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움직이는 거인들 (2)
“벌써?”
“그렇습니다.”
“우리가 늦었군.”
고구는 그답지 않게 침통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해서, 현재 상황은 어찌 되었다고 하던가?”
“철혈성의 혈전단이 전멸했고, 현무대 역시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황보세가는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으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소교주님의 안전일세.”
“소교주님의 상태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루마존께서 직접 진마대를 이끌고 자리를 피하신 것으로 보아…….”
“위급하군.”
“아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소교주님께서 크게 다치신 것이 틀림없네.”
고구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말수는 별로 없지만, 그는 서량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서량은 한 번 칼을 뽑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다. 상대가 어떠한 강자라도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진 어지간해선 후퇴하지 않는 성정을 지녔다.
한데 고루마존이 진마대를 이끌고 소교주님을 모신다?
‘심각한 상황이다. 최소한 거동이 불편하실 정도로 다치셨다고 생각해야 해.’
생각이라곤 하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목적지는?”
“하북(河北)입니다.”
위험한 지역이다.
그러나 고구는 고루마존의 선택이 그 위급한 와중에도 탁월했음을 부인하지 못했다.
산동에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 봐야 하북, 하남, 강소밖에 없다. 안휘도 있지만, 결국 강소와 인접한 지역이지 않은가.
그리고 강소는 철혈성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다. 하남 역시 의천맹과 반정회의 다툼으로 한창 어지러울 때였다.
그렇다고 바다로 향할 순 없으니, 하북이야말로 최선인 것이다.
‘아마 팽가에서 가장 먼저 반응할 거다.’
갈 수 있는 지방도, 길도 많다. 그러나 마교 소교주의 운신은 정사(正邪)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북의 패자는 팽가다. 소교주님과는 악연도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으려고 할 것이다.
“급하게 되었군.”
“그렇습니다.”
“광마대(狂魔隊)는 어디에 있지?”
분타주의 눈이 빛났다.
“현재 강소성 동쪽에서 대기 중입니다.”
“좋네.”
고구가 말했다.
“철검마존께 연락을 드리게. 광마대를 데리고 하북으로 오시라고. 소교주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최대한 빨리 북상해야 한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산동 분타주는 재빨리 움직였다. 천마신교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산동에서 은밀히 분타주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달리 말하면 그만한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맡은 것이기도 했다.
고구가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 가겠습니다, 소교주님.”
강 노인과 보조를 맞추려 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강 노인이 아니라 교주님께서 직접 오신다 해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파아앙!
고구의 신법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 * *
“약을 치셨다?”
“그렇소.”
“그것이 무슨 뜻이오?”
담사영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맹은 호남에도 분타를 세워 놓았소이다. 지금 이곳처럼, 마교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세운 곳이지.”
“그럴 거라 짐작은 했…….”
고개를 끄덕이던 송금백이 멈칫했다.
“당신 설마?”
“그렇소. 그곳에서 직접 보자고 서신을 보냈소이다. 마교 쪽에서 연락이 오면, 성주와의 대담이 끝나고 직접 가 볼 생각이오.”
송금백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 제정신이시오?”
아무리 적대 세력 수장들끼리의 대화라지만, 나름의 격식을 갖춘 자리기도 했다. 송금백의 성정을 생각해도 다소 과격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담사영은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송 성주께서도 이리 나와 주시지 않았소?”
“당신, 마교주를 본 적이 있소?”
“당대 마교주가 내가 수십 년 전에 봤던 당시의 마교주라면, 그렇소. 본 적이 있소.”
“나 역시 그렇소. 한창 혈기 왕성하던 시절의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었지.”
송금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리다. 마교주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그는 무림에서 첫손에 꼽히던 절대강자였소.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가 되었을지는 상상조차 어렵소.”
“무공이 강한 것과 심성이 악랄한 것은 별개의 문제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오. 섣부른 말이지만, 내 감히 상상하기로 마교주의 무력은 최소한 나나 당신보다는 강할 것이라 보오. 그러한 강자가 적대 세력의 수장을 직접 볼 기회를 얻었단 말이오.”
“아하? 이제 보니 송 성주께서는, 마교주가 그 자리에서 날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게요?”
“그렇소. 하물며 호남이라고 하지 않았소? 호남에는 마교를 따르는 마도칠가 대부분이 분포해 있소. 그들 하나하나의 무력은 본성의 철왕(鐵王), 귀맹의 구파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소이다.”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송 성주는 지금 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빤히 알면서 왜 그곳으로 향하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로군. 맞소?”
“당연하오. 내가 굳이 당신을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소.”
“허허, 맞는 말이오.”
용정 한 모금으로 입 안을 적신 담사영이 보다 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자신이 있으니 가는 거요. 마교주가 직접 만나자고 할 때를 대비해 준비를 충분히 해 뒀소이다. 설령 우리보다 강하지 않더라도, 마교주는 나나 성주와는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양반 아니오?”
마교주와 대화를 나눠 본 적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도 무림의 총본산, 그곳에서 신(神)으로 숭상받는 자가 마교주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송금백은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에 담사영이 저리 말할 수 있는 건지.
“그나저나 성주.”
“말씀하시오.”
“방금 성주께서 말씀하셨듯, 성주가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소이다.”
“……?”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서로를 걱정해 줄 사이가 될 때도 되었다고 생각지 않소?”
송금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을 잡자는 것이오?”
“마교의 소교주 놈도 성주와 손을 잡았소. 우리라고 손을 잡지 말란 법은 없잖소? 게다가…….”
담사영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빛이 떠올랐다.
“소교주 놈과의 동맹도 끊어진 것 같은데 말이오.”
송금백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담사영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가 숨긴 사실들을 언제, 어떻게 꿰뚫어 봐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에 있었다.
“본맹은 광혼을 보냈소이다. 그리고 귀성은 신창을 보냈지.”
“……그랬지.”
“그러나 광혼과 현무는 현재 산동에 있소. 처음 신창이 연수를 제안했을 때, 우리는 그를 무시했소이다. 북상하는 마교의 병력을 치려다가, 일단 소교주부터 잡기로 생각을 바꿨기 때문이오.”
“그럴 거라 생각했소.”
“한데 이상하지 않소? 산동에도 마교의 병력이 있다고 하니 말이오.”
송금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력에선 철혈성이 의천맹보다 한 수 쳐지고 있음을.
그는 이러한 사실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담사영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송금백은 지금 이 대화에 어떠한 기만과 거짓도 없을 거라 믿었다. 성격이 다르고 방식이 다를 뿐, 종사끼리의 만남에서 서로를 속일 그릇들이 아니었다.
“산동에 마교의 병력이 있다고?”
“그렇소. 마존과 삼백 마인 부대가 있다고 하더이다.”
“어떻게 그런…….”
순간 송금백이 탄성을 질렀다.
“그렇군. 처음부터 마교에서 보낸 부대가 둘이었군.”
“그렇소.”
남쪽에서부터 북상하며 의천맹 소속 문파를 파죽지세로 멸문시킨 마교의 병력.
모두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의천맹도, 철혈성도 마존을 대동한 삼백 병력의 북상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기만책이었다.
이 또한 성동격서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마존 하나와 삼백 병력을 우회시켜 산동으로 보낸 마교의 책략은, 정말이지 예상외였다.
‘서 소교.’
송금백은 새삼 서량의 머리에 감탄했다.
천마신교의 정보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중원의 정세를 읽는 속도가 서량보다 빠를 순 없었다.
한데 서량이 산동에 있다. 그리고 마교의 병력도 산동으로 향했다.
즉, 지금 이 상황은 서량이 소림으로 향할 때부터 구상해 둔 것이라는 뜻이었다.
‘자네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제는 두려움마저 생겼다. 이립이 안 된 나이에 십대고수에 필적하는 무공을 쌓은 것도 모자라, 정석을 파괴하는 병법으로 온 무림을 속여 버린 지혜까지 갖추었다.
괴물이다. 서량은 성장 중인 괴물이 아니라, 이미 성장을 마친 완성된 괴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기만책이 본맹과 귀성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는 않았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소교주 놈의 지혜는 알맹이가 빠진 지혜였다고 볼 수 있겠소.”
“아니, 충분히 효과적인 한 수였소. 병력을 한 번 운용하는 데에만도 금전적 손실이 상당하오. 거기에 천하에서 손꼽는 고수까지 딸려 보냈잖소.”
“모든 병력은 출병시킨 그 시점에서 몰살당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오. 내가 말하는 피해는, 병력의 피해가 아니라 나나 성주의 정신을 말함이었소.”
“정신?”
“고작 그 정도 병력을 잃었다고 무너질 그릇들은 아니잖소, 우리가?”
오싹하다.
송금백은 담사영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는 진심으로 휘하에 거느린 병력을 장기의 말로 보고 있었다.
이건 냉정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파의 절대자인 자신보다도 훨씬 더 음험하고 사악한 인간이었다.
“오히려 불을 지펴 준 것 아니겠소? 그놈의 헛짓거리 덕분에 나도 성주도 마음이 상했으니.”
가만히 담사영을 보던 송금백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런저런 말은 잘 들었소.”
“허허, 확실히 성주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오. 내 혓바닥에 홀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거늘, 성주의 마음은 금성철벽처럼 단단하여 좀처럼 치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구려.”
서슴없이 자신의 혀가 뱀과 같음을 자랑한다.
수하나 친인에게보다 훨씬 더 스스럼없이 자기 자신을 보여 준다.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적어도 송금백의 품격이 나쁘진 않다는 걸 알았기에 담사영도 마음을 연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송금백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귀맹과 연수할 생각이 없소.”
“어허, 어찌하여?”
“서 소교가 독단으로 거래를 끊었소. 나는 그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그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소. 애초에 그런 싸움이었으니까.”
송금백의 안광이 스산해졌다.
“그러나 의천맹과 손을 잡게 되면, 왠지 안심하게 될 것 같단 말이지.”
“안심이라…….”
“그렇소.”
담사영이 빙긋 웃었다.
“성주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오.”
“칭찬 감사하오.”
“하면 이건 어떻소?”
“무엇을 말이오?”
“만약 마교주가 나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생각해 보셨소이까?”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 봤냐고?
송금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이시오?”
“성주께서 본 지금의 나는 어떻소? 나는 말이오,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 해서든 성공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외다.”
“알고 있소.”
“…….”
“……설마?”
“그렇소.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자리에 앉힐 수밖에.”
송금백이 벌떡 일어났다.
“당신, 미쳤소?!”
“아니, 정상이오.”
담사영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수라제라 불리는 사파제일인 송금백보다 백배는 사악하고, 천배는 흉악한 눈빛이었다.
“이 미쳐 돌아가는 난세에 적응한 나란 사람은, 지금 이 시대에 걸맞은 정상인이라 생각하오만?”
“진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오?”
“그걸 원하진 않소.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마교는 본맹은 물론 귀성까지도 공격할 거요. 마교도 놈들은 그런 놈들이니까.”
“……!”
“자, 선택하시오. 동맹이오? 아니면 각개 격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