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요신(妖神)의 부름 (4)
“크윽!”
사위를 휩쓰는 돌풍에 언양회가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이, 이런!’
아무리 중상을 입었다지만 명색이 초절정고수인 그였다. 십대고수 중 한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며, 거의 모든 진전을 잇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충격파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대체 저자가 누구이기에?!’
화아아악!
널찍한 등 위로 시뻘건 마기가 피어오른다. 꿈틀거리는 마기는 제멋대로 움직이며 어디서도 보지 못한 마수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크하하핫!!”
무지막지한 일격을 퍼부었음에도 조금도 힘겨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며 더 살벌한 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콰콰쾅!
한계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무서운 속도로 번지는 산불처럼,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마기가 사방천지를 뒤집어 삼키고 있었다.
비로소 언양회는 깨달았다.
‘아버지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다?!’
기질이 너무 달라서 누가 더 강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철혈성의 무상(武相)이자, 천하제일창(天下第一槍)이라 불리는 신창(神槍) 언극도 이만큼 파괴적인 기세를 뿜어내진 못할 듯하다는 것.
파지지지직!
서량의 왼손에 시뻘건 전광이 이글거렸다.
모양새는 번갯불을 닮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화기(火氣)에 가깝다. 번개와 불, 뇌화(雷火)를 끌어모은 서량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전방에서 몰아쳐 오는 회색빛 구름이 크게 출렁였다.
“카합!!”
무시무시한 기합성과 함께, 그가 왼손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에서 핏빛 전광에 휩싸인 권풍이 돌풍을 일으키며 쏘아졌다.
실로 오랜만에 펼쳐지는 천마벽력권(天魔霹靂拳)의 최후 초식, 진천벽력파(振天霹靂波)였다.
콰르릉! 파지지지직!
회색빛 구름의 중앙이 뻥! 하고 뚫렸다. 권풍이 뚫고 지나간 자리를 중심으로, 붉은 전광이 번져 나가며 구름 전체에 간간이 불꽃을 피워 냈다.
서량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미세한 신음. 저 구름을 생성한 놈들 중 몇 놈이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딱 그 정도.
최강의 무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힘을 실은 일격이었거늘 죽은 자가 없다.
천마도를 쥔 서량의 손등에 핏줄이 불끈 돋아났다.
“크하압!”
번쩍!
다시 한번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일참(一斬).
눈앞의 모든 것을 사선으로 쪼개 버리는 이 일격은 처음 선보인 일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구유마공의 마력으로, 군림마황기 상의 무공인 뇌공만마일식(雷公萬魔一式)을 구사한 것이었다.
콰르르릉! 치이이익!
“크윽!”
“헉!”
베어 낸 물이 금세 다시 합쳐지는 것처럼, 구름 역시 벨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칼질은 달랐다. 단 일초로 구성된 반격쾌도술이지만, 무변(無變)의 일격에 실린 힘은 인화도법의 무간도나 대홍련에 준한다.
콰직! 콰드득!
구름을 가른 무형의 도기가 그 너머의 사람 한 명과 거목 두 그루를 부숴 버렸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구름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해진(解陣)!!”
사이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사르륵!
동시에, 거대한 성문처럼 부풀어 올랐던 회색 구름이 씻은 듯 사라졌다. 숲 전체를 잡아먹을 듯 시시각각 크기를 키워 가던 구름이 번개처럼 싹 사라지는 광경은 신비로울 정도였다.
그렇게 구름이 사라진 자리에, 아홉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양회의 눈이 흔들렸다.
‘……사왕십요(邪王十妖).’
비요왕이 비밀리 기른 최측근 중 하나로, 열 명인 동시에 하나인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제는 그중 하나가 저 이름 모를 마인의 도기에 죽었으니 사왕구요라 불러야 할까.
‘제길!’
사왕십요 개개인은 그리 대단한 강자가 아니다.
하지만 숫자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뿜어내는 사공의 위력이 곱절로 상승한다. 저들에게 이로운 환경이 조성될 경우, 초절정고수도 쉽사리 죽일 수 있는 게 사왕십요였다.
그의 부하 중 절반이 사왕십요의 손에 죽었다. 심지어 수하들은 창질 한 번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저 이름 모를 마인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몰아친 사왕십요, 아니 구요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언양회의 눈이 깊어졌다.
일순 아버지의 무력이 떠올랐을 만큼 막강한 실력이라면, 반로환동한 것이 분명한 절대고수라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대로 도주를 해야 하나? 아니면 남아서 이 일전을 지켜본 후, 다시 수하들이 죽은 곳으로 가야 하는가?
순간 그의 머릿속에 저 마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신기하네그려. 육신에 담은 무공은 한 지역의 패주급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행동은 어째 강호 초출처럼 어설픈가?
울컥 치미는 묘한 감정.
그렇게 언양회가 이도 저도 못 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구냐?”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사왕십요의 중앙에서 사진(邪陣)의 중추 역할을 맡은 자, 십요의 수좌인 일요(一妖)였다.
“당금 중원에 그만한 마기(魔氣)를 발산하는 마인은 없다. 마교의 마인을 제외하고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 섬뜩한 미소를 보고도 일요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교에서 나온 고수인가?”
“자질구레한 얘기 따위는 집어치우지.”
“……?”
“좀 뜻밖이긴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고 들뜨는 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야.”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희를 살려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위이이잉!
일요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맺혔다.
너무나도 솔직한 살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도 서량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저급한 살기가, 사이한 살의가 비요왕을 빨리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바뀌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긴말 않겠다. 너희 주인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라. 그러면 너희를 살려 주겠다. 적어도 당장은 말이지.”
방령에게서 뽑아낸 정보는 구체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정신이 망가진 상태였던 만큼, 산동의 어느 지역이라는 것까지만 간신히 알아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젠 이것들에게 자세한 것을 물어보면 된다. 그래서 서량은 그렇게나 기뻐한 것이다.
“……오만한 놈!”
서량의 절대적인 마기를 느꼈음에도 저리 말할 수 있는 배포가 놀라웠다.
천하 어떤 사공(邪功)이든 마공을 넘볼 수는 없다. 마공끼리 서열 관계가 확실하다면, 마공과 사공 사이의 서열도 확실하다. 천하 어떤 대단한 사공과 사술도 마공을 당해 내긴 어렵다.
그것은 서량이 천룡궁의 호법을 죽이고 나서 그곳에 감돌던 혈목신기(血木神氣)를 감당해 낸 것으로 증명이 됐다. 사기(邪氣)는 마기에 종속된다. 애초에 대립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일요는, 사왕구요는 미동도 없었다. 동료 하나가 죽어 당황했을 뿐, 서량을 겁내지는 않는 듯했다.
“네놈이 마교도이든 뭐든, 자매를 죽인 이상 고이 보내 줄 수는 없다.”
“그래?”
“하물며 그 천한 입으로 주인님을 언급하다니, 죽어도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은 해. 비요 할매의 피 맛만 봐도 충분히 만족할 거란 말이다.”
“이놈!”
“하지만 굳이 내 허기를 달래 줄 요량이라면 뭐…….”
카아앙!
천마도에서 철이 긁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자흑색 칼날 위로 흐르는 시뻘건 마기가 천마도와 꼭 닮은 또 하나의 칼날을 생성해 냈다. 천마도의 도신에 묶어 두었던 구유마기의 칼날이었다.
“나야 좋지.”
문답무용.
일요가 외쳤다.
“사왕시진(邪王屍陣)으로……!”
번쩍!
시뻘건 광채가 일요의 몸을 종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제각기 사공절진을 펼치려던 팔요들이 놀라서 일요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서량을 응시하는 일요.
서량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굉장한 사공이야. 선천에 달한 마기 앞에서 언행이 자유로울 정도면, 사신(邪神)의 절학이 천마의 절학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도 과장은 아닌 것 같군.”
부르르르.
일요의 몸이 떨려 왔다.
떨리는 일요의 몸에, 어느 순간 붉은색 실선이 그어졌다. 정수리부터 시작된 붉은 선은 미간과 코, 턱을 지나 복부까지 쭉 이어져 내려왔다.
서량이 진실로 기쁘다는 듯, 유쾌한 어조로 외쳤다.
“그간 비요 할매도 크게 발전했겠지?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때 그 시절보다 더, 지금의 나보다도 더 강해졌어야 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루하루 팔뚝을 씹어 가며 억눌러 온 내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촤아아아악!
일요의 몸에서 대량의 선혈이 뿜어졌다.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진 일요의 몸뚱이가 좌우로 쓰러졌다. 사왕십요의 공격 진법, 사왕시진은 펼쳐 보지도 못한 채였다.
남은 팔요들이 질린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환희에 젖은 서량의 얼굴 위로 귀신의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미리들 가서 자리 깔고 있거라. 곧 너희 주인도 보내 주마.”
* * *
콰앙!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숲을 울렸다.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다지만, 이 정도 충격을 못 느낀다면 고수가 아니다. 마동필과 여상린은 물론 앵화조차 숲을 뒤흔드는 충격파에 눈을 번뜩였다.
“소교주님?!”
가장 먼저 움직이려 한 것은 여상린이었다.
하지만.
“멈추시오.”
“네?”
여상린이 몸을 돌렸다.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마동필과 앵화가 보였다.
“왜 그래요? 당장 가 봐야죠!”
“소교주님께서 대기 명령을 내리셨소. 다음 명령은 없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소.”
여상린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마 호위! 마 호위도 느꼈잖아요? 이 충격파는 보통 충격파가 아니에요! 상대에게 그만한 힘이 없었다면, 소교주님도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즉, 한참 떨어진 거리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강한 충격을 가했을 만큼 적의 힘 역시 강하다는 뜻이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까 가야……!”
“그래도 여기에 있어야 하오.”
“도대체가!”
“답답하기로는!!”
느닷없이 터져 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동필이었다.
여상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앵화 역시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마동필이 입술을 깨물었다.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이 저도 모르게 터져 버렸다. 일순 여상린에게 미안하다는 감정과 짙은 씁쓸함,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답답하기로는 여 소저보다 내가 더 하오. 여 소저에게 소교주님은 동료요. 어쩌면 친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호위 대상이시란 말이오.”
“…….”
“지금껏 소교주님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매번 나를 두고 가셨소. 당신께서 처리하시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하신 것이겠지.”
마동필의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소.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간청을 드렸소. 하지만 소교주님께선 지금껏 나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소.”
“…….”
“그렇다는 건, 그분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이오. 호위무사조차 내버려 두고 홀로 위험을 맞이하려는 분께서, 동료가 위험의 늪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실 것 같소?”
여상린의 눈이 흔들렸다.
마동필은 그답지 않게 많은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 쌓인 것이 많았다는 뜻이리라.
“알아 두시오. 만에 하나라도 소교주님께서 돌아가신다면, 당신에게는 그저 친구를 잃는 일일 수 있소. 하지만 나와 앵화에게는 모셔야 할 주군이자 신교의 차기 신을 잃는 일이오.”
“…….”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진짜 우리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그분께서 어떻게든 연락을 취하실 거요. 그것은 전서응도, 정보원도 없는 막막한 숲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오.”
“……정말 그러실까요?”
“그러실 거요. 그렇게 믿고 있소.”
가슴이 터질 정도로 걱정이 되지만,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믿음을 잃는 순간 스스로 무슨 행동을 할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마동필을 보던 여상린이 충격파가 발생한 지역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구궁!
숲이 다시 한번 신음했다. 우지끈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나무 몇 그루가 박살 나 쓰러지는 모양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충격파였다.
‘소교주님.’
여상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