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깨우치다 (4)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제 보이는군.”
곽소교의 한마디는 서량을 전율케 했다.
“이제야 보여. 네놈이 누군지.”
“알겠나?”
“그래, 이제야 알겠어.”
잠시 말을 멈춘 곽소교가 사안(邪眼)을 번뜩였다.
“어떻게 한 거지?”
“모른다.”
“모른다고?”
“그냥 그렇게 됐다.”
살왕 천하진으로 죽어 천마신교의 삼공자 서량으로 깨어났다.
곽소교는 그러한 이혼겁백은 극에 이른 술법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어서 환생을 한다? 전생(轉生)을 한다?
그런 것은 없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 흩어질 뿐이다. 시체가 썩어 땅의 자양분이 되고, 그 땅에서 난 식물을 동물이 취하며, 그러한 동물을 다시 사람이 잡아먹는다.
그것이 순환이다. 사마외도(邪魔外道)에 빠진 곽소교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 세상의 섭리를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그 섭리에 반하는 것이 사마외도니까.
즉 서량은, 곽소교는 물론 사신(邪神)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불사(不死)의 개념에 다가간 셈이었다. 목이 떨어져 죽어도 혼이 다른 몸으로 갈아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불사이자 섭리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은 없어. 이 세상 모든 일은 인과 관계가 명확해.”
사공의 극치를 이루어 인성(人性)을 상실했지만, 곽소교의 지식과 깨달음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서량은 그런 곽소교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다.
과거와는 달라진 나를, 한없는 자유만을 추구했으나 새로이 맺은 인연과 상승한 무공의 경지로 달라진 자신을 보았다.
‘그렇구나.’
곽소교는 깨달았다. 상대가 진정 천하진임을, 천하제일살수로 중원 전역에 악명을 떨쳤던 사신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깨달은 순간, 서량 역시 깨달았다.
‘나는 이제 천하진이 아니야.’
구유마공을 놓고 군림마황기를 들었다. 군림마황기와 천마도로 곽소교를 상대했을 때, 그는 더 이상 필요 이상의 살기에 잠식되지 않았다.
마공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제 천하진은 없다. 천하진이 남긴 한(恨)은 남았지만, 그는 더 이상 천하진이 될 수 없었다.
그때는 몰랐던 소중한 것들을 얻었기에.
천하진으로 산 오십 년이 넘는 세월보다, 서량으로 이 년을 조금 넘게 살아온 지금의 삶이 훨씬 더 주체적이었기에.
그러한 삶에서 자신의 한계와 성장을 보았기에, 그는 이제 천하진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구유마공이 전생(前生)이 남긴 한을 상징한다면 군림마황기는 새로운 삶, 새로이 만들어 나갈 그의 시대를 상징하는 무공인 것이다.
스르륵.
서량의 전신을 누비던 청색 뇌광이 조금씩 힘을 잃었다.
화르륵.
그의 우안에서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 군림마황기와 구유마공을 동시에 운용하는 것이다.
천하진으로서 구유마공을 이용해 상대했고,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군림마황기를 운용해 대등한 승부를 이어 왔다.
그리고 이제는 둘 모두를 쓴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반신(半神)이 될 또 하나의 천마를 안고 과거의 숙적을 향해 칼을 겨눈다.
‘…….’
곽소교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좌청우홍의 안광이 무척이나 깊었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는 여전했으되 그 분노에 휩쓸리지 않았고, 뻗어 나가는 위엄은 강렬했으되 그 안에 인간이 있었다.
“천하제일이 되고 싶나?”
서량의 한마디에 곽소교가 움찔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안은 듯, 모든 것을 털어 낸 듯 기묘한 미소였다.
“나 하나도 어찌 못하면서 천하제일은 얼어 죽을.”
“뭐, 뭐라고?”
“당장 담 늙은이와 송 성주만 해도 너의 아래가 아닐 거다. 하물며 정파에는 정무쌍신이 있고, 본교에는 그들 모두를 발아래에 두는 마신이 있지.”
화르르륵!
시뻘건 불길을 담은 천마도 주변으로 위협적인 번갯불이 일었다. 두 마공의 뇌화(雷火)였다.
“애석하구나. 우리가 없는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천하제일이 되었을 텐데.”
“……닥쳐라.”
“죽자사자 발버둥 쳤지만, 결국 너도 거기까지야.”
“닥치라고 했다!”
욕을 퍼붓던 곽소교가 손을 치켜들었다. 흉흉한 독기가 넘실거리는 손톱이 위협적인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어쩐 일인지, 곽소교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단숨에 달려들어 저 망할 놈의 얼굴 가죽을 벗겨 내야 하는데, 그저 움찔거릴 뿐이었다.
‘빈틈이…….’
너무나도 많다.
당장 달려들어 사사독조와 비요음장, 교살괴각과 사황파를 쏟아부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칼을 내치고 복부, 우측 상박, 그리고 흉부에 직격타를 먹일 수 있는 투로가 머리에 그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은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움직여선 안 된다고 한다.
공격을 가하는 순간, 자신이 떠올린 살법 투로가 모조리 박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서운가?”
“이익!”
“내가 왜 네 사공을 두고 반쪽짜리라 했는지, 이유는 아나?”
“닥쳐!”
“신공이든 마공이든 사공이든,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궁구(窮究)와 경험, 괴로움이 필요해. 한데 넌 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억지로 경지를 끌어올렸군.”
곽소교의 눈이 흔들렸다.
저놈은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경지를 이루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서량의 눈에 혐오가 어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神)의 반열에 든 교주님조차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 성취를 이루고자 할 때는, 응당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 해. 그 외에 다른 방법은 모조리 사도(邪道)다.”
“주둥이를 찢어 버리겠다!”
“주먹을 휘두르든 사람을 죽이든 정신적 고통에 몸부림을 치든, 궁구하지 못한 자의 성장은 반드시 파탄이 난다.”
“시끄러워!”
“너보다 아래인 놈들에겐 먹힐지 몰라도, 너와 같은 경치를 보는 자들에게 너의 무공은 손잡이 없는 검이나 다를 바 없어. 아주 날카롭지만, 정작 휘두르진 못하지.”
“개새끼!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들어!”
“보이니까. 네년의 무공은 성장했지만, 네년의 심혼(心魂)은 오히려 약해졌어. 차라리 구파의 무공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그때의 네가 더 무서웠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그때의 네겐 욕망이 있었어. 사람으로서의 욕망이.”
곽소교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살왕으로서 한을 풀었고, 일문의 종주가 될 사람으로서 네 한계를 보았다.”
후웅.
서량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곽소교가 다시 한번 움찔했다. 별 의도가 보이지 않는 동작인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좌수를 앞으로 내밀고, 천마도를 자연스레 하단으로 내린 서량의 자세.
그것은 마치 단천삼도의 기수식 같기도 했고, 인화도법의 기수식 같기도 했다.
또한 뇌공만마일식 같기도 했고, 구중마검세 같기도 했다.
“다 털어 냈고 다 경험했으니, 이젠 끝내자.”
터어어엉!
그리도 머뭇거렸던 곽소교가 드디어 첫발을 떼었다.
너무 급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너무 힘을 줘서 달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갈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곽소교는 달렸다.
‘저놈을 반드시 죽인다!’
껄끄러운 자는 몰래 죽이고, 맞서기 힘든 자 앞에서는 꼬리를 내렸다. 어떻게 해도 안 될 상대라는 생각이 들면 도주를 서슴지 않았다.
비요왕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생존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맞서지 말아야 할 상대를 두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 짜릿한 공포와 불쾌한 환희가 그녀의 사기를 한층 더 높이 끌어 올렸다.
‘죽어!’
곽소교의 손톱이 서량의 목에 닿았다.
그때, 서량의 몸이 움직였다.
서걱!
“커허…….”
곽소교의 복부가 쩍 벌어졌다.
한 치의 기울임도 없이 횡(橫)으로 베였다. 갈라진 배에서 내장이 쏟아지려고 했다.
‘흡!’
사황극천기로 복부를 닫고, 극에 이른 사기로 회복을 도모했다. 동시에 몸을 돌려 서량에게 일격을 날렸다.
퍼어억!
서량의 가슴에 네 줄기 상처가 생겼다. 살을 가르고 근육까지 찢어 냈을 만큼 깊고 깊은 고랑이었다.
서량이 무심하게 칼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곽소교의 몸이 사선으로 두 번 베였다.
본능적으로 반보 물러서서 몸이 쪼개지는 건 면했지만, 또다시 큰 상처를 얻었다. 도기(刀氣)에 실린 열기 때문에 출혈은 없었지만, 상처를 통해 침투한 서량의 공력이 그녀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퍼어엉!
서량이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비요음장에 가슴이 격중당한 것이다.
티이잉!
천마도조차 놓쳤다. 땅에 떨어진 천마도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서로 상대를 죽이겠다 자극하고 있지만, 기실 두 사람 다 힘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런…….’
칼질 세 번이면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던가?
후욱!
곽소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특유의 흉흉한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다소 멍해진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량의 얼굴에 흐릿한 웃음이 어렸다.
‘무공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반쪽이 되었군.’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죽이고 싶어 했던 상대가 이토록 처절하게 망가졌다니. 이젠 한을 다 풀었는데도 그 기쁨과 쾌감은 여전했다.
퍼억! 퍼억! 콰득!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피부가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다. 내력이 점점 약해졌고, 휘두르는 주먹의 속도 역시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퍽! 퍽! 퍽!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다시 한번 싸움을 벌이던 고루마존과 광혼, 곡천삭은 물론 두 영물과 진마대, 현무대의 고수들까지도 질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푸욱!
“학!”
곽소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량의 검지가 그녀의 눈 하나를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퍽!
서량의 몸이 우측으로 기울어졌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곽소교의 장(掌)이 그의 귀를 강타했다. 고막이 터진 귀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어라?’
갑자기 중심이 잡히질 않았다. 몸이 쓰러지는 게 아니라, 땅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끝났…….’
끝났나? 내가 이겼나?
아닌가? 졌나?
순간 서량의 두 눈에 끔찍한 마기가 어렸다.
“크아아악!”
콰직!
짐승같이 포효한 그가 곽소교의 머리를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지친 곽소교의 얼굴에 작은 놀라움이 일었다.
퍼억!
강렬한 슬격(膝擊)에 곽소교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뭉개졌다.
피를 토하며 물러나는 곽소교, 서량은 비틀거리면서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곽소교를 물러나지 않게 함과 동시에,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함이었다.
덜덜 떨리는 주먹에, 이미 바닥을 드러낸 내력을 모으고 또 모았다.
빠각! 퍽! 퍽!
사정없이 곽소교를 후려치던 서량이 기어이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일어날 힘도 없었던 것이다.
‘어…….’
하나뿐인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곽소교.
그런 그녀의 눈에서 조금씩, 조금씩 생기가 빠져나갔다. 아무리 고수라도 몇 사발이나 흘린 피를 내공으로 보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보다는…….’
곽소교가 입을 헤 벌렸다.
‘편안한데?’
뭐랄까? 굉장히 억울하고 화가 나고 치가 떨릴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마주한 죽음은, 생각보다 그리 무섭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크르륵.”
곽소교의 코와 입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부서진 안면으로 침투한 공력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위장을 마구 찢어 낸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근데 이놈은 누구였더라?’
콰득!
그녀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으아아!”
마치 과거 자신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갚아 주듯, 곽소교의 목뼈를 통째로 분질러서 뜯어내 버린 서량이 그녀의 머리를 들고 울부짖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