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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335화 (335/774)

335화. 칼자루는 피를 기억하지 않는다 (5)

번쩍!

아무도 없는 대전 안, 태사의에 앉아 잠을 청하던 이천상이 눈을 떴다.

심유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계단을 내려가 좌측 회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순간 멈춰 선 그가 좌측 벽에 걸려 있던 화등 하나를 끌어 내렸다.

달칵! 드르르륵!

화등이 내려가자 돌벽이 안으로 움푹 들어가더니 이내 옆으로 열렸다.

오직 교주만이 아는 비밀 통로 중 하나였다. 이런 식의 비밀 통로가 마신궁은 물론 신교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벽이 열리며 나타난 어두운 계단에 올라선 그는 무려 이각 동안이나 걸었다. 빛 한 점 없는 암흑의 공간에서도 그의 발걸음은 일정하기만 했다.

스륵.

마침내 이천상의 걸음이 멈추었다.

쿠구구궁!

이천상이 선 자리 앞의 벽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없이 어둡던 공간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셨소?”

“…….”

“이것저것 차려 봤는데, 입에 맞을는지 모르겠소.”

한 노인이 하얀 헝겊으로 손을 닦고 있었다.

이천상이 노인 옆의 탁자를 바라보았다. 제법 커다란 탁자 위에는 온갖 종류의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이천상이 물었다.

“술은?”

“있소. 교주께서 평소 드시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품이겠지만.”

“내오게.”

“알겠소.”

노인이 큼직한 술병 두 개를 가져왔다.

쿠구구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려 있던 돌문이 닫히자, 다시 평범한 집의 외벽이 되었다.

이천상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큼직한 창 너머로 다 허물어져 가는 조촐한 주점이 보였다.

“여전하군.”

“청소는 매일 하고 있소이다.”

“청소가 중요한 것 같진 않은데.”

“별수 없잖소? 형법당주가 주는 돈으로는 새 주점을 차리기가 어렵소이다. 뭐, 새로 짓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오지도 않을 테지만.”

“…….”

“한 잔 올리리까?”

창가에서 시선을 돌린 이천상이 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에 서서 잔을 채워 주었다.

“향이 좋군.”

“신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담근 술이외다. 나도 아직 맛보지 못했지.”

이천상이 시원하게 술을 들이켰다.

“어떻소?”

“나쁘지 않아.”

노인이 씨익 웃었다. 늙수그레한 얼굴에 순수한 기쁨이 어렸다.

“교주의 그 말,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실 게요.”

“그런가?”

“물론이오.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의 마신이 내가 담근 술을 마시고 있소이다. 그것만도 영광이거늘 맛이 괜찮다니, 어찌 아니 기쁘겠소?”

“입에 발린 말을 잘하는 성격이었던가?”

“진심이오.”

이천상이 손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게.”

노인이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평소의 노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놀랄 광경이었다.

이 노인은 결코 이리 예의를 차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설령 의천맹주나 철혈성주 앞이라도 이놈 저놈 해 댈 사람이 바로 이 노인이었다. 그런 노인이 이천상을 어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평소의 이천상을 아는 사람들도 놀랄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다. 이천상 역시 이런 소박한 공간에서 남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실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이 천한 늙은이가 감히 교주께 연락을 드릴 일이 무엇이 있겠소?”

“…….”

“이제 때가 된 모양이오.”

“가려는가.”

“그렇소.”

신교에서도 극소수만이 아는 자.

아는 사람들도 그저 강 노인이라고 부르는 이 노인의 이름은 강우경(姜羽硬)이었다.

무색사(無色寺)의 두 수장 중 하나이며, 형인 강우창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아래지만 암살 능력만큼은 그보다 위라는 전설의 자객이 그였다.

“고 당주에게서 연락이 왔소. 정확히는, 소교주가 고 당주에게 시킨 것이겠지만.”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기분이 나쁘진 않으시오?”

“…….”

“소교주는 교주의 명령이 없는데도 꽤 여러 가지 일을 독단으로 자행했소이다.”

“그래서 녀석이 만족한다면, 그걸로 족해.”

무서운 신뢰였다.

강우경이 씁쓸하게 말했다.

“사제지간의 신뢰란 그리도 깊을 수 있는 것이로군. 형제끼리도 골육지쟁이 벌어지는 이 시대에, 참으로 놀랍소.”

어쩌면 그것은 이천상이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는 천하 최강의 마인. 무엇도 그를 속박할 수 없으니, 이런 믿음을 보여 줄 수도 있는 것이다.

“형을 생각하고 있나?”

“그렇소.”

“아직도 그를 원망하나?”

강우경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함이 묻어 나오는, 그러나 대부분의 한(恨)을 털어 버린 웃음이었다.

“세월이 약이라지 않소. 이제는 다 내려놓았소. 아마 다시 그를 만나도, 웃으며 술이나 한잔 건네지 않을까 싶소.”

“무색사가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그렇소. 그래서 의아하오.”

강우경의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

“교주와 대호법을 제외하곤, 신교에서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총군사는 물론 고 당주도 내 과거를 모르오. 고 당주는 나를 그저 정파 무림에서 활동했던 정보원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외다.”

“그렇겠지.”

“한데 소교주는 어찌 알고 나를 소환한 것인지 궁금하오. 혹, 교주께서 언질을 준 것이오?”

“아니.”

“하면 어찌?”

이천상이 잔을 비우곤 말했다. 아직 음식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였다.

“량이는 유독 감이 좋은 편이야. 같은 극마, 대등한 경지라도 녀석의 육감을 따라잡긴 힘들지. 타고난 것이든 경험에 의한 것이든, 혹은 마공 덕분이든 사건과 상황의 본질을 꿰뚫는 그 눈은 가히 신안(神眼)이라 불릴 만해.”

강우경은 조금 놀랐다. 이천상이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 이리 길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직관도 최소한의 정보가 없다면 제 성능을 발휘하기 어렵지. 하오문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한 모양일세.”

“그렇군.”

“어쩌면 소림에서 받은 정보일 수도 있고.”

강우경의 눈이 번뜩였다.

허리 굽은 꼬장꼬장한 늙은이에서, 강호 음지에서 독보적인 아성을 구가한 무색사의 수장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소림…… 교주께서도 소림에 대해 잘 아시오?”

“모를 수가 없지. 소림이 아는 것은 우리도 알고, 우리가 아는 것은 소림도 안다. 본교와 소림은 그처럼 묘한 관계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아닐 테고.”

“묘한 관계라고 했지, 친하다고는 안 했네. 오히려 본교 최고의 적은 의천맹과 철혈성이 아니라, 소림이라고 볼 수 있지.”

이천상이 잔을 내밀었다. 강우경이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아마 자네 형이 아니었다면, 그 구렁이 같은 의천맹주 놈도 소림과 무당을 마비시키진 못했을 걸세.”

“그랬을 거요.”

“자네도 한 잔 받게.”

이천상이 손수 강우경의 잔을 채워 주었다. 강우경은 영광이라는 듯 허리를 숙였다.

“한잔하지.”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그대로 잔을 비운 강우경이 인상을 썼다.

“맛이 별로로군.”

“그런가.”

잔을 놓은 이천상이 손을 들어 보였다.

우우우웅.

큼직한 손 주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손 주변의 경물이 잔뜩 일그러져 보였다.

“시간 길게 끌어서 좋을 것 없겠지. 자네의 무공, 돌려주겠네.”

“그 전에,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소?”

“그러게.”

강우경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혼란이 깃들었다.

“교주께서는 어찌하여 날 살려 준 것이오?”

“그게 궁금했나?”

“그렇소. 나아가 이곳 내성에서 살 수 있게 내버려 둔 것도 나에겐 이해 불가였소.”

강우경이 신교로 들어온 지도 어느새 이십 년이 넘었다.

신교의 철통같은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사람은 아마 천년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그의 은신술과 돌파력은 그렇게나 대단했다.

나아가 호법원의 눈도 속였고, 이내 마신궁에 숨어들어 이천상을 노렸다.

모두를 속이고, 모든 장애물을 돌파한 강우경.

그러나 그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결행의 칼날을 뽑아 들기도 전에 이미 이천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십 년이 지난 과거지만, 아직도 강우경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사의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천상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손짓 한 번, 칼질 한 번도 없이 위압감만으로 자신을 억눌러 버린 살아 있는 마신의 위엄을.

그때, 강우경은 깨달았다.

천마신교는 무수히 많은 마인들이 모여 완성된 ‘집단’이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진짜 힘은 마인들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오직 천마다.

천마의 힘이야말로 천마신교의 전부요, 끝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병력도, 전술도 필요치 않다.

비유가 아니라, 이천상이 직접 무림에 발을 딛는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의아했다. 이천상이 진정 천하를 원했다면, 그 스스로 세상에 나섰으면 될 일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정사(正邪) 양 진영이 모조리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한데 그는 어찌하여 이곳에서 웅크리고 있을까? 세상을, 중원을 손에 넣고 싶지 않은 것일까?

“신교 입장에서, 나아가 교주의 입장에서도 난 죽어 마땅할 놈이었소. 교주를 암살하려 했으니 만 번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판이었지. 한데 교주께서는 오히려 이곳에 내가 살 집을 마련해 주었소.”

“그랬지.”

“왜 그러셨소?”

“그냥 그러고 싶었네.”

“……?”

“자네에게 흥미를 느꼈지. 죽이기 아깝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신교에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이곳에서 살라 명한 것뿐이야.”

“그게…… 전부요?”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강우경이 한숨을 쉬었다.

“교주의 변덕 덕분에 이 늙은이가 살 수 있었던 것이로군.”

“그런 셈이지.”

“한때는 이런 생각도 했소. 교주가 사람들을 시켜 나를 관찰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무색사의 살법(殺法)을 교묘히 캐내려는 수작이 아닌가 생각했소.”

“그따위 잡술, 궁금하지도 않아.”

모욕이라면 모욕이지만 강우경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상대가 이천상이라면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유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

“중요한 것은 결과지. 변덕이든 뭐든, 자네는 이곳에서 이십 년이 넘도록 살았네. 그리고 지금, 나의 후계자가 자네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에게 도움이 되어 주려 하고 있어.”

“…….”

“칼자루는 피를 기억하지 못하네. 그저 휘둘러졌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야. 나의 선택이 옳았음은 지금 이 순간 증명되었네.”

강우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못 당하겠소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몸을 돌려주시오.”

우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우경의 몸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천상이 뻗고 있던 손을 서서히 돌렸다.

우두둑! 우두두둑!

살벌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굽은 허리, 크지 않은 체구의 몸이 빠른 속도로 변했다.

손도 대지 않고 축골공을 구사한다. 이천상의 무한한 힘이 강우경의 신체를 너무도 손쉽게 변모시키고 있었다.

강우경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이천상이 가히 신(神)에 이른 능력을 보여 주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근골이 뒤틀리는 중인데 고통이 없을 리 만무했다. 그는 지금 말 그대로 분근착골(分筋錯骨)의 고통을 부동심으로 견뎌 내고 있는 것이다.

육체가 바뀌어 갔다.

빠르고 섬세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다 되었네.”

“후우우.”

눈을 감고 숨을 고른 강우경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더 이상 허리가 굽은 강 노인은 없었다. 곧게 펴진 허리와 좋은 근질을 가진 팔다리, 말랐지만 탄탄하다는 느낌을 주는 강건한 육체를 가진 사내가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강우경의 얼굴에 솔직한 기쁨이 어렸다.

이천상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몸이 많이 굳었을 것이네. 다만 단전의 크기는 이전보다 훨씬 커졌으니, 기량을 되찾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걸세.”

“고맙소.”

“이만 가 보게.”

강우경이 미소를 지었다.

“훗날, 다시 뵐 수 있었으면 하오.”

스르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우경이 사라졌다.

어떻게 사라졌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신기(神技)에 이른 은신술이었다.

재차 잔을 채우던 이천상은 문득 음식에 눈을 돌렸다.

그가 젓가락으로 잘 볶아진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간이 세군.”

이천상이 창가로 눈을 돌렸다.

투명한 그의 눈에 은은한 마기가 감돌았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세상에 나설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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