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요신(妖神)의 부름 (2)
“소림을 떠나 독자 행동을?”
“그렇습니다.”
호요성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드리워졌다.
“이번만큼은 저도 소교주님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이천상이 직접 천거한 희대의 천재 호요성조차 서량이 소림에서 이탈한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이천상은 심유한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호요성은 궁금했다. 지금 이천상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의 천리안(千里眼)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이윽고,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원하는 것을 얻긴 했군.”
“예?”
“중요한 것은 량이가 의천맹을 궁지로 모는 것, 그리고 중원 정세가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이었다.”
호요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화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바라는 것이었지. 와중에 가장 염원한 건 시일 내에 의천맹주를 죽이는 것이었을 테지만.”
“…….”
“지금은 내 눈에도 보이질 않는군. 그 아이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다만…… 음?”
순간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왜 그러십니까?”
“처음인가? 처음치고는 꽤 능숙한데…… 소림에서 한 번 시도해 봤던가? 만약 그랬다면 불기(佛氣)가 내 눈을 방해한 것이로군.”
이게 무슨 말인가?
호요성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천상이 말을 이었다.
“량이가 사령수(死靈手)를 쓰고 있네.”
“사령수요?”
“군림마황기 상의 무공으로, 타격기나 기공술이 아닌 섭혼술(攝魂術)의 일종이지.”
호요성의 눈이 커졌다.
“섭혼술…….”
신교에도 여러 섭혼술이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섭혼술을 쓰기 위해선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제약도 많고, 그 모든 걸 안고 시도해도 성공 가능성은 미지수다. 그만큼 인간의 정신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림마황기라면?
신교의 천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천하제일의 자리를 빼앗겨 본 적이 없는 절대마공이라면?
“누군가를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게 아니야. 정보를 취득하고자 함이군. 그렇다면 훨씬 더 쉽겠지.”
“아, 그렇습니까?”
“어떤 섭혼술이든, 같은 마공이나 사공 계열에서 더 쉽게 작용하기 마련이네. 그 둘은 정파의 무공과 다르게 먹이 사슬 관계가 철저하기 때문이지. 물론 어느 무공이든 간에 경지가 상승하면 섭혼도 어려워진다네.”
“하지만 기억을 빼앗아 오기는 비교적 쉽다는 것이지요?”
“정확히 말하면 강제적인 공포를 주입하여 자백을 받아 내는 것에 가깝네. 사람의 두뇌는 참으로 신기해서, 본인은 잊었다고 생각한 정보를 끝까지 기억해 두고 있거든.”
“무의식을 건드린다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감정을 흔들어 무의식의 영역에 도달하게 되지.”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참 매력적인 수법입니다. 특히 저나 형법당주 같은 사람에게 아주 매혹적인 능력이군요.”
“어차피 익힌다 해도 써먹질 못할 걸세. 욕계문을 열지 못한 이상.”
“아, 그렇습니까?”
말하자면 천마(天魔)만이 쓸 수 있는 수법이란 뜻이다.
“어찌 되었든, 일단 소교주님이 보내온 서신에 정확한 목적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뭔가 목적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저희에게는…….”
“그럼 알아보게.”
“예?”
이천상이 희미하게 웃었다.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 알아보란 말일세.”
호요성이 눈을 끔뻑였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무언가?”
“……교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소교주님이 하는 일을 그저 지켜만 보라고요. 놔두면 알아서 할 것이라고.”
“그랬지.”
“…….”
“자네가 원한다면 직접 알아보란 뜻일세. 다만 알아보는 것도, 호기심을 죽이는 것도 자네 몫일세.”
호요성이 빙그레 웃었다.
“교주님께서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네.”
천리(天理)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마신의 눈.
서량이 무슨 일을 벌이든, 그 마지막이 어떻게 귀결되리라는 것을 이천상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서량이 어떤 일을 벌이든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군림마황기의 욕계문을 열고, 깨달음의 벽을 부숴 가며 차근차근 성장한 서량은 이미 천마(天魔)로서 활동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지에 올랐다. 군림마황기 덕분에 서량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이제 와서는 이천상도 궁금한 것이다.
자신의 예측을 벗어나 버린 이 신비로운 제자가 이제는 뭘 하려는 것인지. 본래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제자의 분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이 기회에, 중원 천하에 십대천마의 위명을 제대로 각인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내가 본 것이 맞았다면.
“……나 역시, 조만간 세상 바람을 쐬어야 할 때가 오겠군.”
“예?”
“아닐세.”
이천상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왠지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 * *
“……사람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이, 이게 사람이냔 말이오.”
하남에서도 손에 꼽히는 의원이라는 약운신의(藥雲神醫)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소. 어찌 되었든, 소림에서 하셨던 약속을 지금 지킨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요.”
약운신의는 혈고에 중독된 소림의 승려들을 진맥하다 본인 또한 혈고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게 된 의원 중 하나였다.
소림의 수뇌부들은 그런 의원들을 모두 소림으로 불러들였고, 꽤 많은 자금을 들여 제조한 약으로 그들을 해독해 주었다.
당시 그곳에 모인 의원들 대부분이 서량에게 은(恩)을 갚겠다며 나섰다. 목숨도 구해 주고, 혈고의 해독법까지 알게 되었으니 확실히 보통 은인은 아니었다.
약운신의 역시 그런 의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약속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대체 이 처자는 누구요? 완전히 목내이(木乃伊)가 다 되었잖소!”
방령의 몸은 말 그대로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형법당 뇌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해서인지, 몸 여기저기 상처도 많았다. 적사가 때의 농염한 미색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두 눈 또한 썩은 생선의 눈알처럼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거의 송장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가만히 방령을 내려다보던 마동필이 말했다.
“진맥을 해 주셨으면 하오.”
“이 처자를 말이오?”
“그렇소.”
어차피 맡기겠다면서 진맥은 또 왜?
당황도 했고, 궁금한 것도 많다. 하지만 그는 마동필이 시키는 대로 그녀의 맥을 짚었다.
잠시 후, 약운신의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어렵구려.”
“어렵다?”
“내부가 온통 곯았소. 몸이 다 나아도 십중팔구 무공을 익히지 못할 것이오. 아니, 거동이나마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렇군.”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머리요.”
“머리는 어떻소?”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상단전이 거의 뭉개져 버렸소. 전설로나 회자되는 영약이나 천하제일의 무공이라도 이리 망가진 상단전을 복구할 순 없을 것이오.”
“즉, 몸을 다시 추슬러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할 거란 말이로군.”
“그렇소. 게다가 치료 중에 중태에 빠질 확률 역시 얼마든지 있소.”
마동필의 눈이 서늘해졌다.
“잘 됐군.”
“뭐, 뭐라고?!”
깜짝 놀란 약운신의가 마동필을 쳐다보았다.
마동필이 몸을 돌렸다.
“회복을 시키든 치료를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신의께 맡기겠소.”
“자, 잠깐만! 이 처자가 대체 누구기에……!”
마동필은 대답 없이 의방을 나섰다.
황당하다는 듯 문을 보던 약운신의가 다시 방령을 내려다보았다. 방령은 여전히 쌕쌕거리며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잘 됐다고?”
약운신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신교에 반역이라도 저지른 처자인가? 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 꼴이 됐는데 잘 됐다니, 마인이란 족속들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약운신의의 의방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야산의 정상.
“다녀왔습니다, 소교주님.”
“잘 전달했냐?”
“예. 천우신조로 회복을 하더라도 평생 무공을 익히지 못하거나 불구가 된다고 하였으며, 이지를 되찾을 확률 역시 없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서량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
너무 잔혹한 처사다?
충분히 그리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서량은 방령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관심 없다. 다만 그녀가 비요왕의 제자로 들어간 순간부터, 서량에겐 원수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저 죽이는 것까지는 너무하다 싶어서 약운신의에게 맡겼을 뿐이다. 그게 더 잔혹한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서량 입장에선 이것이 자비였다.
어쨌든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니까.
“짐 하나 치웠으니, 이제 우리도 길을 잡아야지. 고 당주에게도 서신을 보내야겠군.”
“어디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산동(山東) 태산(泰山).”
마동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산동성은 황보세가의 권역이었다. 그중 태산이라면 황보세가가 똬리를 틀고 있는 제남(齊南)과 지척이었다.
그리고 서량은 천중지회 당시 황보세가의 소가주를 반병신으로 만들었다. 아마 서량이 산동에 진입한 걸 알아차리는 순간 공격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예?”
“황보세가를 떠올린 것 아냐?”
“아,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맹주 놈의 뒤치다꺼리나 할 놈들이었어. 적당히 힘을 빼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물론 황보세가 전체와 붙을 수는 없다. 이천상이라면 모를까, 서량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황보세가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든 병력을 서량에게 퍼붓지는 못할 것이다. 그곳에 십대고수급의 고수가 끼어 있지 않는 한, 서량은 당하지 않는다.
“금호와 호왕은 먼저 보내셨습니까?”
“그래.”
“하면 이만 가시지요. 고 당주에게는 제가 따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그러지.”
그렇게 야산을 내려오면서, 서량은 생각했다.
‘사실상 황보세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그들 역시 숨기고 있는 전대의 고수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중 십대고수에 육박하는 고수가 끼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큰 문제인 곳이 하나 있었다.
‘철혈성…….’
팽가는 형식상으로나마 봉문 중이다.
의천맹이 소림과 무당 연합을 상대하게 되면, 철혈성이라고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게다가 철혈성은 중원의 동부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은가.
이 기회를 틈타 북상하여 산동의 황보와 하북의 팽가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아니, 그들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
‘아마 황보보다는 팽가를 먼저 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철혈성이 있는 강소에서 하북으로 가는 최단 거리는 산동을 지나는 거야. 속도의 이점을 버리고 돌아갈 이유가 없다.’
물론 해로(海路)를 이용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바다가 훨씬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팽가 정도의 병력을 치려고 하는 판에, 산동의 황보가 무서울까?
‘그대로 북상해서 황보와 팽가를 차례로 격파할 수도 있겠지.’
만약 그렇게 되면?
‘내게는 최상이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으며, 동시에 의천맹의 힘도 빼먹을 수 있어.’
그리고 철혈성의 시선이 동북부로 집중된 틈을 타.
‘철혈성의 엉덩이까지 걷어차 줄 수 있지. 결국 놈들은 얻은 만큼 잃게 될 거야.’
이야말로 청소하다 은원보 줍는 격 아니겠는가. 마존을 대동한 신교의 정예 삼백을 괜히 부른 게 아니다.
‘혹시라도 의천맹에서 병력을 파견했다면, 무조건 교전을 피하라고 해야겠어.’
서량이 사악하게 웃었다.
“성주 양반. 각자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이제부터는 각개 전투입니다.”
물론 그는 철혈성에 이만 찢어지자는 말을 전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