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천지개벽(天地開闢) (3)
강호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세상이 주목할 만큼 큰 분란은 없었지만, 왠지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중원 전역을 아울렀다.
신교의 소교주 염라마군이 자신의 정체를 알렸을 때, 천하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들끓었다.
이후 염라마군이 천하를 무인지경으로 누비고 다닐 때, 천하는 이 젊고 능력 있는 마인의 행보를 흥미롭게 주시했다.
염라마군이 등장하기 전에도 세상에는 사건 사고가 많았다. 하지만 그가 등장한 이후, 신교의 중원 진출을 선포한 이후엔 천하에 이는 바람의 색이 달라져 버렸다.
근래 천하를 요동치게 한 자. 수많은 행보로 강호 전체를 놀라게 한 자.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자가 소림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모두가 그를 주목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염라마군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긴장했다. 창칼을 갈았고, 힘을 비축하려 노력했다.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긴장했다.
소림, 그리고 천마신교.
정파 무림의 태양과 마도 무림의 태양이 만났다.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사건이지만, 더 큰 문제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문도 나지 않은 것이다.
소림이 절간의 대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봉문(封門)은 아니지만, 거의 봉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소림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천하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가 긴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얼마나 지났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신교의 소교주가 소림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느냔 말이네.”
“대략 한 달쯤 되었습니다.”
“한 달…… 벌써 그리되었나.”
송금백의 눈이 빛났다.
“참으로 궁금하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파 무림의 절대자조차 소림이 왜 그런 행보를 보이는지 모르고 있다. 그만큼 소림의 정보 통제 능력이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황곤이 고개를 저었다.
“소림은 결코 서 소교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예?”
황곤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지금 이 시국에 서 소교를 건드리면 천하가 요동칠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제아무리 흉포한 군왕도 적국의 사신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소림이라고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테지요.”
“서 소교는 소림의 현판을 부수겠다며 그곳으로 향했네. 사신 따위가 아니야.”
“설령 소림이 서 소교를 증오한다 한들, 현재 강호의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지금껏 소림은 그들이 먼저 나서서 적을 공격한 역사가 없습니다. 평화와 안정을 위하는 그들이 천하를 혼란케 할 리가 없잖습니까.”
“정파 놈들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킨다는 논리로 온갖 흉악한 일도 정당화시켰어. 소림이야 다르긴 다르겠다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황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이 서량을 건드릴 확률은 지극히 낮다. 하지만 송금백처럼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 좋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송금백이 이내 피식 웃었다.
“뭐, 다른 걸 떠나서 명성 때문에라도 그러긴 쉽지 않겠지.”
“그렇습니다. 서 소교는 지금껏…….”
“아니, 서 소교 말고.”
“예?”
“막말로 일단 죽여 놓고 여론을 조작하면 그만 아닌가. 내가 말하는 명성의 대상은 서 소교가 아닌 소림일세.”
“소림이라니요?”
“소림이 강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면 또 모르지. 하나 소림은 정파 무림이 썩어들어 가는 걸 여태 방관했어. 이런 상황에서 서 소교를 죽인다?”
“…….”
“소림은 앞으로 다시는 정파의 태양으로 활동하지 못할 걸세.”
황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일세.”
차로 목을 축인 송금백의 얼굴에 미약한 긴장이 묻어 나왔다.
“우리가 서 소교를 도운 것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원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그때부턴 우리도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지지.”
“물론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송곳니를 드러낼 상황이 언제, 어떤 식으로 조성되느냐인데…….”
“금방입니다.”
“음?”
황곤이 미소를 지었다.
“금방일 겁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나?”
“성주님 말마따나 서 소교가 소림에서 죽든 아니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든, 그때가 바로 승부처입니다.”
“승부처라……?”
“예,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황곤 역시 차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천하가 긴장에 젖어 있습니다. 그 긴장이 폭발하든 완화되든, 무조건 빈틈이 생길 겁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는 바로 그때다?”
“그렇습니다.”
“하면 어떻게 움직였으면 하나?”
“팽가(彭家).”
송금백의 눈이 빛났다.
“팽가라…….”
“의천맹은 현재 팽가를 두둔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팽가 역시 봉문은 했지만, 그게 형식에 불과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고 있지요.”
“그래도 오대세가일세. 위험하지 않겠는가?”
“위험합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팽가를 잡아먹으면 저희는 하북(河北)을 손에 넣을 수 있지요.”
황곤의 눈이 빛났다.
“하북과 산동은 지척. 팽가를 쳐서 하북을 점령하면, 이후 산동 점령도 쉬워집니다. 하남의 소림은 나서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결국 저희가 중원 동부 전부를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된다면…….”
송금백의 눈빛이 광포하게 이글거렸다.
“아주 신속하게 움직여야겠군.”
“그렇습니다. 서 소교가 솥을 달궈 주었으니, 이제 우리는 재료만 넣으면 됩니다.”
송금백이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묻어 나왔다.
‘드디어인가?’
그간 중원의 정세를 살피면서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기회가 온 적은 없었다. 철혈성은 애초에 사파인지라, 먼저 나서서 일을 벌이면 큰 부담을 안고 가게 된다.
그래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찰나, 신교의 소교주가 물꼬를 터 준 것이다.
‘천하일통이라…… 아직 막연하긴 하지만.’
우두둑.
송금백의 악력에 팔걸이가 으스러졌다.
‘막연한 꿈이라도 일보(一步)를 딛는 것과 시도도 안 해 보는 것은 큰 차이겠지.’
그의 나이가 환갑이 넘었다.
무인으로서의 기량은 끊임없이 늘고 있지만, 언제 정체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인생을 걸어 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재미있어지겠군.’
그때였다.
“급보입니다!”
대전 밖에서 울리는 목소리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냐?”
“현재 남쪽에서 일단의 병력이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병력? 북상?”
“예! 그리고…….”
“그리고?”
“정보원의 분석 결과, 병력이 출발한 곳은 십만대산(十萬大山)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순간 황곤이 벌떡 일어났다.
송금백의 눈이 깊어졌다.
“……마교.”
* * *
“대비를 해야 하네.”
“예?”
담사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혈성 말일세.”
청성 장문인, 우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철혈성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네. 하지만 현재 정국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지는 않네.”
“허어…….”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은 생각지 못했네.”
“예? 하면 천지각의 분석이었습니까?”
“공야치.”
“…….”
“공야치가 그러더군. 철혈성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소림이 어떻게 움직이든, 산문이 열리는 순간 철혈성이 움직일 거라고 예측하였네.”
우이한의 얼굴에 옅은 불만이 떠올랐다.
“감히 간언 드립니다. 공야치 그 작자의 말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는 마십시오.”
“음? 허허, 질투하는 겐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하오문의 소문주 따위는 자신과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만 그자는 명백히 적이었습니다. 용두방주가 죽은 것도 전부 그놈 때문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
“애초에 맹주님을 찾아온 것 자체에 불순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맹주님께서 그놈을 믿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믿지 않네.”
담사영이 차를 홀짝였다.
“자네와는 다른 이유지만, 나는 공야치를 믿지 않네.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하면…….”
“하지만 놈의 능력은 믿네. 아닌 말로, 자네에게 하오문 만한 정보단이 있다고 치세. 자네는 감히 본맹과 한판 싸움을 벌여 볼 수 있었겠나?”
우이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절대 의천맹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야치는 시도했고, 정말이지 정보가 얼마나 무서운 힘인지를 똑똑히 증명했다.
‘천한 놈이지만, 능력은 있다는 것이지.’
우이한이 고개를 저었다.
“똑똑한 놈인 건 알겠습니다만, 그것은 운이었습니다. 마교의 소교주가 없었다면 결코 이런 결과를 낼 수 없었을 겁니다.”
“자네 같았으면, 마교의 소교주와 동맹을 맺고 본맹과 싸울 수 있었겠나? 말 그대로 하오문의 명운이 달린 일이거늘.”
“결코 그러지 않았겠지요.”
우이한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누가 강한지, 부딪쳐도 될 만한 상대인지 아닌지를 파악할 눈 정도는 있습니다.”
담사영이 마주 웃었다.
“맞네. 그게 자네의 장점이지. 하지만 공야치는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면서도 제 능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말이야.”
“…….”
“출신 따위는 중요치 않네. 중요한 것은 능력과 배포지. 그래서 난 녀석을 기용했네.”
우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저 맹주님을 믿을 뿐입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네.”
“그렇다면, 일단 철혈성의 움직임을 잘 들여다보고 있어야겠군요.”
“그렇다네. 하지만 그 부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미 하오문의 정보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담사영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할 때는 그리 귀찮았던 놈들이, 아군이 되니 이리도 든든하군.”
“하하.”
어찌 되었든 담사영에게 힘이 된다면 우이한에게도 좋을 일이다. 우이한은 사심 없이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와중이었다.
“맹주님! 급보입니다!”
우이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신가?”
구파 장문인이며, 의천맹 소속이기도 하지만 결코 상관은 아니다. 우이한의 이러한 태도는 천지각주로선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지각주는 그럴 새가 없었다.
“하오문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 남부에서 마교도로 추정되는 병력 삼백이 무서운 속도로 북상 중이라고 합니다!”
“뭐, 뭐라?!”
우이한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담사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목적지는?”
“불명입니다! 다만 관도와 숲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일직선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남으로 향할 확률이 칠 할 이상이라고 합니다!”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림인가?”
우이한이 다급히 되물었다.
“맹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일단은…….”
그때, 또 다른 보고가 날아들었다.
“맹주님! 현재 북상하는 마교도들이 백상문(白霜門)을 밀어 버렸다고 합니다!”
“……뭣이?”
그 순간에는 담사영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상문을 밀었다고? 멸문시켰다는 뜻이냐?”
“아직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보여집니다!”
“허!”
“그리고…….”
“그리고?”
천지각의 무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북상 중인 병력에, 마존급 고수가 끼어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