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복수라는 이름의 감로주 (5)
콰앙!
곽소교의 몸이 황보세가의 가주실을 통째로 부수고 날아갔다.
이전에도 성벽을 뚫고 구른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으드득!”
곽소교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의 안색은 서량만큼이나 창백해진 상태였다. 입가에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고, 양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강하다?!’
이번 수공(手功)은 엄청나게 강했다.
그야말로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경이로운 무공이었다. 공기를 비틀어 내고 전신을 우그러트리는 충격을 주는데, 세상에 이런 무공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더 대단한 것은 이토록 수준 높은 무공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상대의 깨달음이었다. 전반적인 무학의 성취는 자신이 높지만, 방금 구사했던 수공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맛이 괜찮나?”
“이, 이놈.”
“자, 한 번 더 막아 봐라.”
쿠구궁!
얼마 남아 있지도 않던 가주실의 외벽이 모조리 안쪽으로 우그러졌다.
공기는 물론 공간 자체를 비틀고 찌그러트리는 마력이었다. 서량이 원하는 범위 안에서, 중력(重力)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듯했다.
‘큭!’
재빨리 후방으로 물러나려던 곽소교는 순간 당황했다.
‘속도가…….’
느려졌다.
저 미친놈의 수공이 발하는 경력의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의 중력이 제멋대로 어그러져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의 행동에도 극심한 제약을 주고 있었다.
화경의 경지를 깨달았기에 다행이었다. 이 일격에 적중당했다면, 초절정고수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전신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어딜.”
우둑!
‘흡!’
곽소교의 왼팔이 밑으로 훅 꺾였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 어깨를 휙 돌려 팔꿈치가 역으로 부서지는 것을 면했다. 하지만 공간을 잡아 비트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팔꿈치 바깥쪽 관절이 뻐근했다.
‘빠져나가야 해!’
갑자기 기질이 달라지더니, 감히 상상도 못 했던 무공을 보여 준다.
대체 이 무공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이 무지막지한 역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곽소교는 사황극천기의 공력을 십이 성으로 끌어올렸다.
화아아악!
회색과 녹색이 뒤섞인 연기 같은 사기가 능천마라수의 역장 안을 꽉 채웠다.
후웅!
‘된다!’
여전히 강한 압력이 느껴졌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몸이 자유로웠다. 이제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곽소교가 다리에 힘을 강하게 주었을 때.
피이이이잉!!
“헉!”
그녀의 몸이 예상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속도에 곽소교의 중심이 단번에 무너졌다.
그녀가 역장에서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서량이, 그 순간 능천마라수를 거두어 버린 것이다.
파아아악!
허를 찌른 무공의 회수.
그 다음은 공격이었다. 마황군림보로 최적의 공간을 찾아 접근한 서량이 천마도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적!
‘헉!’
사방이 얼어붙었다. 삽시간에 번져 나간 무시무시한 한기가 곽소교의 사기를 흩어 내고 그녀의 피부로 침투했다.
인화도법 삼 장, 혈규대홍련이었다. 구유마공으로 군림마황기 상의 무학을 펼친 것과 같이, 군림마황기로도 구유인화도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범위가 축소되고 위력도 반감되었다. 그러나 준비 시간이 없는 만큼 속도는 더 빨랐다. 기습이라 한다면 이만한 수법을 찾기 힘들 것이다.
카아아앙!
사황극천기가 하체를 잠식한 대홍련의 한기를 한순간에 몰아냈다.
한순간이라고는 하나, 그들 정도의 고수에게는 충분히 빈틈이 드러날 만한 시간이었다. 곽소교 역시 그것을 예상했고, 사황극천공을 재차 십이 성 공력으로 개방했다.
‘……?!’
순간 곽소교의 눈에 당황이 깃들었다.
‘없다?’
곧바로 후속타가 날아올 거라 생각했다. 누구라도 빈틈을 공략해 승기를 노릴 만한 순간이었다.
한데 상대는 공격을 가하지 않고, 그 순간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뒤!’
퍼어어엉!
“컥!”
곽소교가 무서운 속도로 튕겨 나갔다.
생각보다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침투하는 공력에 전신이 삐거덕거렸지만, 내상을 입거나 피부가 찢기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는 역장이었다.
후욱!
“크으윽!”
서량은 능천마라수의 역장을 미리 둘러쳐 놓은 곳으로 곽소교를 후려쳐 보내 버렸다.
우둑! 우두둑!
곽소교의 전신 관절에서 살벌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 한 군데도 부러지거나 뒤틀리진 않았지만, 충격까지 없을 순 없었다.
‘말도 안 돼!’
수공(手功), 장법(掌法), 백타(白打).
맨손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무공을 말한다. 설령 거기에 내력을 섞어 무형의 기를 발출한다 해도, 투로와 타격에 있어서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놈의 수공은 달랐다.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는 도법도 대단했지만, 이 수공은 단순히 상대를 타격하고 부수는 데에서 끝나질 않았다. 공간을 점하고, 그곳의 중력과 압력을 멋대로 비틀고 있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역시 되는군.’
수없이 많은 실전, 잠을 자는 행위조차도 무(武)와 결부시킨 수련.
그리고 머리 한구석에 콱 박혀 있는 이천상의 무리(武理)가 능천마라수를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기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도칠가의 감찰을 모두 끝내고 돌아와 이천상과 대련했을 때.
그때, 이천상은 처음으로 능천마라수를 꺼내 들곤 단 일초 만에 서량을 굴복시켰다.
내공의 고수일수록 기에 대한 활용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이천상은, 자신의 기와 천지자연의 기를 동조시켜 감각에 잡히는 온갖 외물에 간섭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지금의 서량으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러나 그때의 대련에서, 서량 역시 동조의 방법을 깨우친 바 있었다.
물론 아는 수법이라고 다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수만, 아니 수십만 번의 연마와 실전을 겪고 나서야 자신감 있게 펼칠 수 있는 경지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곽소교와 싸우기 전까지는, 서량도 감히 쓸 엄두를 못 낸 수법이었다.
상대가 곽소교이기에.
그녀의 무시무시한 사기(邪氣)를 군림마황기에 종속시킬 수는 없지만, 사공 역시 마(魔)와 동류이기에 그녀의 힘을 빌려서 원하는 공간을 억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크아아압!”
곽소교의 양손이 일순 여덟 개로 늘었다.
실제로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육안으로는 실제와 환상의 구분이 어려웠다.
퍼퍼퍼펑!
여덟 개의 손에서 뿜어진 장력이 능천마라수의 공간 위로 연달아 쏟아졌다.
쿠구궁!
공간이 뒤흔들린다. 곽소교를 압박하고 있던 능천마라수의 압력이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여기까지인가.’
곽소교는 본능적으로 벗어나려던 것일 뿐, 그 공간을 부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라수의 역장을 내부에서부터 박살 내고 있었다.
압력이 곽소교의 무공을 억압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는 증거였다. 속도와 움직임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무공 구사까지는 봉인할 수 없다.
콰아앙!
마라수의 역장이 깨졌다.
파아아아앙!
동시에 곽소교가 서량에게 달려들었다. 방금까지의 치욕을 갚아 주겠다는 듯, 창백한 얼굴 위에 번뜩이는 한 쌍의 안광은 귀신처럼 흉흉하기만 했다.
쩌저저정!
팔비(八臂)의 장력과 조공(爪功)이 미친 듯이 천마도를 강타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서량의 몸이 아니라 칼을 노렸다. 서량의 몸에 타격을 주면 칼의 위력도 약해질 것이 분명하거늘, 굳이 칼을 때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곽소교의 선택에 서량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알고 있군.’
천마도를 누가 만들었던가.
바로 구대천마, 살아 있는 마의 화신인 이천상이 직접 제련한 마병이다. 혈목사기를 빨아들인 후, 완전히 봉인된 그 칼 안에는 이천상의 선천마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서량이 구유마공을 내려놓고 군림마황기를 쓰는 이유였다. 미세한 차이지만, 천마도를 들고 있을 때 군림마황기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상대가 사마공(邪魔功)을 익힌 경우에 한해서 천마도와 군림마황기의 합작은 보다 강한 출력과 안정성을 지닌다. 종이 한 장 차이의 격차를 줄인 것은 군림마황기가 아니라, 군림마황기와 천마도의 합작이었던 것이다.
곽소교 역시 그것을 깨닫고 천마도를 떨쳐 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천마도의 칼날을 후려치면 그 충격은 손잡이로 전달될 것이며, 결국 서량의 손에도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서량의 발이 움직였다.
퍼어어억!
굵고 기다란 다리가 곽소교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철 기둥도 휘어질 것만 같은 강한 타격이었다. 곽소교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러나 곽소교는 끝까지 천마도를 노렸다.
카아아아앙! 치이이익!
서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마도를 단단히 쥐고 있는 그의 양손에서 회색빛 연기가 치솟았다.
콰아아앙!
곽소교의 양손이 뒤로 튕겨 나갔다. 서량이 천마도의 도신에 폭산경을 연달아 두 발이나 터트려 버린 것이다.
손이 튕겨 나가자 몸의 중심도 흔들렸다. 서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퍼어억! 퍼억!
“크윽!”
자루 끝으로 한 번, 그리고 좌측 상단으로 휘둘러져 쇄골을 찍어 내리는 각법까지.
연이어진 묵직한 타격에 곽소교의 몸이 땅에 파묻혔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반격을 하기까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서량은 냉정하게 천마도를 쳐들었다.
파지지직.
천마도의 도신에서 시퍼런 뇌광이 이글거렸다. 일격에 반쪽을 내 버릴 기세였다.
부우우웅!
천마도가 휘둘러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그리고 묵직하게.
허공에 벼락의 잔영을 남기며 휘둘러진 천마도가 단숨에 곽소교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끝인가.’
콰아아앙!
“커헉!”
서량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날아간 그의 몸은 폐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너트리고 나서야 멈추었다.
‘이런.’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의 등 뒤로 푸른 마기가 불꽃을 튀기며 명멸을 반복했다.
일순간의 타격으로 군림마황기가 툭툭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정신이 날아갈 뻔했을 만큼 무지막지한 일격이었다.
‘마황군림보로 몸을 빼지 않았다면 죽었다.’
섬뜩했다.
분명 이번 칼질로 곽소교를 벨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발산한 이 충격파는 또 뭐지?
“좋은 걸 배웠어.”
서량이 고개를 들었다.
곽소교가 흉흉한 살기를 뿜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엔 사선으로 그어진 깊은 도상(刀傷)이 새겨져 있었다.
피는 나지 않았다. 마황기의 열기로 상처가 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끔찍하고 사이해 보였다.
“기와 기를 동조해서 공간을 장악한다…… 그렇게까지 할 순 없었지만 말이야.”
“……!”
“내 무공을, 한순간이나마 더 빠르게 펼치는 건 가능하군. 그렇지?”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곽소교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마치 날이 잘 선 칼로 피부를 삭삭 긁어내는 듯했다.
“그래, 네 말대로 사신은 천마를 이기기 어려웠을 거야.”
투두두둑.
그녀의 양손에 자라났던 붉은 손톱이 중간부터 뚝 부러졌다. 그녀 자신이 일부러 부러트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천마를 이길 수 있어. 네가 익힌 것이 천마의 무공이 확실하다면 말이지.”
콰앙!
천마도로 땅을 찍고 일어난 서량이 서늘하게 웃었다.
“어디 확인해 볼까?”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
“가둬 두고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팰 생각이었지.”
“하지만 실패했잖아?”
“네 말이 맞다.”
후우우웅!
땅에서 뽑혀 나온 천마도가 서량의 손을 벗어나 허공에 떠올랐다.
곽소교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천마도로 펼치는 이기어도술(以氣馭刀術)에 섬뜩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진짜로 붙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