의 독방 감금.
식사는 하루 한 끼가 전부였으며, 식수도 한 사발이 전부였다. 게다가 창이 없는 독방에 닷새 동안 갇혀 있었으니, 심신이 피폐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공야치는 지금 그런 상태로 담사영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자네도 많이 기다렸을 테니 더 이상의 잡담은 그만두겠네. 나와의 독대를 요구했다고?”
“그렇습니다.”
“말해 보게. 나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문파에 관한 얘기라면…….”
“하오문에 관한 질문이 아닙니다.”
“음?”
“저희는 봉문을 선언했습니다. 당연히 공격을 멈추셨겠지요. 저는 그 부분이 궁금한 게 아닙니다.”
담사영의 눈이 번뜩였다.
여전히 공야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 부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그러시는가?”
“그랬다면 맹주님에 대한 인상을 수정하면 됩니다. 그 또한 정보 단체를 이끄는 제게 있어 큰 소득이지요.”
“호오? 나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비슷합니다.”
담사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질문하게.”
“현재 서 소교가 어찌 움직이고 있는지 파악하고 계십니까?”
뜬금없이 서량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오늘 아침, 하남 등봉현까지 백 리가 남았다고 연락이 왔더군. 앞을 막는 이들이 많을 테니, 지금쯤 숭산에 도달했을 거라 보네.”
“그렇군요.”
“놀라지 않는군. 소교주가 소림으로 향한다는 걸 알고 있었나? 아니면 예상한 겐가?”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의천맹의 성문을 두드리기 전에 보고를 받았지요.”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서량과 공야치의 관계가 훨씬 탄탄했던 모양이었다.
‘잘 끊었군.’
무리해서 하오문을 공격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무색사에게 명령할 권한이 한 번밖에 남지 않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나? 그간 자네가 도운 젊은 마룡(魔龍)이 걱정되었던가?”
“그가 왜 소림의 현판을 접수하겠다며 날뛰었는지 아십니까?”
“글쎄…… 뭔가 발악하는 느낌이 있긴 했네만, 자세히는 모르겠군.”
아니다.
담사영은 서량이 소림의 현판을 접수하러 가겠다는 말을 들은 후, 제법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서량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일이 어떻게 되든, 사람들은 의천맹의 반응을 주시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세상의 주목을 받아 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담사영은 생각했다. 참으로 골치 아픈 놈이라고.
“자네는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수개월을 함께 일한 사이인데, 그자의 생각을 모르면 바보지요.”
그자?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소교주가 무엇을 노리고 있지?”
“맹주님께서 그자에게 하려던 짓을, 그자 역시 똑같이 갚아 주려 하고 있지요.”
“……?”
“의천맹을 벼랑 끝으로 밀어 버릴 것입니다.”
“……흐음, 본 맹을 벼랑으로 밀겠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소교주가 소림을 구슬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담사영이 피식 웃었다.
“좋네, 자네 말마따나 그럴 수 있다고 치세. 소림이 제아무리 태산북두라 한들, 본 맹을 벼랑으로 밀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소림으로는 부족하지요.”
“하면?”
“마교.”
순간 담사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정파 무림의 태양인 소림, 그리고 마도 무림의 총본산인 마교가 손을 잡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소림과 마교가 손을 잡는다? 상상이 가질 않는구먼.”
“예, 과거의 마교였다면 감히 그런 일이 생기진 않겠지요.”
“지금의 마교는 다르다는 건가?”
“맹주님께서 신경 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맞습니다. 서 소교는 단기간에 여론의 흐름을 바꿔 버렸습니다. 지금의 마교는, 어르신 세대가 기억하는 마교가 아닙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요.”
공야치가 미소를 지었다.
심신이 지친 와중에도, 그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소림과 마교가 손을 잡아도 사람들은 놀랄 뿐, 소림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유인즉, 서 소교가 마교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
“의천맹이 두 집단의 연합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감히 자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담사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서 소교를 비상시킨 사람은 접니다. 저로 인해, 하오문의 힘으로 인해 서 소교는 대중에게 찬사를 받는 마인이 될 수 있었지요.”
“……자네 말은?”
“예, 그렇습니다.”
공야치의 얼굴에 스산한 미소가 어렸다.
어찌나 섬뜩한 미소였던지, 산전수전 다 겪은 담사영조차 뜨끔할 정도였다.
“슬슬 말을 갈아탈까 합니다만, 본문의 적토마가 되어 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 * *
노승의 기도는 충격적이었다.
이천상처럼 활화산 같은 기파를 발산하는 것도, 담사영처럼 음험하고 독랄한 기도로 공기를 장악하는 것도, 송금백처럼 맹수 같은 위압감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량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이럴 수가.’
무시무시한 자다.
세상에 이런 자는 없다.
불가의 무학을 익혔기에, 마공과 상극인 항마기(降魔氣)를 익혔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압력은 몇 배나 더 거셌다. 전신을 꽉 채운 마기가 모조리 분해되는 기분이었다.
우우우우웅!
서량의 몸에서 구유마공이 피어올랐다.
마공의 균형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역시나 위기 상황에서 익숙한 것은 구유마공이었다.
쿠구구궁!!
일대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완전히 개방된 구유마공의 무지막지한 기파가 끝 간 데 모르고 퍼져 나갔다. 한참 떨어진 군중들마저 기겁하여 뒤로 물러날 만큼 대단한 위력이었다.
서량과 마주 선 정각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아미타불.”
자신도 모르게 불호성을 뱉고 대승범천신공을 운용한다. 부처의 금광이 후광처럼 번져 나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주르륵.
정각의 몸이 서서히 뒤로 밀렸다.
뒷걸음질을 치는 것도 아닌데 밀리고 있다. 서량이 발하는 기파의 압력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노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손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우웅!
서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구유마공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도 쉽게.
이천상을 제외하고, 자신의 마기를 이리 손쉽게 해체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화아아악!
창백했던 정각의 안색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노승의 손끝에서 올올이 흘러나온 진기가 그의 신체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마공이로다.”
노승이 휘두른 손을 주물렀다.
“손을 불에 넣었다 뺀 것 같구먼. 놀라운 힘이야. 마공의 성취가 한 단계 더 올라온 상태였다면, 나라도 쉬이 대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
“누구요?”
“응?”
서량이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정체가 무엇이냔 말이오.”
“보면 모르겠느냐? 소림에 적을 두고 있는 땡중이니라.”
소림의 무승.
지긋한 나이에, 서량의 마공을 손짓 한 번으로 와해시킬 수 있는 절대고수.
정각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정각이 적송 태사백님을 뵙습니다!”
“오냐. 오랜만이구나.”
친근하게 인사를 받아 주는 노승.
이곳에 있는 모두가, 심지어 마차 안에 있는 고구와 여상린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량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권신(拳神)…….”
“권신? 웃기지 말거라, 어린 마룡아. 내 어딜 봐서 권신이란 칭호가 어울리더냐?”
마치 어린아이가 투덜거리듯 입을 삐죽 내밀며 말하는 모습.
하지만 누구도 그 모습이 우습다며 웃을 수가 없었다.
나한권신(羅漢拳神) 적송대사.
원무검신 현천진인과 함께 정무쌍신으로 불리었던 자.
당대 천하십대고수가 나타나기도 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적의 고수가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평화를 입에 담고,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기 시작한 마인이라……. 이천상 이후로 그런 마인이 다시 없을 줄 알았거늘, 내 오늘 이렇게 보는군.”
노승, 적송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네 마기가 너무 지독해서 본사 아해들에게 해악을 끼칠까 무섭다. 할 얘기가 있거든, 내 거처로 가도록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