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331화 (331/774)

331화. 칼자루는 피를 기억하지 않는다 (1)

치이이이익!

안개 같기도 하고 연기 같기도 한 운무가 욕탕 안을 가득 메웠다.

언뜻 보기에는 무척이나 후덥지근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벽 곳곳에 서리가 꼈을 정도로 욕탕 내의 온도는 차가웠다.

염유액에 이어 설유액으로 전신을 감싼 지 어느새 보름. 사공의 절대자가, 사공의 신(神)이 되어 세상에 나서기까지 닷새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욕탕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츠츠츠.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순식간에 소녀의 몸으로 침투했다. 소녀의 입술이 퍼렇게 변하고, 가녀린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몸은 분명 한기에 반응하고 있었지만, 그에 별 감흥은 없는 모양이었다.

“회색주(灰色珠)가 전부 깨졌습니다. 사왕십요가 전멸한 것 같습니다.”

부글부글.

욕조 수면이 한 차례 출렁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수면 아래로 몸을 전부 담근 여인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실제로 소녀의 말을 들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설유액이 섞인 물은 그 밀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내공의 고수도 물 밖의 소리를 듣기 힘든데, 밀도까지 높다면 말할 것도 없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소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교룡창병(蛟龍槍兵) 중 살아서 돌아간 놈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출렁.

욕조의 물이 한 차례 큰 울림을 발했다.

마침내 반응이 온 것이다. 조용하게 수면을 가르며 올라온 손이 욕조 벽을 붙들었다.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손이었다. 유독 길고 뾰족한 손톱 역시 잡티 하나 없는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촤아아악!

물살을 가르며 몸을 일으키는 여인.

투명한 살결,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몸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몸을 희뿌연 운무가 가려 주고 있었다.

“하아…….”

가볍게 토해 낸 신음에서 은근한 쾌락이 묻어 나왔다.

소녀의 눈이 흔들렸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주인이 몸을 일으킨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다시 연공(練功)에 들어가심이…….”

퍼어어어엉!

욕조가 산산이 조각났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터져 버린 욕조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욕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젖빛 액체가 욕탕 전체를 물들였다.

바닥을 적신 물이 이내 소녀의 손에 닿았다.

까드드득.

고운 두 손 위로 서리가 맺혔다.

설유액으로 강력한 한기를 머금게 된 물이었다. 내공의 고수라도 함부로 만지면 순식간에 골수까지 얼어붙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멀쩡했다. 손에 서리가 맺혔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녀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소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 주인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별 감흥을 느끼지 않을 것 같던 소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츠츠츠츠.

욕탕 곳곳을 적신 물에서 새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빠져나온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여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부르르르.

여인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뽀얀 빛깔의 물에서 설유액만을 뽑아내 흡수한다. 체내로 들어온 설유액의 한기가 염유액의 열기와 만나 중화되기 시작했다.

후욱.

욕탕 내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제야 비로소 욕탕이 습해졌다.

소녀가 입을 쩍 벌렸다.

“흐, 흡정괴음사공(吸精怪飮邪功)!”

영역 내, 자신이 원하는 기운만을 골라서 취하는 절대사공 중 하나. 취한 기운을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찰나지간 가공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무공이었다.

과거, 사파 최강의 전설을 남겼던 사신(邪神)은 흡정괴음사공으로 무한한 내력을 운용하며 석 달 열흘을 쉬지 않고 혈전을 벌였다고 하였다.

사신 이후, 누구도 구사해 본 적 없다는 사공.

그러한 사공을 숨 쉬듯 자연스레 펼친 사람은 사신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전하지 않구나.”

영롱한 목소리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핏 드러난 피부가 예전보다 훨씬 맑고 팽팽해 보였다.

외모도, 목소리도 젊어졌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활짝 꽃피었던 그 시절, 이십 대 때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흡정의 사공은 노력한다고 성장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야. 딱 여기까지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로구나.”

소녀의 눈이 커졌다.

주인의 외모가 예전보다 훨씬 젊어졌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인에게선 더 이상 어떠한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고고한 분위기가 흘러넘칠 뿐이었다.

“주인님……?”

“설유액은 더는 필요치 않겠다. 이 이상 취해 봤자 의미가 없어. 과연 사신(邪神)이라 불릴 만하구나. 재능의 그릇이 달라. 나보다 한 수 위였어.”

“하면?”

여인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연공은 이것으로 끝이다.”

쿵!

소녀가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대공(大功)을 경하드립니다!”

전설로 회자되던 사신(邪神)의 경지까지 오르진 못했다. 굳이 경지를 나누자면, 그보다 한 수 아래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가.

사신은, 그 시대 천마보다 더한 공포로 기억되던 무적의 강자였다. 사신이 당대제일이라 불리지 못한 것은 숱한 악행을 일삼고 규격 외의 강함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지, 그가 천하제일이 아니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그보다 한 수 아래일지언정, 당대 무림의 정점이라 불리기엔 손색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주인은 젊음을 되찾음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시간을 손에 넣었다.

끝없이 강해질 것이다. 과거 사신이라 불렸던 괴물보다도 더!

격동으로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여인은 다시 한번 웃었다.

“너희의 고생이 없었다면 내 어찌 이와 같은 경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느냐. 너희들의 공이 크다.”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만 이리 진심 어린 치하를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나저나, 십요가 죽었다고?”

“네? 아, 네! 회색주가 전부 깨졌습니다!”

“흐음, 애송이 창수 정도의 능력으로는 십요를 감당키 힘들었을 텐데. 누군가 녀석을 도와준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몸짓에서 숨 막힐 듯한 염기(艶氣)가 뿜어져 나왔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순히 기뻐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뭐, 상관은 없겠지.”

“네?”

여인이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스스스스.

소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욕탕의 문이 사라져 버렸다. 보온 효과가 뛰어나고 철보다 단단하며, 같은 크기의 금보다도 비싸다는 청정목(靑晶木)으로 만든 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소녀는 침을 삼켰다.

이것은 격공장도, 허공섭물도 아니었다. 아예 다른 차원의 신공(神功)이었다.

눈으로 봐도 믿기지 않는 이러한 신기(神技)를 숨 쉬듯 자연스레 펼친다. 구대문파의 산중고수라도 주인의 일수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성주가 황보세가를 막아 달라 하였지?”

문을 나서는 여인의 얼굴에 은은한 흥분이 깃들었다.

그녀는 분명히 깨달았다. 더는 철혈성주의 명을 듣지 않아도 된다. 지금 자신의 무공이라면 송금백을 이기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바뀌었다. 첫 제물로 황보세가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겠어.”

“그럼……?”

“채비를 하거라.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구장(九將), 팔화(八禍), 칠사(七死), 육운(六雲), 오위(五衛)까지, 전부 소환해.”

비요왕.

당대 십대고수 중 일인이자, 과거 사파의 전설이라 불린 사신의 절학을 이은 고수.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비요왕이 아니었다. 사신의 무공을 대성한 그녀는 요왕(妖王)이 아니라, 요신(妖神)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력을 쌓았다.

“황보가를 쓸어 버리고 그곳에 천사성(天邪城)을 세울 것이다.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이 난세에, 나야말로 천하의 주인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만천하에 알려 주리라.”

* * *

꿈틀거리며 맥동하는 근육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굵은 핏줄에 막혀 길을 틀었다. 이리저리 흘러가던 땀이 하박과 손목을 지나, 주먹 끝으로 몰려들었다.

뚝. 뚝.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 땀으로 어느새 바닥이 축축해졌다.

사내의 몸은 결코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한계까지 압축된 근육과 고요하게 번지는 위압감 덕에 본래의 체구보다 두 배, 세 배 더 커다랗게 보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검 끝을 바라보던 반개한 눈이 이내 번쩍이는 빛을 발했다.

콰앙!

귀청을 떨쳐 울리는 굉음.

한 번의 휘두름으로 수십의 적을 휩쓸어 버린다는 패왕의 무도(武道)였다. 과거, 칼질 한 번으로 흑도 최강의 무인 집단이라는 사사림(邪死林)의 일곱 주인을 모조리 베어 죽인 절대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러한 무공에 직격으로 맞은 철문은 흠집 조금만 났을 뿐, 부서지지 않았다.

사내, 송금백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정도도 부족한가.”

그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송금백이 쥐고 있는 검은 길이만 여섯 자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태검(太劍)이었다. 너비도 굉장해서, 몸을 틀면 신체 전부가 가려질 정도였다.

거검(巨劍) 태천(泰泉). 수라제 송금백의 애병이자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신검(神劍)이었다.

“참으로 어렵군. 시대가 지남에 따라 무공 또한 발전하고, 미지의 영역은 더 이상 안개 속에 가려진 신비처(神秘處)가 아니게 되었거늘, 과거의 절대자가 만들어 놓은 철문 하나 부수지 못하다니.”

씁쓸했다.

송금백은 자신의 무공이 중원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교의 소교주 같은 천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아직은 다음 세대가 쫓아올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를 거닐고 있다 생각했다.

‘나 또한 자만한 것이지. 동시대도 아닌, 까마득히 먼 과거의 전설에조차 닿지 못한 무공으로 어찌 천하를 일통하겠다고 한 것인가.’

쿠르르릉.

태천거검이 나직한 울음을 토해 냈다.

송금백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의 자만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됐다. 또다시 위를 향해 달리면 되는 게야. 천하제일이 아닌 고금제일을 위해 달리다 보면, 어느새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경지에 오르게 되겠지.’

자신의 자세, 무공, 미래를 고찰하며 철문을 노려보길 한참.

티리리리링!

연무장 천장에서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렸다.

송금백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연무장을 나섰다. 연무장 밖에는 황곤이 서 있었다.

송금백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무슨 일이신가?”

“성주님!”

상당히 다급한 기색이었다. 송금백은 황곤이 이리 다급해 하는 것은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겐가?”

“교룡창병이 전멸했다는 보고입니다!”

“뭐라?”

교룡창병은 무상 언극이 직접 키운 정예들이었다. 실전 경험은 부족하지만, 하나하나 절정의 무공을 지닌 창술의 귀신들이었다.

“일백이나 되는 창병이 전멸했다고? 누구에게?”

“비요왕입니다!”

순간 송금백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비요왕, 그 계집이?”

황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교룡대장, 언양회가 직접 서신을 보냈습니다! 홀로 살아남아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송금백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언젠가 이빨을 들이밀 줄은 알고 있었지. 하나 이리 빠를 줄은 몰랐거늘, 기어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겐가?”

“그리고…….”

“또 무엇인가?”

황곤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교룡대장이, 서 소교와 함께 있답니다.”

“뭐, 뭐라고?!”

“서 소교와 함께 비요왕을 치러 간다고 합니다.”

비요왕이 교룡창병을 전멸시켰다는 보고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당황스러운 보고였다.

잠시 고민하던 송금백이 차갑게 말했다.

“무상을 부르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라단(修羅團)도.”

“수라단을요?”

“무상에게 수라단을 붙여 주게. 그리고 의천맹에서 파견한 사신단과 접촉시켜서 사라진 마교의 병력을 추적하게.”

송금백의 눈이 매섭게 굳어졌다.

“서 소교…… 자네, 언질도 안 주고 이러긴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