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322화 (322/774)

322화. 천지개벽(天地開闢) (4)

“후우.”

내뱉는 숨결에 허연 김이 묻어 나왔다.

“산중의 바람은 유독 차갑고 독한 법이라지.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말 겨울이 오긴 왔구나.”

산을 오르는 도사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경사가 꽤 가파른데도 보행은 안정적이고 호흡 역시 일정했다. 도사가 느끼는 피로가, 적어도 산행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스스스.

짙은 안개가 도사의 시야를 막았다.

도사가 한숨을 쉬었다.

“신비롭고 서기(瑞氣) 그득하던 안개가 오늘따라 음산해 보이는구나. 저 속세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자조 섞인 말을 뱉으며 걷는 도사.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음?”

안개 가득한 봉우리 정상에 오른 도사는 깜짝 놀랐다.

“사형?!”

“오셨는가?”

“날이 춥습니다. 어찌 나와 계시는지요?”

도사가 자신을 맞이한 노인의 곁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평상에 앉은 노인의 체격은 상당했다. 족히 칠순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골격만큼은 홍안의 젊은이 못지않았다. 다만 낯빛이 퍼렇고, 도포에 가려진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보아 몹쓸 병이라도 걸린 듯했다.

그러나 그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도 한 줄기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만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동풍(凍風)이 어디 암묘(巖廟)라고 비켜난다던가? 안이든 밖이든 똑같네.”

“제가 불을 때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괜찮네.”

“사형.”

노인이 껄껄껄 웃었다.

“아직 도(道)의 끝자락도 밟아 보지 못한 나는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네. 내 몸이 위험할 것 같았으면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게야. 사제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도사가 한숨을 쉬었다.

사형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게 편했다.

“사형 고집을 제가 어찌 꺾겠습니까. 하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열흘 치 약을 구해 왔으니 그것을 달일 동안 예서…….”

“괜찮네.”

“예?”

“더는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아.”

“사, 사형!”

이번만큼은 도사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 상하십니다!”

“허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약을 달여 오겠습니다.”

“이보게, 사제.”

“예.”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나도 내 목숨이 아깝네. 하물며 도력(道力) 높은 선사들께서 일구어 온 선산(仙山)에 음산한 그림자가 가실 줄 모르고 있거늘, 내 어찌 목숨을 사사로이 여기겠는가.”

노인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병색 완연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에도 웃음이 섞였다.

천성이 유쾌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죽는 그 순간에도 한 줄기 미소를 머금고 허허롭게 떠나리라.

“그러니 더더욱 약을 드셔야지요. 사형께서 잘못되신다면 저희는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지금도 사질들을 막기가 힘든 것을요.”

“다만 내가 약을 그만 먹겠다는 것은 내 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네.”

“하면요?”

노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욱한 안개 너머, 옅게 흩어진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아른거렸다. 태양이었다.

“참으로…….”

노인의 눈빛이 일렁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아닌가. 도사에게 돈과 권력이 무슨 필요가 있나. 공명심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산수(山水)로 마른 목을 축이고,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면 그뿐일세. 그저 도(道)에 한 몸 싣기만 하면, 나를 던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거늘.”

“…….”

“강도가 들었다고 하여, 강도를 막아 주지 못한 포쾌를 욕할 수는 없다고들 하지. 잘못은 강도에게 있을 뿐, 제때 막아 주지 못했다 하여 포쾌를 증오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

“사형.”

“하지만 말일세. 우리는 다르다네.”

미소 가득한 노인의 얼굴 위로 한 줄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질들은 분명 우리를 보고 컸다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아닌 세상을 보며 성장하더군. 이쪽으로 가든 저쪽으로 가든 결국 도(道)에 이를 것이라 여기며 그들을 살피지 못한 우리의 잘못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라네.”

“……그렇지요.”

“나아가 우리는 또 하나의 큰 잘못을 저질렀다네.”

“예?”

“우유부단했네.”

도사의 눈이 흔들렸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언젠가 바다에 도달하기 마련이네. 하지만 생각해 보게. 그 말을 잘못 해석하면, 어차피 삶은 유한하니 멋대로 살라는 말도 될 수 있잖은가?”

“사형, 그것은…….”

“도를 좇든 불심을 좇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하네.”

“…….”

“우리는 그것을 못 했어. 아니, 안 한 거지. 어쩌면 나는 만인의 칭송을 받아 오며, 나 자신의 재능에 취해 있던 건지도 모르겠네.”

노인이 탄식했다.

“나 역시 도사 자격이 없기론 누구 못지않거늘.”

“사형, 사형은 본산의 큰 어른이자 누구보다 도사다운 도사입니다.”

“자네는 그리 말할 수 있네. 그러나 사질들에게 나는, 눈에만 보일 뿐 잡을 수도, 좇을 수도 없는 허깨비와 같았어. 결국 나의 무관심과 오만이 지금의 무당(武當)을 만든 것일세.”

도사는 안타까웠다.

사형은 무당의 변질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 말하고 있었다. 산의 큰 어른으로서 마땅히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잘못이 사형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도 크고, 사질들의 잘못도 크다.

결국 무당이 이리된 것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닌 모두의 잘못인 것이다.

“그러나.”

미소가 사라지고 탄식만이 가득했던 노인의 얼굴 위로 한 줄기 당당함이 깃들었다.

“더는 내 책임과 잘못에 등 돌리지 않겠네.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라 하여 애써 고개 돌리지 않을 걸세.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하여 손 놓고 주시하고만 있진 않을 거란 말일세.”

“…….”

“사질들을 위해서, 무당을 위해서, 그리고 무당을 보며 삶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이들을 위해서, 나는 다시 한번 힘차게 검을 뽑아 볼 것이네.”

도사가 미소를 지었다.

“사형의 뜻이 그와 같다면, 저 역시 한몫을 하겠습니다.”

“허허.”

“일단 들어가시지요. 약을 달여 오겠습니다. 꼭 드셔야 합니다.”

“약은 더 필요치 않네.”

“어찌 그리 고집을 피우십니까?”

“고집이 아닐세. 진정 약이 필요치 않아서 하는 말이야.”

“……예?”

노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봉합한 상처엔 바늘과 실을 가져다 대 봤자 괜한 상처만 더 생길 뿐이라네.”

도사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때였다.

사아아아.

안개 가득한 산 밑에서 심상치 않은 기도가 전해져 왔다.

풍성한 안개가 좌우로 슬슬 갈라지는 듯했다. 도사는 깜짝 놀랐다.

‘이 기(氣)는?!’

무서운 기파였다.

너무나도 상이한 성질의 두 기(氣)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굉장한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뜻밖이지만 친숙한 불기(佛氣)였다. 자비로 세상을 뒤덮을 만큼 풍성하고 안온한, 그러면서도 강단 넘치는 금강(金剛)의 기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기?!”

츠츠츠츠.

마침내, 안개가 걷혔다.

이내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이들은 누가 더 강하고 신비로운지 증명이라도 하는 듯, 종전보다 훨씬 풍성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마에 찍힌 계인(契印), 선종(禪宗) 이조 혜가(慧可)를 기리고자 만들어졌다는 독비반장(獨臂半掌)의 예(禮).

너무나도 친숙한 인사법이었다. 도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소림의 승려가 어찌……?”

아니, 소림도 소림이지만.

후욱.

고개를 돌리니, 그 순간 일대의 공기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굉장하구나!’

전 세대 무당파의 칠성검수(七星劍手)로 이름을 날렸던 초절정고수, 현극과 마주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기운.

쏟아져 들어오는 기압이 굉장했다. 파멸적인 압박감을 자랑하는 무시무시한 마인이었다.

‘장문사질에 비해 전혀 모자람이 없다! 이런 마인이 어디서 갑자기?!’

현극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질 때.

“오셨는가.”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중년의 마인, 고구가 고개를 숙였다.

“노선배를 뵙습니다. 신교의 형법당을 맡고 있는 고 아무개라 합니다.”

깍듯한 인사였다. 긴장으로 물들었던 현극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노인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당산의 선기(仙氣)가 자네를 많이 불편케 했을 것이네. 올라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괜찮습니다.”

고구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한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엇을?”

“갑자기 마인이 왔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 따로 서신을 받으셨습니까?”

“받지 못했네.”

고구는 물론 현극과 정각도 깜짝 놀랐다.

노인이 크게 웃었다.

“나이를 먹으면 근골이 쇠하고 고집이 강해진다네. 참으로 슬픈 일이지. 그러나 그만큼 얻는 것도 많다네.”

그가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맑은 두 눈에 깃든 현기(玄機)는 가히 측량키 어려운 깊이를 머금고 있음이라, 세상 무엇이라도 꿰뚫어 보는 반선(半仙)의 신안(神眼)이 무당산의 안개를 관통하여 숭산까지 닿았다.

“산에 이는 공기는 탁해졌으되, 시뻘건 불꽃과 푸른 전광을 담은 누군가가 이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음을 알았네.”

“……!”

“그리고 깨달았지. 청홍(靑紅)으로 물든 그 눈빛은 일찍이 본 적이 드문 마안(魔眼)이었으나, 그 안에 깃든 강렬한 열정과 뜻밖의 불심(佛心)이 무당을 향하고 있음을.”

노인이 고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구는 감히 그 눈빛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적송 그 친구 역시 불을 뿜고 뇌전을 흩뿌리는 괴물과 만나 봤겠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랬을 거라 생각하네. 도기와 불기는 한 끗 차이라, 너무도 유사하기에 오히려 상대를 보기가 어렵네. 하지만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숭산에 마군(魔君)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두고 볼 사람은 없었을 것이야.”

“대단하십니다.”

고구는 사심 없이 감탄했고, 나아가 감동했다.

그가 보는 노인은 적송 못지않은 전설이었다. 권신 적송이 속세를 떠돌며 악을 벌하고 교화했다면, 이 사람은 따스한 마음과 천리(天理)를 꿰뚫어 보는 눈으로 민중을 평안케 한 자였다.

그러한 두 무신(武神)이 있어 세상을 바로잡으니, 사람들은 둘을 정무쌍신이라 부르며 공경을 마지않았다.

전 세대 강호의 전설을 만든 무적자 중 한 명.

절대마신 이천상보다도 반 배분이 높은 무림 최고령이자, 검(劍)으로 도(道)의 영역까지 도달했다는 명실공히 무림 최강의 검객.

원무검신(元武劍神) 현천진인의 능력은 그처럼 신비롭고 놀라웠다.

고구가 포권을 취했다.

“긴말 않겠습니다. 무당을 잠식하고 있는 독을 뽑아내기 위해, 소교주님을 대신하여 찾아왔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현천진인이 맑게 웃었다.

“그리고 고맙네.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저는 그저 심부름꾼일 뿐, 훗날 소교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감사를 전하시지요.”

“그래, 꼭 그리하지.”

고구가 웃으며 말했다.

“혈고에 중독된 어르신들을 이곳으로 모아 주십시오. 시간이 제법 걸릴 것입니다.”

* * *

“어?”

“무슨 일이지?”

“…….”

“이보게, 천호?”

“예? 아, 아닙니다.”

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봤나? 분명 꽃들이 잠깐이나마 색을 잃었던 것 같은데?’

오색, 칠색 등 자연적으로 나기 힘든 색을 뽐내는 꽃잎들.

혈고의 모체(母體)가 쉬고 있는 지화(祉花)들이 차가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맹주님께서 부르시네. 어서 가세.”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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