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천지개벽(天地開闢) (6)
“맹주님!”
“무슨 일인가?”
“공야 소문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이리로.”
천지각주에게서 서신을 받아 든 담사영이 조금은 다급한 손길로 그것을 열어 보았다.
이내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마교도가 소림으로……?”
“그렇습니다!”
천마신교의 마인 중 열 명도 되지 않는 소수의 인원이 아무도 모르게 숭산으로 진입했단다.
천지각주가 다소 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마교가 공세를 펼친 것은 소림을 치기 위함인 듯합니다. 소교주가 소림에서 행방이 묘연해졌으니 애가 닳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음…….”
“사실 마교 입장에서는 비상사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쩌면 북상 중인 병력은 우리에게 경고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경고라니? 어떤?”
“만일 소교주가 죽었다면 소림을 시작으로 전쟁을 펼칠 것이다, 라는.”
“…….”
“말하자면 경고이자, 위협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게 옳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이치에 합당하다.
하지만 담사영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가 의천맹을 삼키면서 키워 간 정쟁의 감이었다.
‘각주의 말이 맞다. 놈들 입장에서는 차후 마도를 지배할 왕자가 실종된 상황이 아닌가?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무력 도발은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겠지.’
그럼 뭘까?
뭐가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무엇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는 걸까?
대체 소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
“숭산으로 향한 마교도들의 무공은 강하겠지?”
“예?”
“자네 말마따나 놈들이 경고를 함과 동시에 시선을 잡아 둘 생각이었다면, 그리고 실제로 소수의 인원이 숭산으로 향했다면 필경 굉장한 고수들을 보냈을 걸세.”
“아, 그렇겠지요.”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인원으로 소림을 뒤집겠다? 그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네. 설령 그 열 명도 안 되는 인원들이 모두 구대마존이라 해도 어려울 걸세.”
그것이 바로 천년 소림의 힘이었다. 그 역시 소림의 저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기 때문에 가장 먼저 그들을 고립시킨 것 아니었나.
“그러니 최소한 구대마존, 혹은 그 이상의 고수들을 보냈어야 옳네.”
“그렇습니다.”
“한데 이 서신을 보면, 그 열 명도 안 되는 이들의 무력 추정치가 적혀 있지 않군. 공야치라면 이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않을 텐데.”
천지각주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담사영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함정? 아니면 실수? 뭐든 간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는군.’
그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 밖에서 천지각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하오문에서 따로 서신이 왔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빛났다.
“가져오게.”
잠시 후, 서신을 읽은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실수가 아니었군.’
천지각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내용의……?”
“화급을 다투는 상황이라 일단 사실 적시만 해 놓은 모양일세. 상세 내용은 바로 여기에 적혀 있어.”
천지각주가 담사영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천지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야치의 일 처리가 확실히 나쁘지 않습니다.”
“기대를 충족시키는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야.”
담사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열 명도 안 되는 병력, 그것도 절대고수가 속해 있지 않은 병력을 보냈다? 이게 무슨 의미인 것 같은가?”
“음…….”
“소림을 전복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닌 건 확실하네.”
천지각주는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놈들은 무슨 의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맹주님. 이왕지사 이리된 바에야, 차라리 소림으로 병력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병력을?”
“예. 물론 소림을 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림 안에 숨어든 마교도들을 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야겠지요. 이런저런 것들도 확인할 겸, 잠시 소림을 감시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지금 소림과 가장 가까이 있는 구파 병력은 어디지?”
“청성(靑城)입니다. 우 장문인이 가장 가까이서 대기 중입니다. 지닌 병력도 만만치 않고요.”
“우 장문인이라면 믿을 만하지.”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보내게. 소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명을 받듭니다.”
“철혈성과 마교 쪽에도 신경을 써야 하네. 특히 동북방 쪽을 주시해야 할 것이야.”
“예!”
천지각주가 나간 후, 담사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렇게 막막한 판은 재미가 없거늘.”
* * *
“이런 결과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엉뚱하게도 이와 같은 광경을 상상해 본 적은 있습니다.”
“무슨?”
“수백 년 동안 싸워 온 적이지만, 언젠가는 적이 본사에서 방장과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
“그리고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지요.”
“방장 말마따나 이런 결과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겠지.”
“그렇습니다. 부처를 모시는 몸으로 이런 흉언을 뱉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만, 우리가 서로의 영역에서 마주하게 될 때는 필경 둘 중 하나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상황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지요.”
“가만히 놔뒀으면 멸망까진 아니더라도 절단은 났을 것 같소.”
“그렇지요. 그래서 놀랍고, 더 감사합니다.”
서량은 피식 웃었다.
담담하게 미소를 띠며 말하는 노승의 얼굴은 무척이나 피폐해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병이 심해 보이거나, 기운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실례되는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소?”
“얼마든지 여쭈십시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오?”
“어찌 그것이 궁금하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내년이면 환갑이 되지요.”
역시 비슷한 연배였군.
만일 죽어서 전생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소림 방장과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다.
“다행이오.”
“무엇이 말입니까?”
“명색이 소림 방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 갑자도 못 살아 보고 열반에 들었다면 주변에서 얼마나 찬양을 했겠소? 백 년 넘도록 살아서 열반 따위는 없음을 만인에게 알려 주시오. 그래야 이쪽이 편하지.”
“허허허!”
농담도 이런 과격한 농담이 있나 싶지만, 혜심(慧心)은 웃고야 말았다.
만약 저 말이 진심이었다면, 신교의 소교주가 자신을 치료해 줬을 리 없다. 아닌 말로 꼭 소림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로잡을 방법은 찾아보면 반드시 나왔을 것이다.
물론 서 소교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을 찾은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고마움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추후, 치료가 끝난 이들이 모여 감사 인사를 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방장으로서 먼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혜심이 고개를 숙이며 반장했다.
“소림 전체를 대표하여 은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척이나 깍듯한 모습이었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투부터 분위기까지, 예의가 아예 몸에 밴 사람이 분명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적송대사께 들으셨소?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들었습니다.”
“그럼 됐소.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소.”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도둑을 잡아 주었다면, 도둑을 당한 사람으로선 감사를 드려야 함이 도리에 맞습니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할 말 없게 만드는군.’
그 역시 과거 소림에 들른 적이 있었다.
뿐인가? 소림 최대의 비지(飛地)라는 장경각에도 든 적이 있었다. 몰래 침투한 것이 아니라 의천령(義天令)이 발동된 상황에서 당당히 출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방장을 본 적은 없었다. 전대 나한당주와 몇몇 고수들만 봤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당시의 서량은 그들 모두에게서 비슷한 인상을 받았었고, 그것은 적송과 혜심도 마찬가지였다.
‘선하다. 그리고 강해.’
강한 사람이 착하기는 쉽지 않다. 착한 사람이 강하기도 쉽지 않다.
소림의 승려들은 달랐다. 제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선하고 강했다.
그것이 바로 소림이었다. 만인이 칭송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은인께 인사도 드릴 겸, 앞으로의 일도 상의할 겸 부득불 보자고 하였습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또 화끈하군.
“앞으로의 일이라…… 이미 대사께 들었다면 굳이 나와 대화할 필요가 없을 텐데?”
“꽃이 예쁜 것은 직접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할 줄도 아는구나.
어찌 되었든 서량에게도 나쁘지 않은 얘기였다. 아니, 어쩌면 서량에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바로 움직일 생각이시오?”
“그렇습니다.”
“화끈하시군.”
“그간 소림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추스른다는 명목하에 시간을 더 끌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좋소. 그럼 짧고 굵게, 최대한 간단하게 얘기를 해 봅시다.”
서량이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오?”
“진실 되게 움직일 것입니다.”
“혈고와 맹주에 관해?”
“그렇습니다.”
“방장께선 책임을 지겠다 하셨소. 그 책임은 어떤 식으로 지려 하시오?”
“강호에 터진 분란을 하나씩 해결할 생각입니다.”
“막연한 대답이군.”
“예, 그래서 강한 대답이지요. 이 몹쓸 땡중은 한계를 둘 생각이 없거든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의천맹을 잡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소림은 욕심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저 평화를 바랄 뿐입니다.”
돌려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이 소림이다. 중원의 평화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결의 넘치는 대답이었다.
“뭐가 되었든 그 사실부터 공표한다면, 앞으로 의천맹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중간에서 꽤 많은 사람이 희생될 수도 있을 거요.”
“……아미타불.”
나직이 불호를 뱉는 혜심.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최대한 희생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이자,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희와 싸울 것입니까?”
가만히 서량을 보던 혜심이 웃으며 말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 대답입니다.”
천마신교가 악한 짓을 하면, 언제고 소림이 나서서 그것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이길 것이다. 그러니 그러지 말라.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멋진 대답이었다. 서량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이거 무서워서 난장도 못 치겠소.”
“허허, 서 소교와 같은 인재가 그리 말씀하시니 진정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가 제법 있는 만큼, 혈고의 자고가 알아차리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오. 내일 정오가 지나면 그쪽에서도 알아차릴 확률이 높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더 쉬시길.”
“아미타불.”
그때였다.
“방장 사형!”
“무슨 일인가?”
“청성 장문인이 숭산 인근에 도달했다 합니다!”
서량이 혜심을 바라보았다.
혜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방금까지 보여 주던 예의와 선함은 온데간데없는 무색(無色)의 표정이었다.
“청성의 장문(掌門)을 어찌 함부로 모시겠는가. 팔대호원(八大護院)을 보내 예의를 다해 맞이하라 전하거라.”
* * *
이틀 뒤.
“매, 맹주님! 급보입니다!”
“…….”
“우 장문인이 보낸 서신에, 소림의 팔대호원이 길을 막았다는 내용이……!”
“알고 있네.”
“예?”
의아한 눈으로 담사영을 본 천지각주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담사영의 얼굴은 감히 마주 보기 힘들 정도로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화원의 중심, 삼십여 송이의 꽃들이 몽땅 시들어 있었다. 마치 중원의 지도처럼 생긴 화원 안에서 시든 꽃들이 피어 있는 자리는 바로 하남 인근이었다.
“이제야 알았네. 모든 것을 깨달았어. 서량 그놈, 참으로 음흉한 놈이었구먼.”
일그러진 얼굴 위로 또 한 겹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무섭도록 시리고 흉흉한 살소(殺笑)였다.
“중원 진출과 세력 확장이 아니라, 내 목을 노리기 위해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어. 오직 나 하나였던 게야.”
다급한 상황이라 조사가 필요한 부분은 일부러 누락했습니다. 용서를 구하며, 일각도 안 되어 드러난 사실이 있기에 추가로 서신을 보냅니다.
밝혀진 바로, 그들 중 대부분이 암행에 능하고 마기를 숨기는 데에 능한 고수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중 전력의 판도를 엎을 만한 절대고수는 속해 있지 않았으며, 최소 한둘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합니다.
보다 확실한 조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앞으로 이각 안에 추가된 정보를 보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