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움직이는 거인들 (3)
“어?”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여기는…….”
익숙한 곳이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 태산보다도 높은 절벽 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산등성이가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었다.
‘고요하군.’
지형 특성상 바람이 강하게 불어야 했다. 그러나 절벽 끝에 서 있는 서량의 옷자락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정도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산들바람이었다.
서량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 어두워진 것 같네.”
이전보다 훨씬 어두워진 듯한데도 빛은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먹구름 사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햇빛은 마치 달처럼 보였다.
“재미있는 곳이야.”
서량이 고개를 내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보는 곳에는 뒷짐을 지고 선 이천상이 있었다.
서량은 순간 눈이 부셨다.
새삼스레 느끼는 것이지만, 이천상은 정말 괴물이었다. 이곳이 현실이든 아니든, 이천상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도는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단했다.
서량은 확신했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자신은 이천상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할 것임을.
무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이천상은 무도(武道)를 넘어, 이 세상의 섭리를 오감으로 느끼는 자였다. 어쩌면 십 년 뒤에는 이천상을 상대로 박빙의 승부를 겨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지고(至高)한 깨달음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 어둡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온전한 마(魔)를 이룬 녀석이, 한층 더 마(魔)에 가까워졌군.”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네게 벌어지고 있구나. 그러나 그것이 바로 너다.”
“고백하건대, 저는 지금껏 교주님의 뜬구름 잡는 말을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魔)는 뭐고 모순은 뭔지 원…….”
“버렸느냐?”
“예?”
“버렸느냐고 물었다.”
“무엇을요?”
“버리지 않았군.”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꿈이든 무의식의 저편이든, 혹은 교주님의 기오막측한 사술이든 결국 이곳에 나타난 교주님은 제 마음이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겠지요.”
“…….”
“복잡한 말은 사양입니다. 더는 고민하고 싶지 않아요. 대화를 할 거면, 편하게 하시지요.”
서량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이천상이 다시 물었다.
“비요왕에 대한 은원을 버렸느냐?”
이천상이 복잡한 말을 하지 않은 대신, 서량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버릴 수 있었다면 진즉에 버렸을 겁니다. 이 경우는 ‘해결(解決)’이 되었다고 봐야 옳겠지요.”
“해결이 된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그렇게 보이십니까?”
“너는 정녕 비요왕을 증오한 것이냐?”
그 말을 들은 서량은 왠지 모를 뜨끔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서량은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증오했다는 과거를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냐?”
“굳이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연한 사실인데.”
“한데 왜 저 하늘보다도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느냐?”
서량의 얼굴에 씁쓸함이 맺혔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가만히 서량을 보던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잠시 걷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서량이 이천상을 힐끔거렸다.
“이것도 새삼 느끼는 건데, 키가 진짜 크십니다.”
“너는 비요왕을 증오했다.”
“갑자기 딴소리시네.”
“그러나 너의 증오는 진실과 허상의 경계에 있다.”
“어려운 소리는 싫다고 했습니다만.”
“비요왕을 향한 너의 증오는 진짜다. 그녀는 너의 인생을 종결지어 준 자야. 네가 본 마지막에는 담사영도, 숲도, 의천맹의 고수들도 없었다. 오로지 비요왕만이 있었지.”
“…….”
“이유를 떠나, 너의 삶을 끝장낸 사람이다. 증오하지 않을 수 없겠지.”
기분이 묘했다.
실제 이천상은 서량의 전생이 천하진이었다는 걸 모른다. 한데 이 환상의 세계에서는 이천상이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이천상의 눈빛과 기도를 갖춘 허상이, 이천상과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너의 증오는, 너의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지만, 죽이지 못해 안달 날 정도는 아니었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군림마황기는 강하다.”
“……그렇더군요.”
“사신지학(邪神之學)은 술(術)의 극치를 이루어 법(法)에 도달한 무공이다. 천하디천한 사마외도의 잡술로 천하제일의 무공이 되었으니, 소림의 불가기공으로도 사기를 흩어 내기 어렵지.”
“굉장했습니다.”
“하면 군림마황기는?”
“글쎄요.”
“군림마황기는 술(術)과 법(法)을 넘어 도(道)에 이른 천마지학(天魔之學)이다. 너의 구유마공이 군림마황기에 비견될 수 있는 절학이긴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공의 강약을 논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 깨달음의 깊이를 논하자면, 구유마공은 감히 군림마황기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한다.”
서량은 이천상의 말을 담담하게 들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 내 마음은 왜 나더러 이런 말을 하라고 시키는 걸까?
“너는 알고 있었다. 비요왕과의 싸움에서 군림마황기를 선택한 그 순간, 너의 승리가 확정되었음을.”
“그랬던가요.”
“군림마황기를 제대로 썼다면, 비요왕은 삼십 합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그간 연마한 모든 사기(邪氣)를 네게 빼앗기고 한 줌의 먼지가 되었을 것이야. 설령 비요왕의 사기가 선천에 이르렀더라도, 마(魔)의 갈래일 뿐인 사(邪)는 인과의 법도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너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
“그런데도 하지 않았지. 이미 네가 살왕이었음을 알았고, 그녀가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면서 단번에 무너트리지 않았다.”
서량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천상도 걸음을 멈추었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증오를 만들고 싶었느냐?”
“…….”
“증오의 이유가 부족해, 어떻게든 분노를 끌어 올리고 싶었느냐?”
“그만하십시오.”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비요왕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안다.”
“구유마공이든 군림마황기든, 술이든 법이든 도든 결과는 나왔습니다. 한데 교주님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책망하십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이천상이, 진짜 이천상이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서량은 그를 진짜 이천상 대하듯 했다.
이천상의 입에서, 그런 서량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
“……?”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기에, 세상은 내게 이유를 알려 주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네가 담사영을 왜 그리 증오하는지 안다.”
순간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당연히 아시겠지요. 지금 교주님은 저의 마음이 그려 낸 허상이니까요. 지금껏 비요왕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전부 제가 제게 하는 말입니다.”
“틀렸다.”
“틀렸다니요?”
“나의 폐관이 끝나고, 너를 판마정으로 불러들인 그 시점에서 나는 삼공자 서량의 ‘변화’를 의심하고 있었다.”
“……!”
서량이 부릅뜬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은 진중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그가 보여 주지 않던 표정이었다. 이런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표정이기에, 지금의 이천상은 제 마음이 만들어 낸 이천상이 아니었다.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네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던, 어떤 삶을 살아왔던 중요한 것은 현재다. 나는 엇나갔던 과거보다, 바르게 노력하는 현재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서량이란 사람의 변화를, 과거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서량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말했듯, 내게 이유가 중요하지 않기에 세상의 섭리는 늘 이유를 알려 주지.”
우우우웅.
이천상의 몸에서 은은한 흑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서량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궁극의 영역을 노니는 군림마황기였다.
“네가 욕계문(欲界門)을 연 시점부터, 나의 기가 너의 기와 영통하는 순간부터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면…….”
“그렇다.”
이천상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먹구름 가득하던 하늘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눈송이는 이천상의 몸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너의 세상이지만, 동시에 온전한 네 세상이 아니니라.”
충격적이었다.
서량은 진실로 당황했다. 그렇다면 이천상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도, 자신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물론이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고민을 어떻게 읽은 건지, 이천상은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했다.
“너는 과거의 서량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서량은 내게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지금의 서량은 달라.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신교의 작은 주인이 된 지금의 서량은, 나의 마음에 쏙 드는 인재다.”
“하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더하여, 나는 과거의 셋째에겐 이미 정을 끊었다.”
서량이 떨리는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눈빛이 돌연 엄해졌다.
“내가 아는 서량은 오로지 너 하나다. 너와 같은 서량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존재한다 한들 내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교주님.”
“한데 너는 어찌 이리 못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냐?”
“예, 예?”
“마(魔)는 욕망이다. 선악(善惡)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고차원적인 영역에 거한다. 이미 마(魔)를 깨달은 네가, 스스로를 충분히 잘 아는 네가 왜 이제 와서 이유 없는 이유를 만들고, 솟지 않는 감정을 끌어내려 애쓰는 것이냐?”
“……!!”
“세상눈이 무서우냐? 죽일 만한 증오가 아님에도 손을 쓰는 것이, 그리도 버거웠느냐?”
“저는…….”
“망설이지 마라!”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천상의 호통이었다.
“죽이고 싶다면 죽이고, 파괴하고 싶다면 파괴해라! 범하고 싶다면 범하고, 살리고 싶다면 살려라! 이미 마의 극치를 깨우친 자가 어찌하여 산중도인의 흉내를 내고 있는가! 네놈은 천마신교의 소교이지, 천하 만민을 위하는 협사(俠士) 따위가 아니야!”
“헉……!”
“거침없이 달려라!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하고 싶다면, 이유가 없어도 하는 것이다!”
이천상의 두 눈은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마도(魔道)이니라.”
“헉!”
서량이 벌떡 일어났다.
“헛?! 소교주님!”
“괜찮으십니까?!”
서량이 한 차례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기침에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리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우웅. 우우웅.
청홍의 마기가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단전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여기가…… 어디냐?”
“산동 북부의 숲입니다! 하북을 지척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서량은 왜 하북으로 길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동필이 서둘러 물었다.
“소교주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서량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동필이 격정 어린 눈으로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무려 닷새 만에 소교주님께서 깨어나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상린과 앵화는 물론, 진마대의 마인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왜일까? 마음이 편안했다. 몸도 정상이 아니요, 상황도 그리 좋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루마존은?”
“아! 마존께서는…….”
“아니, 되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다.”
서량이 눈을 떴다.
눈을 감기 전과는 전혀 다른,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맑기도 한 눈빛이었다.
“죽이고 싶다면 죽인다…… 참 무책임하면서도 시원시원한 길이로군.”
“예?”
“나 같은 개백정에게 이유 없이 행하라니, 너무나도 매력적인 길이야. 안 그러냐, 동필아?”
마동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왠지 교주님이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