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복수라는 이름의 감로주 (4)
“후우, 후우.”
궁위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푸화아악!
시커먼 장검이 팔화의 마지막 일인의 배를 갈랐다.
쏟아지는 핏물과 조각나 떨어지는 내장은, 담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두근두근.
마동필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치이이익!
피로 뒤덮인 흑혈마검에서 검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피를 빨아먹어서 본신의 마력을 채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아아악!
마검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이전보다 배는 더 살벌해졌다.
마동필이 궁위에게 검을 겨누었다.
“마지막이군.”
궁위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미친!’
저 광기 어린 검사의 경지는 자신보다도 한 수 위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절대 크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인원 없이 일대일의 결전이었다 해도, 수백 초를 나눌 만한 수준의 격차인 것이다.
한데도 저놈은 다 베었다.
자신을 제외한 구장, 팔화, 칠사, 육운의 절정고수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고 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정신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실전 감각이나 마병의 이득이라 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저 뭔가를 넘어섰다.
저 검사는 범인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어떠한 신념을 갖고 싸우는 것 같았다. 그 신념이 너무나도 깊고 대단해서, 그 많은 고수를 모조리 참살하고도 다시 검을 세울 수 있는 정신력을 만든 것 같았다.
화르르륵!
마동필의 몸에서 또다시 황금빛 마기가 타올랐다.
이전에 비해 그 농도나 발산 정도가 확연히 낮아진 듯했다. 심지어 명멸을 반복하는 것이, 당장이라도 사그라들 듯 위태로워 보였다.
전신에 자상과 열상이 가득했고, 그만큼 피도 많이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궁위는 마동필을 가벼이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일대일로 마주함에, 어느 때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패력시가 얼마나 남았지?’
얼마나 정신없이 쏴 댔는지, 평소라면 보지도 않고 알았을 화살의 수조차 긴가민가했다.
끝까지 마동필에게 시선을 집중한 궁위가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두 발이로군.’
화살이 워낙 굵은 탓에 화살통에 넣을 수 있는 패력시의 개수는 고작 열둘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십 발은 쐈을 것이다. 쏘아 낸 패력시를 수거해 다시 쏘기를 몇 번 반복했던 것이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단 두 발로 승부를 봐야 했다. 두 발로 죽이지 못하면 무심뢰까지 써야 하는데, 내력을 심하게 소모한 지금 무심뢰는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다.
스륵.
마동필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갑이 흔들리며 궁위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가 패력시 한 발을 꺼내 들었다.
까드드득.
시위를 당기는데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패력시를 건 광현궁(光絃弓)의 장력은 엄청났다. 일류고수도 몇 번 쏘아 내고 나면 어깨가 뻐근해질 만큼 시위가 무겁고 탄력적이었다.
화살도, 내력도 한계지만 이젠 육체도 한계였다.
후우우우웅.
패력시의 화살촉에 붉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치이이익!
흑혈마검에도 황금빛 검기가 일렁였다.
주르륵.
궁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검기의 위력은 이전보다 확연히 줄었지만,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독해지고 있었다. 그 살기가 증오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신념으로 증폭되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비로소 궁위는 깨달았다.
두 발? 아니다.
오로지 한 발이다.
저 이름 모를 검사는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오로지 한 번의 생사결을 상정하고 싸워 왔다. 서른 명이 넘는 고수들과 대치하는데도, 오직 한 명과 싸우듯 온 정신을 집중했던 것이다.
여러 대의 화살로 매 순간 기회를 포착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승부를 가리고 있었다.
그러니 저 검사를 죽이기 위해선, 그 역시 이 한 발로 목숨을 끊어 낸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
어깨가 욱신거리고, 허리도 끊어질 듯 아파 왔다.
화살촉을 감도는 내력은 끊임없이 휘돌고 있었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내력 소모가 상당했다.
‘그래도 참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휘이이잉!
몰아치는 눈보라 속, 한 송이 눈이 마동필의 눈에 들어갔다. 순간 그가 눈을 깜빡였다.
궁위의 눈이 번뜩였다.
파아아아앙!!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파공성이 울리는 일격이었다.
아주 조금도 휘어지지 않은 직사(直射)였다. 번개처럼 쏘아진 패력시는 어느새 마동필의 가슴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궁위의 얼굴에 환희가 어렸다.
아직 저 검사는 검을 들지도 않고 있었다.
‘이겼…….’
그때였다.
파지지직! 콰르르릉!
궁위의 등 뒤에서부터 뿜어진 엄청난 충격파가 그를 휩쓸었다.
“크아악!”
쾅! 터어엉!
몇 번이나 땅을 구른 그가 왈칵 피를 토했다. 충격파에 깃든 마기와 사기가 내부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고수들의 경합에서, 발경의 충격만으로도 내상을 입는다는 얘기를 종종 들어 봤다.
하지만 이토록 멀리 떨어진 거리까지, 이 정도 위력을 가진 충격파가 전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초절정고수의 장력도 이리 강하진 않을 것이다.
주르르륵.
궁위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내공 소모와 관계없이, 이미 내장의 삼 할 이상이 뭉개져 버렸다. 내력이 충만하더라도 고작 반 각 정도 목숨을 연장할 수 있을 뿐, 결국 죽음에 이를 상태였다.
‘이렇게 죽다니. 이 궁위가.’
그나마 다행인 건 마지막 승부에서 일대 난적을 죽인 것이랄까?
그때였다.
‘그림자?’
궁위가 덜덜 떨리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컥!”
그의 앞에 마동필이 서 있었다. 궁위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린 패력시를 왼손에 들고 있는, 여전히 금빛 검기를 피워 내고 있는 무적의 검사가 거기에 있었다.
마동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죽어라.”
마지막을 앞두고, 제법 괜찮은 일격이었다는 말을 해 줄 만도 할 텐데.
흑혈마검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궁위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궁위는 의아했다. 분명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어야 할 화살이 왜 그의 손에 잡혀 있는지, 이 충격파에서도 저자는 어찌 멀쩡할 수 있는지.
콰드득!
악력으로 패력시를 부러트려 버린 마동필이 비틀거렸다.
“후우욱!”
그가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패력시의 회전력에 찢긴 손바닥엔 피가 흥건했다.
‘힘들었다.’
두 절대자가 부딪친 충격파에 내가중수법의 묘리를 섞어 궁위를 쳤다. 만약 충격파에 그들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면, 감히 시도조차 못 했을 공격이었다.
치이이익!
상처가 난 왼손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펑펑 쏟아지는 눈의 한기와, 사기로 범벅이 된 상처를 치유하는 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든 그가 저 멀리, 두 고수의 공방을 바라보았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소교주님.’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반드시 이기십시오.’
그래, 그렇다.
소교주님은 지금껏 모든 싸움에서 이겨 오셨다. 이번에도 분명히 이기실 것이다.
비요왕의 목숨을 거두고, 당당하게 생환하실 것이다. 그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돌아오시면 여쭤볼 것이다.
비요왕에게 외쳤던 말씀이 무엇인지.
살왕은 무엇이고, 천하진이란 말은 또 무엇인지.
왜 비요왕더러 자신을 천하제일살수 천하진이라고 했는지,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노라고 했는지를.
파지지지직!
시퍼런 전광이 황보세가 가주전의 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갈아 내고 있었다.
퍼어어엉!
사위를 휩쓰는 폭음에 곽소교의 몸이 비틀거렸다.
번쩍!
서량의 질주는 쾌속했다.
구유마공을 개방하여 달릴 때는 한 줄기 유성 같더니, 군림마황기를 개방하고 달릴 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벼락이 따로 없었다. 번쩍하는 순간, 이미 그의 신형은 곽소교의 전면에 나타나 있었다.
퍼어억!
서량의 몸이 들썩였다. 우측 안면 앞에 세운 팔뚝에 곽소교의 정강이가 닿아 있었다.
이전보다 한층 빨라진 속도를 보여 주고 있지만, 곽소교의 반응 속도 역시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토록 빠른 신법에도 곽소교는 충분히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서량의 좌수가 뇌전의 마기를 품고 전면으로 휘둘러졌다.
파지지지직!
위협적인 전광이 휘몰아쳤다. 곽소교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쾅!
“크읍!”
처음으로 곽소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파직! 파지직!
이번에도 양팔을 교차해 막아 냈지만, 그 충격과 여파가 이전과는 판이했다.
검게 그을린 소맷자락이 넝마처럼 너덜거렸다. 사황극천기로 보호받던 의복이 군림마황기의 패력강공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미친!’
곽소교가 재차 비요음장을 때려 넣었다.
콰앙!
충격을 받은 것은 서량도 마찬가지였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서량의 안색은 이전보다 한층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우우우우웅!!
서량이 다시 허리를 세웠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고, 내상도 조금 더 깊어졌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으며, 사위를 짓누르는 위압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마신의 위용이었다. 어떤 무공이든, 어떤 공격이든 여유롭게 받아 주겠다는 절대자의 그림자가 거기에 있었다.
곽소교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푸른 눈으로 자신을 굽어보는 서량. 순간 곽소교는 그의 눈빛에서 사파제일인 수라제 송금백의 모습을 보았다.
“어디서 감히!”
울컥 치미는 분노가 사공을 더 강하게 불살랐다.
마치 구유마기를 극한까지 뽑아냈던 서량의 모습과 비슷했다. 전신을 감싼 회색빛 안개 때문에 어느새 곽소교의 몸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바로 천하제일이다! 어느 누구도 내 머리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치리리링!
곽소교의 손톱이 순간 한 자 길이로 길어졌다. 하얗던 색도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서량의 눈에서 벼락이 쳤다.
저 피처럼 붉어진 손톱은 분명 과거 자신을 공격했던 그때와 똑같았다.
곽소교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정말 그 멍청한 살수 놈이라고? 그렇다면 이것도 기억하려나?”
푸스스스스.
붉은 손톱 주변으로 은은한 녹색 연기가 치솟았다.
“사사독조(邪死毒爪)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완성하지 못했던 조공(爪功)이지.”
후우우웅!
회색빛이던 사황극천기가 손톱 주변에서 생성된 연기처럼 온통 녹색으로 물들었다.
“절반밖에 연성하지 못한 독조로도 네놈을 죽…….”
파아아앙!
서량은 더 듣지 않았다. 그저 마황군림보를 시전, 곽소교의 좌측 전면으로 움직여 천마도를 휘두를 뿐이었다.
그녀의 말에 흔들려서가 아니었다. 말을 하는 도중, 극히 미약한 빈틈을 발견했기에 공격한 것이었다.
거대한 칼날이 곽소교의 허리를 두 동강 낼 기세로 휘둘러졌다.
카가가강!
붉은 손톱에 천마도의 도로(刀路)가 막혔다.
곽소교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병신 같은 자식! 빤히 보이는 그따위 공격으로 어딜 넘봐!”
캉!
“어?”
곽소교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반면 서량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한기를 머금은 벼락같은 안광으로 곽소교를 주시할 뿐이었다.
다만 천마도에 더 강한 마기를, 더 강한 힘을 실었다.
카가가강!
“큭!”
곽소교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옆으로 밀려났다.
서량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 사신(邪神)이 천마보다도 강했다고 믿나?”
“이이익!”
곽소교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응 속도도, 무공의 위력도 분명 자신이 위였는데 왜 갑자기 이리 밀려 버린단 말인가?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럴 수는 있겠다만 적어도 사신이란 놈이 천마를 이기지는 못했을 것 같군.”
우우우우웅!!
천마도에 퍼붓고 있던 내력은 그대로 둔 채, 그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공간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좌수 장심(掌心)에서 흘러나온 마황기가 주변 경관을 마구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천자마(天子魔), 하늘을 농락하는 욕계마왕의 손.
능천마라수(凌天魔羅手)였다.
“네년의 반쪽짜리 무공은 잘 구경했으니, 이제부터 내 욕심을 채우겠다.”
공간을 지우는 능천마라수가 곽소교에게 작렬했다.
퍼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