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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320화 (320/774)

320화. 천지개벽(天地開闢) (2)

충격적이었다.

‘혈고라니?!’

설마하니 무림의 전설이라는 적송의 입에서 혈고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소림의 무공 중 스물여덟 개의 진본이 의천맹주의 손에 넘어갔다는 얘기보다 훨씬 놀라운 얘기였다.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패기 넘치는 솔직함으로 대화를 주도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서량은 크게 당황했고, 적송 역시 그의 당황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 깃들어 있는 또 다른 놀라움도 간파해 낼 수 있었다. 단순히 소림의 수뇌부가 혈고에 중독되었다 하여 놀란 게 아니라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중독이 되었는지, 감염 경로가 어찌 되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만약 내가 본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면 알아챘을 수도 있었겠지. 하나 나는 수십 년 전부터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어.”

“…….”

“이미 깨달았을 때는 늦었느니라. 소림 무공의 광대무변한 공능으로도 한낱 벌레 한 마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살왕이었던 시절, 서량은 담사영이 시키는 온갖 잡무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혈고를 제거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그 역시 천운(天運)이 있어 결정적인 해독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수십, 수백 번을 제 몸에 실험해야만 했다.

죽을 뻔한 적도 많았고, 해독 과정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혈고를 해독하지는 못했다.

찾고, 찾고 또 찾은 끝에 기어이 하나의 해독법을 알아냈다. 심지어 그 방법으로 해독을 하다가도 죽을 뻔했다.

혈고란 그렇게 위험하고 무서운 마물인 것이다. 사공(邪功)의 극에 달한 자가 아니라면 혈고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순간 서량은 과거 천라지망에 쫓기던 시절을 떠올렸다.

철혈성 소속이 아닌 사파의 고수, 그럼에도 천하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절대자가 떠올랐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살기를 주체할 수 없는 원수 중 하나.

“비요왕(飛妖王)을 초대하지 않았소?”

“비요왕이라…… 당대 십대고수 중 하나로 손꼽히던 아이 말이냐?”

서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무림인들이 죽어서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절대고수를 두고 아이라고 하다니, 새삼 적송의 연배가 굉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소. 사신(邪神)의 절학을 이은 그년이라면, 혈고를 해독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오.”

실제로 비요왕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구파의 절학을 알려 준다면 혈고를 해독해 주겠다고.

생사가 갈리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서량은 비요왕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큰 도움이 되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

“안 부른 거요, 오지 않은 거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느니라.”

“…….”

“그뿐만이 아니다. 천하에서 명의(名醫), 신의(神醫) 소리를 듣는 의원들을 몽땅 초빙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시적으로 몸을 추스르는 정도의 방법만 알고 있었을 뿐, 근본적인 해독 방법은 몰랐다.”

“그럴 리가? 몇 날 며칠이고 머리를 맞댄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그들도 중독되었다.”

“뭐, 뭐라고?!”

“중독된 아이들의 맥을 짚은 의원들 모두가 혈고에 중독되었다. 당연히 감염 경로는 파악할 수 없었지.”

서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럴 리가…… 노선배가 보고 있었는데도 말이오?”

적송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한가?’

고수라고 꼭 눈치까지 좋으란 법은 없다.

하지만 적송 정도의 고수라면 얘기가 다르다. 섣부른 말이지만, 적송은 당금 십대고수 중 누구보다도 높은 경지에 이른 절대자였다. 굳이 보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보이는 경지란 뜻이다.

그 눈을 피하고 의원들만 골라서 감염시킨다고?

‘세작이라도 심어 놓은 건가? 아니면 사술?’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무공의 유출, 수뇌부의 중독.”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소림이 나서지 못했던 것이군.”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나설 수 없을 것이다. 자칫 소림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가 아닌가.

물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고치지도 못하는 거 중독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설 수 있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서량은 그리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것까지 바라서는 안 될 일이고, 그 역시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방장은 무사하오?”

“…….”

“방장도 중독되었군.”

적송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방장 사질은 누구보다도 강단이 넘치는 사람이다. 처음 중독된 걸 깨달았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소림을 이끌려 했지. 하지만…….”

“내공으로 막을 수 없는 발열, 신체 말단부의 잔떨림, 불규칙한 심박 등 오장육부의 기능 저하, 그로 인한 시력 상실 등의 합병 증세.”

서량 역시 한숨을 쉬었다.

“제어약을 먹지 않았다면 지금쯤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가 됐겠군.”

“……잘 알고 있구나.”

“알 수밖에.”

“신교에서도 혈고에 대해 파헤쳐 본 것이냐?”

“그것까진 모르겠소. 다만 내가 혈고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내가 중독되어 봤기 때문이지.”

순간 적송의 눈이 흔들렸다.

“혈고에 중독이 되었었다고?”

“그렇소.”

“해독은 했느냐?”

“물론이오.”

“그렇겠지. 해독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앞에 서 있지도 못했을 테니.”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어약을 받아 혈고의 발작을 억누르면서 지냈소. 그것도 꽤 오랫동안.”

“대체 누가 네 녀석에게 혈고를 주입한 것이냐? 신교의 작은 주인에게 그런 짓을 한 놈이 있단 말이냐?”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소교주가 되기 전에는 워낙 거칠게 살았소이다.”

그는 살왕이라 불리던 시절을 얘기했지만, 적송은 다르게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대권을 거머쥐기 위한 후계자들의 피 튀기는 싸움이 어느 곳보다 심하다고 들었다.”

적송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권력이 무엇이고, 욕심이 무엇이라고.”

연신 한숨을 내쉬던 적송이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본사의 상황은 그러하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느냐?”

“충분히.”

“약조는 약조이니만큼, 방장을 설득해 보겠다. 아닌 게 아니라 방장 역시 현 사태를 무척이나 안타깝게 보는 사람이니라. 다만 거동이 불편하여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을 뿐, 언제든 다시 세상에 나서고 싶어 할 게야.”

“하지만 그 몸으로 나서 봤자 맹주 놈에게 잡아먹힐 뿐이오.”

적송의 눈이 빛났다.

“내가 나서면 상황이 다르겠지.”

“물론 그렇겠지. 지금껏 노선배는 소림의 중진들이 할 역할을 해 온 거 아니오? 만약 그들이 나서겠다 마음을 먹는다면, 그땐 노선배에게 걸린 제약도 사라지겠지.”

“제약이라 말하지 말거라. 경내 최고 어른으로서,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둔 것 자체가 통탄스러울 뿐이다. 진즉에 나섰어야 할 일이었어.”

짙은 회한(悔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적이라 칭송받던 고수에게도 현재 소림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서량은 생각했다.

‘혈고라…… 상상도 못 했는데.’

소림이 이런 상황이라면 무당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어차피 늙은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타락시킨다 한들, 소림과 무당만큼은 건드리기 힘들다는 것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도 힘들고, 만인의 칭송을 받고 있기에 멸망시킬 수도 없는 난적(亂賊).

‘혈고를 풀다니, 늙은이답군.’

그때, 적송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린 마룡아.”

“말씀하시오.”

“내 불제자이기 전에, 이 나이 들어 자존심을 세우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이미 이곳에서 은거 아닌 은거를 하며 자존심 같은 것들은 모두 버렸느니라.”

“…….”

“해서 내가 네게 부탁을 하고 싶다만,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뿌리 깊은 증오가 나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 부분이 참으로 민망하고, 고통스럽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고 있소.”

“그래, 이미 짐작하고 있다 하니 내 진심으로 부탁하겠다.”

적송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탁을 하기 위한 행동이든, 그저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서 한 행동이든 서량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혈고의 해독법을, 부디 이 땡중에게 알려 줄 수 있겠느냐?”

“…….”

“물론 너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실상 그럴 필요도 없지. 다만 해독법을 알려 준다면…….”

“좋소.”

“뭐, 뭐라고?!”

어찌나 놀랐는지 적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츠츠츠.

그의 몸에 남아 있던 소량의 주기(酒氣)가 아지랑이를 그리며 체외로 배출되었다. 무의식중에 진기를 운용할 정도로 놀라움이 크다는 뜻이었다.

서량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림의 승려들이 죽든 살든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요. 하지만 나는 소림을 성토하러 왔고, 소림에게 바라는 것도 있소. 그걸 위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진심이냐?”

“진심이오.”

적송이 벌떡 일어났다.

서량이 손을 들었다.

“대신 조건이 있소.”

“어떠한 것이든 말해 보아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혈고의 해독법은 드릴 것이오. 그러니 너무 부담을 느끼진 마시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소림으로 오는 길에 무당(武當)의 도사를 죽였소.”

순간 적송의 얼굴이 굳어졌다.

“노선배와 함께 쌍신이라 불리던 현천진인의 사제라고 하더군. 그 도사는 맹주의 휘하로 들어가 나를 막았소. 맹주의 의도는 명백했고, 나는 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소.”

“……현천의 사제라.”

적송의 눈이 깊어졌다.

“현양. 현양이로군.”

“그렇소.”

적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걱정하는 것이 어떤 부분인지 알겠다. 다만 당장 소림이 나서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로구나.”

“그렇소.”

“그래서 해독법을 알려 주는 것이고?”

“말했듯, 도와주지 않아도 해독법은 줄 것이오. 혈고라는 제약이 없으면 소림 역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적송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여 준 충격적인 기도는 사라졌다. 지금 서량의 앞에 있는 사람은 무적의 권신이 아니라, 그저 한없이 선하기만 한 소림의 큰 어른일 뿐이었다.

그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힘들 것이다.”

“알고 있소.”

“힘들지만…… 좋다.”

그리고 지금.

한없이 선하기만 했던 소림의 큰 어른이 다시 아라한의 현신이라는 권신 적송으로 돌아왔다.

번쩍!

적송의 눈이 찬란한 금광으로 물들었다.

“소림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제 역할을 못 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지. 강호에서의 은퇴란, 목숨이 다하는 그때인 것을.”

“…….”

“너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세상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뿐이다. 그것만 알라.”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오.”

* * *

“다, 당주님!”

정각이 등을 돌렸다. 저 멀리 오솔길에서 젊은 승려 하나가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손님이 계시는 자리다. 어찌 그리 경망하게 행동하느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각이 급한 사안이라…….”

정각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냐?”

“그게 아니라…….”

젊은 승려가 침을 삼켰다.

“저 손님들을…… 본사로 들이랍니다.”

“뭐, 뭐라고?!”

정각이 일행을 바라보았다.

마동필의 눈이 빛나고, 고구의 표정이 묘해졌다.

여상린이 씨익 웃었다.

“마인이면서 소림을 설득해 버리네. 기가 막히는 양반이야,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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