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움직이는 거인들 (1)
“확실히 보통 배포는 아니란 말이야.”
거칠 것 없이 주루로 들어선 송금백은, 새삼 이 주루의 존재 자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곳은 철혈성의 영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딱히 번화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적당한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 이리 커다란 주루를 세워 놨음에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지형지물 덕이었다. 막상 코앞에서 보면 꽤나 큰 주루였지만, 몇 장 밖에서 보면 그냥저냥 지나칠 만큼 존재감이 흐렸다. 마치 저 멀리 떨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처럼 주변과 잘 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 의천맹의 비밀 분타를 세우다니, 그것참…….”
송금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의천맹주가 남다르긴 하다. 그나 황곤은 이런 주루를 망루 삼아, 적의 코앞에 정보 분타를 세워 둘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실천에 옮길 엄두를 못 냈다. 그럴 바에야 정예병을 하나 더 키우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파의 총수인 송금백과 정파의 총수인 담사영의 차이였다.
“흐음, 그건 그렇고.”
송금백의 눈이 계단을 향했다.
오 층 짜리 주루는 생각보다 널찍했다. 의천맹의 비밀 분타로 쓰는 곳인 만큼 계단 역시 단단해 보였다.
‘백단(白椴, 자작나무)?’
송금백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살아 있는 주루 곳곳에, 백단으로 만든 기물들이 존재했다. 보아하니 매번 새 걸로 교체하는 모양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백단의 목피(木皮)는 기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불이 잘 붙는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주루를 통째로 불태우기 위해, 주루의 주축이 되는 곳마다 백단으로 만든 기물을 배치한 것이다.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아주 간단하지만, 확실히 증거를 멸할 수 있는 기책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애초에 이런 건물의 존재를 두고, 도의를 어겼다며 서로를 욕할 입장들이 아니다. 그저 발견하는 즉시 들이닥쳐 모조리 죽이고 불태울 뿐이다.
적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알고 태워 없앤다. 건물을 통째로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정보원들의 독기가 느껴졌다.
‘이런 곳의 존재를 알려 주면서까지 만나자고 한다…….’
무엇을 제안하든, 무엇을 요구하든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은신처 하나의 존재를 밝힌다는 건, 그 외에도 수많은 은신처가 존재한다는 걸 말해 주는 것과 같다. 오늘의 회담이 끝난 후, 송금백은 철혈성 주변의 모든 지역을 훑어볼 것이다.
물론, 상대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오늘의 회담이 기대되고, 그만큼 걱정되기도 하는 이유였다.
물끄러미 계단 쪽을 바라보던 송금백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올라가면 되는 것이오?”
계단 위쪽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신다면, 내가 내려가겠소이다.”
“그러시오. 안전제일주의라서.”
“허허, 그럽시다.”
끼익, 끼익.
계단을 밟는 소리가 이렇게도 긴장감이 넘칠 수 있는 건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오는 보행이 놀랍도록 산뜻했다. 칠순이 넘은 노인의 걸음걸이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송금백의 눈이 깊어졌다.
‘다르군.’
하수가 보는 세상과 고수가 보는 세상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는 법. 송금백은 노인의 발걸음에서 새어 나오는 생기(生氣)를 느끼기에 앞서, 그 속에 감춰진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손에 피를 덜 묻힌 사람임이 분명했다.
대신 이 자는, 존재만으로 사람을 상하게 만든다.
세 치 혀로 전쟁을 일으키고, 주름 잡힌 눈매로 천하를 들여다보는 이였다. 지닌바 무공보다도 흉악한 정재(政才)로 이름 높은 이였다.
‘마치 사자의 발걸음 같군.’
산뜻하면서도 묵직한 걸음에서 느껴지는 바가 컸다.
그렇게 한 명의 노인이 일 층으로 내려왔다.
“허어, 놀랍구려.”
“무엇이 말이오?”
“세상이 철혈성주를 두고 용맹함의 화신이라고들 하더이다. 내 그 말을 믿지 않았거늘, 이리 보니 알겠소. 비범할 거라고는 생각했소만, 그 연배에 이런 패기를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시오. 그러는 그쪽도 기대 이상이외다.”
“허허, 어떤 부분에서 그렇소?”
“정파제일인, 의천무제라 불리고는 있으나 아는 사람들은 그대를 두고 용의 몸뚱이를 가진 구렁이라고 하더이다.”
“헛! 그것 참 듣기 민망한 소리로고. 해서, 직접 뵈니 어떻소? 내 구렁이 같소?”
“아무리 봐도 용 같지는 않은데, 구렁이 같지도 않소. 용보다도 훨씬 거대한 이무기(大蟒) 같소이다.”
“허허! 구렁이에서 이무기가 되었으니, 이 또한 다시 없을 칭찬이 아닐런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소이다.”
껄껄껄 웃는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 나왔다.
속내가 어떻든, 겉으로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이 정도 거인들의 만남이라면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송금백은 그 웃음소리만으로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잠시도 빈틈을 드러내선 안 되는 자.’
송금백이 손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예까지 오느라 다리가 제법 아프구려. 앉읍시다.”
“허어, 내가 성주를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소이다. 어서 앉읍시다.”
두 사람이 창가 옆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송금백의 눈빛이 사나운 와중 은근한 여유를 담고 있다면, 담사영의 눈빛은 부드러운 와중 어떤 짐승의 것인지 모를 송곳니를 담고 있었다.
“차를 준비해 두긴 했소이다만, 성주 입맛에 맞을는지 모르겠소.”
“오물이 말라붙은 땅에 떨어진 주먹밥도 씹어먹던 시절이 엊그제 같소이다. 그런 걱정일랑 마시오.”
“허허허! 성주께서 다사다난한 삶을 보내셨다는 말은 들었소이다.”
잠시 후, 이 층에서 한 여인이 쟁반을 들고 내려왔다.
송금백의 눈이 빛났다.
“저만한 고수더러 차를 내오라 한 것이오?”
“뭐 어떻소이까? 본인이 원하던 일이었으니, 바람을 들어줄 수밖에.”
“차를 내오는 게 바람이었다고?”
“정확히는 성주를 뵙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고 하더이다.”
“그렇구려.”
송금백은 여인이 누군지 굳이 묻지 않았다.
탁자에 차를 내려놓은 여인이 곱게 인사를 하곤 담사영의 뒤에 시립했다.
“용정(龍井)이외다. 성주의 입맛에도 나름…….”
“말 끊어서 미안하오만, 이 사람은 사사로운 대담은 그리 원하지 않소이다.”
“허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본성 가까이에 이런 비밀 분타를 세워 놓은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상당히 불쾌한 심정이오. 그대가 의천맹주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게요.”
“허허, 성이 나셨구려.”
“그럴 수밖에.”
화가 난다고는 하면서도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하다.
담사영은 그런 송금백을 보며 강자의 여유를 느꼈다. 정치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지만, 송금백은 달랐다.
자신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호함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여유가 가득하니, 지금껏 만나 본 어떤 사람보다도 까다로워 뵌다.
‘정파든 사파든, 한 무리의 좌장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능력과 격식을 갖추어야 함이 당연지사. 힘에 굴복하는 사파라 하나 밑바닥부터 시작해 정점에 오른 이 자 역시 시대의 패자(霸者)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게지.’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성주의 마음이 좋지 않음은 당연하오. 그러나 나 역시 사과할 마음은 없소이다.”
“알고 있소.”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상대를 이기기 위해 어떤 수라도 쓰는 게 전쟁이다. 불쾌함은 어쩔 수 없지만 송금백은 담사영을 이해했다.
“그러니 어디 말해 보시오. 나를 굳이 이 불쾌한 자리에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허허, 바로 본론이라…… 좋소. 그리 하십시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담사영이 한결 깊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근래 중원 바닥을 뒤흔드는 몹쓸 마귀 하나가 있소이다. 성주도 알고 계실 게요.”
송금백의 눈이 반짝였다.
“서 소교를 말씀하시는 거요?”
“그렇소이다. 내, 그 귀찮은 마귀 한 놈 때문에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외다.”
“그럴 수밖에. 개인의 능력도 출중하지만, 그를 뒷받침해 준 사람도 많았으니.”
“뒷받침이라…… 역시 성주께서도 개입하셨구려?”
“그렇소. 서슴없이 만나자고 연락을 보내 오더니만, 내 마음에 쏙 드는 패기를 보여 주지 않았겠소? 어차피 서로가 천하를 노리는 것, 마도의 젊은 왕자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더랬소.”
“그 행보를 지켜보며 마도의 힘을 유추하려 하신 게요?”
“그런 의미도 있었소.”
송금백이 유쾌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천하가 난세가 되면, 모두에게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그 혼란을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데, 내 어찌 거절하오리까?”
“허허허.”
서슴없이 드러내는 야망이다.
그 솔직함과 자신만만함에 담사영은 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해서, 성주가 보기에 그 마귀 놈의 행보는 어땠소이까?”
송금백은 딱 잘라서 말했다.
“최고였소.”
“최고라.”
“아무리 사파 연합이 뒤를 받쳐 준다 한들, 하오문이라는 정보 단체가 손발이 되어 준다 한들 서 소교만큼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지. 고백하자면, 나라도 그것이 가능할까 싶소이다.”
“허허, 겸손이 과하시오.”
“사실이오. 서 소교는 비록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지만, 이미 대종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하오. 무공이든, 그 외의 능력에서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소.”
“맹주는 그리 생각하지 않소?”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하오.”
“하면 어떻게 보시오?”
“적어도 그 마귀가, 산동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성주와 같은 평가를 했을 것이오.”
산동.
서로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지역이 언급되자 송금백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서 소교가 산동으로 간 것이 실망이오?”
“실망이오. 나였다면, 반정회와 함께 더더욱 본맹을 몰아쳤을 것이오. 그리고 적당한 때를 봐서…….”
담사영이 빙긋 웃었다.
“귀성을 직접 공략하려 들었겠지.”
대뜸 위험한 얘기를 던진다.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사고를 치려면 그편이 좋겠지. 하지만 상황이 그리되면 본성과 귀맹이 연수를 맺을 위험이 있소. 서 소교 측이 생각하기엔 충분히 불안한 한 수요.”
“진정한 혼란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소?”
“진정한 혼란?”
“그러한 판이 벌어지면, 마교라고 엉덩이 무겁게 십만대산에 눌러앉아 있지만은 않을 테니 말이외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 중, 가장 살벌한 뜻을 담은 말이었다.
송금백은 담사영의 눈을 보고, 그가 진심을 담아 얘기했음을 깨달았다.
‘무서운 늙은이로군.’
세상을 진짜 난세로 만들려면 우리만이 아니라 마교까지 뛰쳐나와야 한다.
알고 있지만, 송금백은 다시 한번 물었다.
“진정 그것을 원하시오?”
“물론이오. 그래서 말이오.”
“……?”
“내 직접 약을 좀 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