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운명 (1)
“뭣이?!”
쾅!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난 황보윤의 얼굴이 대추처럼 붉어졌다.
“몰살을 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사, 사실입니다. 확인된 바로는 화정리의 주민들이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죽었으며, 파견된 천왕권사(天王拳士) 삼백 전원도 몰살을 당했습니다!”
천왕권사 삼백.
한 명, 한 명이 백전을 연마한 고수가 천왕권사였다. 그만한 인원 삼백이면 어지간한 중소 문파 정도는 반 시진 만에 쓸어 버릴 수 있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대체 누구냐? 철혈성이냐? 설마 마교?!”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콰르릉!
황보윤이 휘두른 주먹에 가주실 벽면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여태 적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무엇을 한 게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흔적을 보았을 때, 그리 많지 않은 숫자임은 확실합니다!”
“많지 않은 수라니? 그 많은 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삼백이나 되는 권사들을 쓸어 버렸는데?”
“예! 최대로 잡아도 오십 안팎이라 합니다!”
황보준의 눈이 흔들렸다.
들끓는 분노는 여전하되, 머리 한구석은 차갑게 식었다.
‘오십 안팎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그럴 수 있다.
그 오십밖에 안 되는 병력에 십대고수급 강자가 끼어 있다면, 개개인의 무공이 초절정에 육박하는 고수들로 구성되었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문제는 천왕권사들보다 화정리의 주민들이었다.
‘고작 오십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다니? 그건 불가능해!’
힘의 문제가 아닌 숫자의 문제다.
화정리에 거하는 주민의 숫자는 일천이 훌쩍 넘는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오십밖에 안 되는 숫자로는 사방으로 도망가는 주민들을 모두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자신보다 한 수 위의 강자를 손쉽게 죽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화정리는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지형이기에 더더욱 어렵다.
백번 양보해서 도망친 주민을 모조리 찾아 죽였다고 해도, 그 소문이 산동 전체로 일파만파 퍼졌을 것이다.
말하자면 적은, 그 많은 인원을 화정리 안에서만 싹 정리해 버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고도 오십 안팎이다?
“화약이나 암기가 동원된 흔적은?”
“……없습니다. 나아가 적측으로 예상되는 시신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압도적인 승부였다는 뜻이다. 적은 한 명도 안 죽었고, 이쪽 병력만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황보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비상령을 내려라. 파견 나간 고수들도 모조리 불러들여!”
“알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본가는 적의 정체를…….”
그때였다.
쿠구구궁!
황보윤의 눈이 번쩍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
콰르르릉! 콰앙!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벽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이곳 가주실까지 진동이 전해질 만큼 굉장한 충격파였다.
잠시 후, 한 줄기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보가주는 새로운 산동의 주인을 영접하라!”
황보의 권사라면 누구라도 분노를 금치 못할 망언이었다.
하지만 황보윤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기(氣)가……?!’
목소리에 실린 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히 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리따운 음성에 담긴 기는, 아예 어떠한 선을 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이하고 흉포했다.
‘설마 마기?!’
“가주님!”
총관이 문으로 향했다.
“어떤 상황인지 제가 직접 가서……!”
“총관은 원로분들을 모셔 오시게.”
“예, 예?!”
황보윤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직접 가야겠어.”
* * *
“소교주님! 놈들의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알아!”
콰르르릉!
천마도에 번개가 휘몰아쳤다.
무서운 마력을 담은 칼날 위로 위협적인 번갯불이 피어올랐다. 뇌공만마일식이 펼쳐지려는 것이다.
번쩍! 콰앙!
세상을 사선으로 갈라 버린 칼질.
강철도 쪼개 버릴 무시무시한 일격이었지만, 위력이 충분하게 실리진 않았다.
“끄으응!”
하지만 도법 일격에 담긴 힘은 다름 아닌 군림마황기였다. 운룡극(雲龍戟)으로 도기를 막아 낸 곡천삭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잠깐이나마 주춤하게 만들 정도의 힘은 넘치도록 담긴 일격이었다. 살왕기차가 무서운 속도로 멀어졌다.
마동필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올라갔는지, 서량이 마차 천장에 서서 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교주님!”
“왜?”
“차라리 적당한 지형에서 저들을 끊어 버리는 것이……!”
“안 돼!”
마동필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서량의 말에 반박하는 그였다. 그만큼 적들의 파상공세가 위협적이라는 뜻이리라.
“우리는 이대로 황보까지 간다! 놈들도 황보로 유인시켜야 해!”
“하지만…… 저희는 물론 저들이 황보로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티이이잉!
“크아아악!”
언양회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허벅지가 꽂혀 있는 창대를 튕겨 본 서량이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황보의 대문을 뚫으면, 놈들도 무조건 진입한다.”
난전을 유도하겠다는 뜻이었다.
마동필은 서량의 생각을 깨닫고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마차에…….’
굳이 따지자면, 서량은 적을 단칼에 죽이는 편이었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쪽이 아니었다. 적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는 부류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언양회를 이 상태로 만들어 놓으라 했을 때, 마동필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제야 알겠다.
‘적의 적은 친구라…….’
마동필은 새삼 감탄했다.
‘그 짧은 순간에 어찌 거기까지 내다 보셨을까.’
비요왕이 황보세가로 향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황보세가는 그냥저냥 건드려 볼 만한 집단이 아니었다. 세가 소가주의 팔을 뽑아 버린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 문제를, 갑자기 등장한 저들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철혈성의 병력이 무턱대고 침입한다면, 그리고 저들 역시 비요왕과 적대 관계라면 상황을 무척이나 복잡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창칼을 들고 적아의 구분 없이 싸우게 될 때.
바로 그때, 서량은 비요왕을 칠 것이다.
“저들이 언양회를 포기하진 않겠습니까?”
혈전단주 우영은 진심으로 인질의 생사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인질의 구출보다 성주의 명령 수행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순간 마동필은 말을 해 놓고도 의문이 들었다.
‘성주의 명령? 그게 대체 뭐였지?’
우영은 말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느냐고.
언양회를 구출하고,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이곳으로 왔노라고 말했다.
‘그럼?!’
서량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의 목표는 단순히 이 애송이를 구출하는 게 전부가 아니야.”
“……소교주님을?”
“그래. 성주는 날 잡으려는 거다. 그래서 육양마극까지 동원한 거야.”
후욱.
마동필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서량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뭐가 되었든 눈치 한번 빠르군. 과연 사파제일의 거인이라 불릴 만해.”
철혈성의 뒤통수를 날리려는 서량의 의도를 진즉에 간파한 것이 분명했다. 아마 혈전단 말고도 또 다른 병력을 파견해 북상했던 신교의 고수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의천맹에서 파견한 병력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
“몰래 뒤통수 한 번 날리려 했더니만, 이리 즉각적으로 움직여 주시는군. 이제부터 더 바빠지겠어.”
물론 그 바쁨은, 비요왕을 잡은 후가 될 것이다.
비요왕을 떠올린 서량의 눈이 순식간에 벌겋게 충혈되었다.
‘비요 할매.’
현숙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무자비한 성정으로 끝까지 자신을 몰아친 악녀.
어떻게든 한 방 먹이긴 했지만 결국 그게 전부였다. 그를 죽음의 늪으로 빠트린 놈은 담사영이지만, 천하진 인생의 마침표를 찍어 버린 이는 비요왕이었다.
아직도 생생했다. 그 살벌하기 짝이 없는 손에 자신의 목이 뽑혀 나가는 느낌이.
처음 알았다. 사람은 목이 뽑히고도 한동안 정신이 남아 있다는 걸.
잘 삶은 백숙 다리처럼 뽑힌 머리통으로, 비요왕의 흉포한 얼굴과 찢어지는 웃음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아프다.’
환상통(幻想痛)이라고 해야 할까.
목이 버젓이 붙어 있지만, 당시에 자신을 엄습했던 그 절망감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비요왕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목과 쇄골 부근이 불에 탄 듯 아파 왔다.
‘목이 말라.’
화아아아악!
서량의 몸에서 불꽃 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마동필의 묵직한 살기와는 전혀 달랐다. 훨씬 더 어둡고 원초적인 짐승의 살기였다.
그때, 한 줄기 푸른 기운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콰앙!
서량의 몸이 휘청거렸다.
천마도의 널찍한 도배로 막아 냈는데도 몸이 뒤뚱거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어느새 쫓아온 곡천삭이 강력한 창풍(槍風)을 쏘아 낸 것이다.
“……빠르군.”
휘이이이이잉!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매서운 바람이 몰려들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빠른 속력 때문에 몰아치는 바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바람이었다.
곡천삭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
화경에 달한 그의 눈에는 보였다. 서량의 등 뒤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폭풍의 힘이.
한낱 인간이 다룰 수 없는 대자연의 힘이 칼날로 몰려들어, 천지를 찢어발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르륵!
서량의 우측 안광이 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지저 깊숙한 곳, 구유(九幽)의 세상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겁화(劫火)가 끓어오르는 살의를 타고 우안(右眼)에 자리 잡았다.
파지지직!
좌측 안광은 시퍼런 명멸을 반복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너머, 제석(帝釋)을 잡아먹은 마라(魔羅)가 피워 내는 악뢰(惡雷)가 광기를 타고 좌안(左眼)에 자리 잡았다.
좌청우홍, 청홍의 마안(魔眼)이었다. 비요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 마공이 동시에 달아올라, 서량의 육신을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세상에 풀어내기 위해, 천마도는 자연스레 구유인화도법의 구결을 따라 폭풍을 불러냈다.
거대한 칼을 들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곡천삭을 내려다보는 서량.
‘헉!’
콰드드드득!
곡천삭이 신법을 멈추었다. 두 발이 땅에 기다란 고랑을 만들어 냈다.
콰르릉! 파지지지직!
몰려오는 폭풍이 조금씩, 조금씩 잠잠해졌다. 그 대신 멀어지는 살왕기차 뒤로 천둥 번개가 휘몰아쳤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실제로 천둥이 치고 뇌전이 번쩍였다.
잠시 후, 곡천삭 뒤로 우영과 혈전단이 달려왔다.
“어르신!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
“어르신!!”
깜짝 놀란 곡천삭이 우영을 바라보았다.
우영이 인상을 썼다.
“혹시 다치셨습니까?”
“……아닐세.”
“어서 가시지요!”
“알았네.”
파아아아앙!
재차 혈전단을 앞질러 살왕기차를 쫓는 곡천삭.
그의 얼굴에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대체 무엇을 본 게지?!’
산을 통째로 날려 버릴 듯 몰려오는 무형의 폭풍.
그리고 그 안에서 번뜩이는 청홍의 마안이 곡천삭의 뇌리에 깊숙히 박혀 버렸다.
* * *
반나절 뒤.
“소교주님! 황보입니다!”
“좋아!”
“그, 그런데……!”
마동필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보세가의 외원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번쩍!
서량이 몸을 돌려 황보세가 측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퍼어어어어엉! 파지지직!
하늘 높이 치솟은 회색빛 뇌전.
순간 서량의 얼굴에 환희가 어렸다. 그의 눈에, 곡천삭이나 혈전단은 물론 황보세가의 무너진 외원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저 회색빛 뇌전만이 보였다.
무지막지한 농도를 간직한 절대의 사기(邪氣)만이.
“비요왕!”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