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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325화 (325/774)

325화. 천지개벽(天地開闢) (7)

숭산의 밤은 여느 산의 밤과는 달랐다.

기(氣)가 좋은 명산에는 불당과 도관,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 등이 유독 많기 마련이지만 이처럼 경건하고 고아한 곳은 드물 것이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무리와 맑은 달빛, 그 밑에서 흐르는 향내와 독경 소리는 숭산의 기(氣)를 한층 차분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소림의 사찰에서 나와 숭산의 봉우리 중 하나에 선 서량의 눈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을 닮아 있었다.

신교에서, 그리고 중원을 횡단했을 때도 그는 언제나 위풍당당했다. 장대한 체격과 완벽하게 다듬어진 몸, 극마에 올라 사위를 압도하는 기도로 만인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달랐다.

‘마치 호수 같다.’

불그스름한 먹구름 아래, 지진을 동반한 화산처럼 살벌하게 들끓던 기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마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즈넉한 평야 너머의 호수와 같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호수이되, 파랑(波浪)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차분하고, 깊었다.

그리고 그런 서량의 옆에 엎드려 달을 올려다보는 금호와, 제법 떨어진 거리에 앉아 고요히 서량을 바라보는 호왕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여상린이 서량에게로 걸어갔다.

“왔나?”

“네.”

“늦은 시간인데 자지 않고 왜 왔어?”

“잘 시간이라도 잠이 와야 자죠.”

“그건 그래.”

여상린이 서량을 힐끔거렸다.

“내일이죠?”

“뭐가?”

“소림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요.”

“아니, 소림은 이미 움직였어.”

“네?”

“각 속가 문파에 비밀리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무당에도.”

여상린의 눈이 빛났다.

“하긴 혈고를 해독했으니,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위는 없겠군요. 지금쯤이면 그쪽에서도 알아차렸을 테니까.”

“맞아.”

“그럼 소림이 직접 나서는 건요?”

“추이를 지켜봐야겠지. 물론, 길진 않을 거야. 청성의 장문인도 쫓아내 버린 판 아닌가. 구대문파라는 이름으로 엮인 울타리가 찢어졌으니, 중원에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

“그러네요.”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걸까?

여상린이 히죽 웃었다.

“정말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네요.”

“엉?”

“출교한 뒤로 별일이 다 있었잖아요. 많이 치고받기도 했고, 눈치 싸움도 있었고.”

“뭐, 그랬지.”

서량도 피식 웃었다.

“내 목적은 언제나 하나였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다만 그걸 이루는 과정에서 별의별 일이 다 터졌을 뿐이야.”

“그렇죠.”

“사실, 가끔은 혼란스러워.”

“뭐가요?”

달을 올려다보는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의천맹주를, 비요왕을 죽일 거다. 그리고 자유를 찾을 거야. 하지만…… 나와 연을 맺은 사람들도 많이 생겨 버렸잖아. 책임질 부분이라는 것도 있고.”

“…….”

“만약 홀몸이었다면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겠지. 아니, 못했겠지. 신교라는 든든한 세력이 날 받쳐 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니까.”

“아하? 언제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싶으신 거죠?”

“아니.”

서량의 얼굴에 묘한 씁쓸함이 깃들었다.

“뭐랄까…… 이런 삶도 나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런 삶이요?”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고, 쓸데없이 눈치도 봐야 하지만, 그래도 내 사람들이랑 손잡고 아옹다옹 살아가는 것 말이야.”

여상린이 미소를 지었다.

“소교주님답지 않으면서도, 엄청 소교주님답네요.”

“그러냐?”

“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교주님은 자기 사람 잘 챙길 줄 아는 분이니까요.”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챙길 줄 안다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지. 오지랖일 수도 있어.”

“그게 귀찮은 오지랖이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하.”

차분한 웃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이전보다 훨씬 유해진 듯한 인상이었다. 여상린은 과거와는 한참 달라져 버린 지금 서량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달려 나가실 거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래야지. 이미 굴러가고 있는 마차야. 그리고 조금 혼란스러울 뿐, 나 역시 그걸 원하니까.”

“그럼 됐어요. 받은 만큼 도와드릴 테니까 화려하게 날뛰어 보세요.”

“난 너한테 준 게 없는디?”

“원래 받은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죠.”

“그러냐.”

“그리고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우리 동맹 맺은 거 아시죠?”

“알지.”

“소교주님이 잘 돼야 우리도 잘 되는 거예요.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잘 되면, 북해에 한번 오세요. 오셔서 울 오라버니 기 좀 바짝 세워 주시라고요.”

서량이 크게 웃었다.

“인마, 잘 되든 못 되든 당연히 가야지. 뭐, 내가 간다고 얼마나 기를 세워 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여상린 역시 쿄쿄쿄 하는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 웃던 그녀가 일순 고개를 숙였다.

“소교주님.”

“응?”

“…….”

“왜 그래?”

고개를 푹 숙인 여상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달빛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가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짠!!”

여상린이 품에서 가죽으로 만든 수통을 꺼내 들었다.

서량이 눈을 크게 떴다.

“배때기가 두툼한 것이, 절밥 먹고 살 좀 쪘나 싶었더니만 그게 아니었군. 웬 수통을 숨겨 놓고 있었냐?”

“수통이라니요? 이건 술통입니다요!”

“수, 술통?”

일순 서량의 눈에 탐욕이 일렁였다.

“으음, 소림에서 술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침이라도 한 바가지 흘릴 기세였다. 적송과 술을 마신 뒤로는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종종 술이 당기던 차였다.

“잔은 없어요. 그냥 나눠 마셔야 해요.”

“나눠 마셔야 되냐?”

“인성 도둑맞으셨나요?”

“커험.”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모금씩 번갈아 가면서 술을 들이켰다.

여상린이 웃으며 말했다.

“여하간 내일부터 재미어지겠네요. 조금 살벌하기도 할 거고.”

“응?”

“소림하고 같이 움직여야 하잖아요. 이거 은근히 떨리네요. 중원제일이라는 소림과 함께 악랄한 의천맹주를 깨부수러 움직이다니! 완전히 영웅담 아니에요?”

깔깔깔 웃는 여상린을 보며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다.”

“네? 뭐가요?”

“내가 말이야…… 허! 나도 참 나군.”

“뭔데요?”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지, 이런 걸 항상 먼저 말해 줘야지 하다가도 또 잊고 있었네. 딱 이번까지만 봐줘라.”

“에?”

여상린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설마 저희한테 또 말 안 해 주신 거 있어요?”

“어…… 그렇긴 한데. 이거는 내가 욕을 좀 먹긴 먹어야 하는 부분이구만.”

“뭔데요. 빨랑 말해요.”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나는 소림이랑 같이 안 움직일 거거든.”

“……뭣이라고요?”

여상린의 눈이 툭 불거졌다.

“그럼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함과 기대감이 묘하게 섞인 웃음이었다.

“소림의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방령을 부른 거 기억하지?”

“네, 알죠.”

고개를 끄덕이던 여상린이 순간 입을 쩍 벌렸다.

“설마……?”

“그래.”

서량이 다시 달로 시선을 돌렸다.

미소 가득하던 그의 얼굴 위로 싸늘한 기운이 뒤덮였다.

“분위기 잘 달궈 놨으니, 나도 내가 취해야 할 열매 따러 가야지.”

“판도 다 깔아 뒀는데, 이제 와서요?!”

“음?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네?!”

“너,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이 판의 주인공이 아니야.”

“……?!”

“주인공은 의천맹, 그리고 소림과 무당이다. 말하자면 의천맹 대 반(反) 의천맹 세력이라는 거야.”

여상린의 눈이 번뜩였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모르면 당할 수 있어. 그건 나도, 정무쌍신도, 심지어 교주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상황을 다 알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

“내가 혈고를 해독한 시점부터, 정무쌍신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의천맹은 구석에 몰린 거야.”

“아…….”

그렇다.

의천맹주가 지금까지 권력을 쌓아 올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저지른 짓을 사람들의 욕망으로 잘 틀어막은 덕분이다.

소림과 무당을 제어하고, 남은 구파를 오염시켜 버린 것. 오로지 그것을 위해 수십 년을 엎드려 지냈고, 중소 문파들을 하나둘씩 자신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서량이 등장해서 의천맹주의 기반을 파괴시켰다.

지금 의천맹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권력 기반이 약해진 상황이다. 거기다 소림과 무당이 움직이면, 중도(中道)를 지켰던 무수히 많은 문파들도 함께 움직일 것이다.

“정파가 반으로 찢겨 버렸다는 거야. 그때부터 의천맹주는 이쪽에 시선조차 두지 못한다.”

“그렇군요.”

여상린이 탄성을 질렀다.

“소교주님은 중원의 평화를 바랐어요. 하지만 그것은 소교주님을 위한 것이었지, 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어요.”

“맞아.”

“즉, 이 판에서 소교주님이 선봉으로 서서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군요. 평화라는 결과를 바랄 뿐, 굳이 앞장설 필요는 없으니까요.”

“항상 생각하는 건데, 너도 꽤 똑똑하다니까.”

“똑똑하기는요. 그 당연한 걸 지금 알았는데.”

여상린이 허탈한 듯 술통을 쭉 비웠다.

서량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제법 많이 남았는데, 저걸 다 마셔 버린 것이다.

“온전히 의천맹주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시는 줄 알았어요.”

“그러려고 했지, 처음에는. 하지만 놈이 하오문을 공격한 이후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어. 맛난 음식을 아껴먹는 성격은 아니지만, 지금은 눈을 돌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럼 하남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는 신교의 병력은……?”

“철혈성 똥구멍을 찔러야지.”

“아!”

“겸사겸사 맹주 놈 권속에 있는 문파도 쓸어 버린 거야. 알아서들 할 테지만,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은 맞추는 게 좋겠다 싶어서. 물론 사전에 조사도 철저하게 했지. 악랄한 놈들만 골라서 쓸었거든.”

“더해서 소교주님이 이 판에 무조건 참전한다는 기색도 줄 거고요.”

“그렇지.”

서량의 눈이 빛났다.

“아마 맹주도 지금쯤 알아차렸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게 신교의 중원 진출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라는 것을.”

“철혈성도 바보가 아니니, 의천맹이 분열되려는 이때 어딘가를 노릴 게 분명하고요?”

“당연하지. 철혈성주 그 양반, 보통이 아니었거든. 소림과 무당이 움직인 즉시 어딘가를 물어뜯으려 들 거다.”

여상린은 머리에서 쥐가 나려는 것을 느꼈다.

“진짜 복잡한 정세네요.”

“복잡하다니? 오히려 쉽지. 한쪽이 흔들리면 약해진 틈을 타서 상처 하나라도 더 입힌다, 그래야 우리에게 이득이다. 당연하잖아?”

“당연한데, 거기까지 염두에 두긴 쉽지 않잖아요.”

여상린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는…….”

“하오문.”

“그렇죠.”

“아마 독하게 움직일 거다. 소림과 무당에게도 무척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여상린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숙취가 오는 것 같아요.”

“말술이면서 무슨.”

“어쨌든 소교주님은 내일 숙원 하나를 이루러 가는 거네요?”

“그렇지.”

서량이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달과 별을 보는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참 길었어. 여기까지 오는데.”

* * *

다음날 새벽.

“가십니까?”

“그렇소.”

혜심은 직접 산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가 반장의 예를 취했다.

“서 소교 덕분에 소림이 살았습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서량 역시 포권을 취했다.

“부디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시길.”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로 인사를 끝맺은 혜심.

서량이 몸을 돌렸다. 그의 뒤, 살왕기차 앞에서 일행들이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서량이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진심이었던 그의 웃음은 오늘따라 유독 환했다.

“망할 년 잡으러 가자.”

전생 후 이 년째 되는 겨울.

마침내 그는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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