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요신(妖神)의 부름 (5)
“후우. 후우.”
언양회는 불신 어린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그는 참혹하게 베인 아홉 구의 시신들을 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힘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들끓는 감정이 그의 호흡까지 흔들고 있는 것이었다.
츠츠츠츠.
개방한 마공을 갈무리했는데도, 전신에서 불그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기인지 살기인지 모를 기세였다.
시신들을 둘러보던 서량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삼요(三妖)에게로 눈을 돌렸다.
“허억!”
삼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 두 다리가 부러져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만일 서량이 중간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다른 자매들처럼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서량이 웃으며 삼요에게 다가갔다.
삼요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괴물이……!’
굳이 진법을 펼치지 않아도 서로 진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왕십요는 천사심법(天邪心法)의 사기(邪氣)로 신체 내외를 보호받는다.
하지만 그 절대의 방어막도 이 괴물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저 거대한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저 단단한 주먹이 내질러질 때마다 무조건 한 명씩 죽어 나갔다.
비로소 삼요는 깨달았다.
이 자는 사마(邪魔)의 우위를 논할 필요가 없는 자였다. 힘의 강약을 따지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무적자로서의 길을 걷는 차세대 마신.
‘적어도 주인님과 호각으로 겨룰 수 있는 자……!’
“네년은 꼭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요가 퍼뜩 놀랐다.
광기 어린 미소를 짓던 서량의 얼굴에 짙은 기대감이 어렸다.
“종으로 갈라 죽인 년이 진의 중추를 맡았지. 하지만 퇴로를 확보하는 자는 너야. 난 그 퇴로가 어디인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삼요는 등줄기를 훑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은 주인인 비요왕조차 모르는 사실이었다. 비요왕은 그들을 철저하게 단련시켰지만, 누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까지 정해 주지는 않았다.
한데 저 괴물은 진법을 펼치려는 시도를 본 것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꿰뚫어 본 것이다.
‘안 돼!’
삼요는 남은 사기를 끌어 올렸다. 진기로 심맥(心脈)을 끊어 자결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큽!”
삼요의 몸이 덜컥 멎었다. 몸뿐만이 아니라 내공까지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무형의 마기로 삼요의 모든 것을 통제한 서량이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자결이라? 충성심이 대단하군. 강압이든 뭐든, 비요 할매도 인복이 있는 모양이야.”
한쪽 무릎을 꿇고, 삼요의 눈을 바라보는 서량.
삼요는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체내로 파고든 서량의 마기가 그녀의 하단, 중단을 연이어 관통하곤 상단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서량의 손이 삼요의 정수리에 닿았다.
스르륵.
붉게 파도치던 마기의 색이 점차 진한 청색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한없이 뜨겁고 독하기만 하던 마기 위로 강렬한 위압감이 실렸다.
삼요의 눈이 부릅 뜨였다.
치이이이익!
“끼아아아아악!”
삼요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삼요의 머리를 감싸 쥔 커다란 손에서 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퍼져 나가는 연기는 마치 귀천하지 못한 한(恨) 많은 혼의 몸부림처럼 보였다.
군림마황기의 사령수가 발동된 것이다.
“음.”
눈을 감은 채였지만, 서량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삼요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그녀의 희로애락을, 그리고 어떻게 비요왕의 수하가 되었는지까지도.
‘어렵군.’
짧은 순간, 엄청난 양의 정보가 머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량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너무 뒤죽박죽이라 정리가 필요했다.
‘방령, 그 계집과는 달라.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 이리도 어려울 줄이야.’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이다.
이미 방령에게 두 번이나 사령수를 시전해 본 그였다. 달리 말하면, 충분한 연습이 되었다는 뜻이다.
분명 어려운 작업이지만,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후우우우웅!
서량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침내 원하는 정보를 얻은 것이다. 그가 군림마황기의 출력을 올렸다.
츠츠츠.
‘……호오?’
서량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 네년도 강해지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구나.’
스륵.
비로소 삼요의 머리에서 손을 뗀 서량.
털썩!
삼요의 몸이 기우뚱 옆으로 쓰러졌다.
끔찍하게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버린 채였다. 눈 밑은 거무죽죽했고, 두 뺨은 홀쭉하니 패어 있었다. 만일 피부까지 푸석해졌다면 흡정마공에 당했다고 착각될 외양이었다.
차가운 눈으로 삼요를 내려다보던 서량이 칼을 휘둘렀다.
서걱.
삼요의 목이 베였다.
서량이 한결 담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칭찬해 주마.”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빈틈을 보여 주었는데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만일 날 공격했다면, 네놈 또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야.”
서량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언양회가 있었다. 언양회의 낯빛은 극도로 창백했다.
“더불어, 그대로 도망치지 않은 것 역시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네가 도망쳤다면, 난 끝까지 널 쫓아가 죽였을 것이다. 네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알았기 때문이야.”
“……당신은 누구지?”
“서량.”
“서량? 헉!”
하얗게 질린 언양회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설마 염라마군?!”
“그렇다.”
근래 중원에 태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름.
장강의 용아채는 물론 천룡궁의 칠대호법을 죽였으며, 천중지회에 난입해 후기지수들과 대담을 펼쳤고, 이후 팽가의 전력도 증발시켜 버린 호탕한 무법자.
의천맹의 부덕함을 논하고, 소림의 현판을 박살 내러 갔다는 희대의 호걸이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염라마군이 이렇게 강했다고?!’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언양회, 맞나?”
“그,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삼요 덕분에 알았지.
“철혈성주의 명을 받아 비요왕에게로 왔군. 산동의 길을 열고, 혹시 모를 황보세가의 공격을 차단하라…….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철혈성이 팽가를 노리고 있었구나.”
스륵.
언양회가 창을 고쳐 잡았다.
서량을 보는 그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어렸다.
“마교가 철혈성에 첩자를 심어 놓은 것이냐?”
확실히 어설프다.
반응도 너무 솔직하고 적을 분석하려 들지도 않는다. 일신의 무공은 꽤 대단하지만 언제고 큰코다칠 것이다.
서량이 턱으로 창을 가리켰다.
“내려놔라. 싸울 생각은 없어.”
언양회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량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죽고 싶은가?”
“…….”
“내려놔.”
언양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창을 거뒀다. 어찌 되었든, 상대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상태로는 어차피 무리다.’
정상적인 상태라도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했지만, 그는 그렇게 상한 자존심을 다독였다.
창을 거둔 언양회를 보며 서량은 생각했다.
‘그간 철혈성주와 비요왕은 동맹을 맺고 있었어. 아니, 말이 동맹이지 상하 관계나 다를 바 없지. 그러나 비요왕이 이 시점에서 뒤통수를 날렸다.’
판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다.
하필 서량이 비요왕을 죽이러 왔을 때, 하필 철혈성이 하북으로 길을 잡고 있을 때.
바로 그때 철혈성주와 비요왕의 관계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철혈성으로 서신은 보냈나?”
“……아직.”
“좋아.”
서량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판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돌아가는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정세가 요동치는 것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가다.
“내가 널 지켜 주겠다. 철혈성으로 서신을 보내라.”
“뭐, 뭐라고?!”
언양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고마워할 것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사령수의 성취는 아직 미약했고, 실제로 써 본 경험도 별로 없었다. 다행히 원하는 것을 알아냈지만, 아주 세밀한 정보까지는 얻지 못했다.
한데 그 정보를 대체해 줄 사람이 이렇게 나타났다.
“서신을 보낼 때까지는 지켜 주겠다. 하지만 서신을 보내고 나서, 넌 나와 함께 움직인다.”
“……?”
“너도 수하들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
“길은 알고 있지만, 한 번 가 봤던 길잡이의 눈이 더 정확하겠지. 내가 넓은 대로를 달려갈 수 있도록 자잘한 것들은 직접 처리해라. 그럼 내가 네 수하들의 복수를 해 주마.”
* * *
“소교주님!”
마동필이 재빨리 서량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무사하십니까?”
“물론이지.”
“다행입니다.”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말을 이으려던 서량은 순간 움찔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상린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입술을 미세하게 달싹이고 있었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리고 말이야.”
“예?”
“좀 뜬금없기는 한데, 너한테 할 말이 있다.”
“하문하십시오!”
“음, 미안하게 됐다.”
마동필의 눈이 커졌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너를 데려가질 못했어. 내 호위는 넌데 항상 이렇게 빠트리는구나. 미안하다.”
마동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닙니다! 소교주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저는 그저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아니지.”
서량의 얼굴에 진지한 기색이 감돌았다.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를 해 봐야겠지만, 일단 한 번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얘기한다. 네 생각대로 난 너를 호위라고 생각하지 않아.”
떨리는 눈으로 서량을 올려다보던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문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묻어 나왔다.
“나는 너를 호위가 아니라 수하이자 동료이며,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
“새삼스러울 거 없지? 내가 한 번씩 툭툭 던지던 말이니까.”
“가,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당황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분명 소교주님은 가끔 그리 농담 같은 말을 던지곤 하셨지만, 마동필은 한 번도 자신을 소교주님과 동등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 너를 호위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가끔은 널 위험하게도 했고, 장기의 말처럼 써먹겠단 말도 했지만, 정작 그러한 순간이 올 때면 난 너를 냉정하게 쓸 수 없었다.”
“…….”
“이번에도 같다.”
“……예?”
“너의 금강야차마공에는 사공이 통하지 않는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내 마공과는 반응 자체가 다를 거야.”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비요왕에게 능력 좋은 부하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번만큼은 나도 널 호위가 아닌 부하로 써먹어야 할 순간이 왔다는 거지.”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의 첨병이 되어, 비요왕 앞까지 날 안내해라. 그게 이번 싸움에서 네가 죽음을 무릅쓰고 완수해야 할 ‘역할’이다.”
“…….”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묻지 않겠다. 네 목숨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도록.”
마동필이 외쳤다.
“소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좋아.”
서량이 다시 한번 여상린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것이 묘하게 귀여워 보였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빚을 졌군.’
아닌 게 아니라, 마동필 입장에선 마음이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그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미안했다.
“자자, 명령도 내렸으니 이제부터 우리 할 일을 하자고! 바빠졌어!”
“한데…….”
“응?”
마동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자는……?”
“아, 저 창잡이?”
언양회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서량이 사악하게 웃으며 마동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내 칼이라면, 저놈은 사냥개다.”
언양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제부터 쉴 새 없이 달릴 거야. 다시 배에 힘들 꽉 주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