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천지개벽(天地開闢) (5)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현재 마교도로 추정되는 삼백 병력이 호북 밑까지 치고 들어왔습니다! 백상문을 시작으로 두 곳의 문파가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파들은…….”
담사영의 눈이 차가워졌다.
“혹, 중소 연합인가?”
“……그렇습니다.”
담사영이 말하는 중소 연합이란, 예전부터 그에게 충성을 바쳤던 중소 문파들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었다. 각 지역에 분포해 있는 그들은 담사영의 명령을 충실이 따르며 부를 축적했다.
세 문파의 멸문.
중소 연합에 가입한 문파의 수는 무려 일백을 헤아린다. 그중 세 문파가 멸문했다면, 놀랄 일은 될 수 있어도 그리 큰 타격이 되진 않는다.
문제는 그들의 의도였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마 북상 중에 또 다른 중소 연합의 문파를 공격할 확률이 높습니다!”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너무 느닷없는 진군이었다.
그것도 삼천이 아니라 삼백이었다. 무림의 전쟁은 숫자보다 고수의 유무가 승패를 가르는 주요소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삼백은 너무 적었다.
‘아무리 마존급 고수가 끼어 있다 해도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담사영이 물었다.
“공야치에게서는 따로 연락 온 것이 없는가?”
“아직은 없습니다.”
“그렇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담사영이 말했다.
“천지각의 비상망을 천자지급(天字至急)으로 올려 두게.”
천지각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자지급은 전쟁이 터지지 않고서야 울린 적이 없던 비상망이었다. 즉 맹주님은 지금 상황을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비상망을 남쪽을 제외한 동, 서, 북, 세 곳으로 퍼트리게.”
“예?!”
천지각주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마교도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네.”
담사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삼백이란 숫자는 적어. 하지만 행위 자체는 명백한 도발이다. 저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자신들의 행위가 전쟁을 벌이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면, 정말 전쟁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
“전쟁은 가장 폭력적인 정치야. 각자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도 결판이 나지 않을 때, 정말로 뒤가 없을 때 터지는 게야. 하물며 철혈성이 건재한 지금, 마교가 실제 전쟁을 일으킬 확률은 거의 없다시피 하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문제는 의도일세. 진짜 전쟁을 벌이려는 것이든, 다른 목적이 있든 삼백 마교도의 북상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 두기 위함이 아닐까 싶네.”
천지각주가 탄성을 질렀다.
“그래서 남쪽을 제외한 삼방(三方)을…….”
“그렇다네.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북상 중이라면 모르겠지만, 놈들은 중소 연합 중 몇 곳을 밀어 버리면서 전진 중일세. 하물며 그곳에 마존급 고수도 끼었다고 하지 않나?”
“시선을 잡아 두기에 충분하군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저들에게 집중할 필요가 없다네. 물론 어떻게 튈지 모르니 계속 주시는 해야겠지만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현 시간부로 천지각의 비상령을 천자지급으로 올린 후, 삼방을 주시하겠습니다.”
“그리하게. 그리고 그 전에.”
“예?”
“눈은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그렇다고 놈들의 행위가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잖나?”
“……?”
“광혼(狂魂)을 보내게.”
“무, 무상(武相)을 말입니까?”
“저쪽에 마존급 고수가 있다면, 이쪽에서도 최소한 그에 어울릴 만한 고수는 보내 줘야지. 구파에 손을 빌리는 것보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고수를 파견하는 게 훨씬 빠르고 확실하다네.”
“그렇군요.”
“사신단(四神團)의 가용 병력 전부를 붙여 줘. 가서 제대로 박살 내라 전하게.”
“알겠습니다!”
천지각주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담사영의 눈썹이 와락 찌푸려졌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의천맹의 눈이 중원 전역을 향하고 있더라도.
철혈성의 정보력이 의천맹에 밀리지 않더라도 그들은 알기 힘든 사실 하나.
서량은 무공 외에도 생존에 특화가 된 지략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전생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원이 요동치고 있었다.
* * *
“흐음.”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얼씨구? 네놈 말투가 제법 고분고분해졌구나?”
“의외입니까?”
“의외지. 기억 안 나느냐? 처음 만났을 때 네놈이 지껄였던 말투가 얼마나 요망했는지?”
“당장 칼을 뽑을지 말지도 확신이 안 서는 적에게 예의 차릴 이유가 있습니까?”
“하면? 지금은 적이 아닌 것 같으냐?”
“그렇습니다.”
“클클, 확실히 네 녀석은 재미가 있다.”
산사에 부는 바람은 겨울의 차가움을 담고 있었지만, 묘한 상쾌함도 머금고 있었다.
적송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떠냐? 이곳에서 맞는 바람이.”
“좋군요. 평화롭습니다.”
“향내도 좋지?”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요.”
“사찰의 향과 바람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느니라. 네놈은 때려죽여도 부처를 모실 놈이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마음에 깃든 얼룩을 벗겨 냈으면 싶다.”
“연꽃은 더러운 물에서 핀다고 하지 않습니까?”
“푸헐!”
“얼룩진 마음도 내 것이고, 자신만만한 것도 나의 다른 모습입니다. 적당히 얼룩진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겠지. 이제 보니, 네놈은 절간보다 도관이 더 맞는 모양이다. 현천 그 호랑말코가 널 보면 아주 좋아라 하겠어.”
“저야 영광이지요.”
“얼씨구? 나를 봤을 때는 그리 생각 안 했던 게야?”
“긴장만 해도 모자랄 판에 영광은 무슨 영광입니까? 막말로 그때 붙었으면 제 목숨은 성치 못했을 겁니다. 아, 대사님 성격상 살수를 휘두르진 못했겠군요. 어쩌면 제가 이길 수도 있었겠습니다.”
적송이 피식 웃었다.
“어째 말하는 게 제 사부랑 똑같구나. 괴물이 괴물을 낳았구먼.”
서량 역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소림은 소림이라, 천지를 뒤덮는 광대한 불심과 자비는 서량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여유로움 속에 항상 날 선 칼을 뽑아 들고 있었던 서량의 얼굴이 지금은 무척 평화롭게 보였다.
“보기 좋구나. 어쩌면 네놈에게 절간 밥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떠냐? 신교에서 나와 본사로 들어올 테냐?”
“싫습니다.”
“왜? 배분이 문제라면 내가 힘써 주마. 적어도 방장과 동배분 정도로는 맞춰 줄 수 있다.”
“농담 끝나셨습니까?”
“에잉, 망할 놈. 나이도 먹을 만치 먹은 사람이 자존심 굽히고 제안을 했으면 최소한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나이 먹은 불제자라 자존심 같은 거 없다고 말씀하신 게 벌써 사십 일 전입니다.”
“네놈은 무공을 못 익혔어도 어디서든 한자리 꿰찼을 거다. 그놈의 혓바닥이 아주 날카롭구나. 기억력도 좋고.”
적송이 평상에 앉았다.
무릎을 토닥이며 아픈 늙은이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준비는 다 끝났느냐?”
“예. 이제 본교에서 보낸 사람만 도착하면 됩니다.”
적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간 네가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하면, 분명 혈고의 해독법에 강한 확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이거늘, 어찌 또다시 확인이 필요하단 말이냐?”
서량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 멀리 북동쪽에서부터 다가오는 먹구름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연 것은 일각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굳이 따지자면, 혈고는 생물입니다.”
“음?”
“특히나 혈고와 같은 기생 생물의 경우,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이(變異)될 수 있지요.”
적송의 얼굴에 심각한 기색이 깃들었다.
“네가 해독했을 때의 혈고와 지금의 혈고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전에 대사께서 말씀하셨지요? 진맥을 한 의원들도 혈고에 중독되었다고?”
“그랬지.”
“그것은 맹주 놈이 의원들까지 중독시킨 게 아닙니다.”
“뭐라?!”
적송은 깜짝 놀랐다.
“하면?”
“혈고의 알이 의원들의 몸으로 들어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뭣이?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냐?”
“예.”
적송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람을 혈고로 중독시킬 때, 모체(母體)인 자고(雌蠱)는 따로 두고 수컷인 웅고(雄蠱)를 쓴다고 들었다. 한데 수컷인 웅고가 어찌 알을 낳는단 말이냐?”
“어떠한 생물들은 동성만 남았을 때, 어느 한 개체가 성적 변이를 일으켜서 개체의 생존을 도모한다고 합니다. 그런 생물들은, 말하자면 애초에 자웅(雌雄) 어디로든 변할 수 있도록 몸이 설계된 셈입니다. 성적 동체(同體)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면 스스로 성(性)을 바꾸어 알을 낳았단 말이냐?”
“암탉이 수컷 없이도 알을 낳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만큼, 체외 접촉으로 중독된 사람들의 증상은 본래 중독자보다 약하겠지요.”
“허!”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대사님의 무공은 중원 천하, 무적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의원들을 중독시킨다? 그것도 소림에서?”
“…….”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래서 더 자세히 살펴보았고, 실제로 진맥도 해 봤습니다.”
“해서, 알이 네 몸으로 들어오려 하더냐?”
서량이 손을 들어 올렸다.
“혈고의 알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어지간히 민감한 사람도 알이 파고드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지요. 그래서 마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적송은 안력을 키워 서량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 검지 끝 부근이 유독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 은밀함과 신속함은, 극마 혹은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더군요.”
“그랬구나.”
“맹주가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놈은, 소림과 무당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려 작정한 것입니다. 의원이든 술사든, 건드리는 순간 혈고에 중독되도록.”
적송은 새삼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실로 무서운 사람이로고.”
차라리 적대 문파를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쓸어 버리는 마인들이 군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담사영의 악랄함에 적송은 치를 떨었다.
“잠깐. 내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혈고의 경우, 웅고가 죽으면 모체인 자고 역시 그 기색을 읽을 수 있다고 들었다만.”
“그렇습니다.”
적송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하면 이쪽에서 혈고를 해독했다는 것을 담 맹주 쪽에서도 즉시 알 수 있다는 것이로구나.”
“물론입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즉, 소림의 중진들은 혈고를 해독한 즉시 움직여야 합니다. 실제 전력을 운용하든 여론전을 펼치든, 맹주가 과감한 공세를 펼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적송은 탄식했다.
“참으로 무서운 싸움이다. 담 맹주는 어찌 그런 괴물이 되었을꼬?”
“사찰에서도, 도관에서도 살인마는 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요.”
적송이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무적의 무공으로 명성을 떨친 그였지만, 이런 과격하고 악랄한 싸움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진실로 담사영이란 사람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돈을 걸었고, 패도 던졌습니다. 이제는 패를 까는 일만 남았습니다. 대사께서도 슬슬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반나절 후.
숭산의 샛길을 타고 오른 일단의 무리가 소림에 도착했다.
“군림성교(君臨聖敎)! 천마불사(天魔不死)! 신교의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고생들 했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방령, 그 요악한 년의 정신부터 깨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