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움직이는 거인들 (5)
“대략 십오 리(里) 거리에 폐가가 있습니다. 폐가지만 제법 깨끗하고,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일행이 숲을 헤쳐 나갔다.
잘 닦인 관도에서의 십 리와 숲에서의 십 리는 다르다. 그러나 일행 모두가 무공의 달인이었다. 십오 리의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폐가에 도착하자, 진마대는 빠르게 행장을 풀고 주변을 정찰했다. 일부는 식사를 준비했고, 먼저 폐가를 발견한 대원들은 사람이 머물 수 있도록 내부를 정돈했다.
마동필이 폐가에서 조금 떨어진 낮은 바위에 앉은 서량에게 다가갔다.
“소교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물론 실제로 괜찮지는 않았다.
마공이니 사공이니를 떠나, 곽소교가 이룬 경지는 진짜였다. 다만 인위적으로 그와 같은 경지에 올라섰기에 알맹이가 빠졌을 뿐, 무공 자체의 위력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힘이 떨어진 상태였다 해도, 곽소교의 손발은 흉기나 다를 바 없었다. 피부가 찢어지고 살점이 날아가는 살벌한 타격전을 벌였던 서량의 몸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가가 정리될 때까지 제가 누우실 자리를…….”
“살왕기차는?”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길을 뚫지 못하여,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왜 네 잘못이냐. 무리하게 비요왕을 잡으러 오자고 한 내 잘못이지.”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서량은 그에 대해 더 말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한혈마들도 다 죽었고?”
“예.”
“그렇구나.”
“곧 고루마존께서도 오실 겁니다. 마존께서 오시면 소교주님의 내상도…….”
“고루마존이라도 내 내상을 어찌할 수 없다. 이건 오직 나만이 다스릴 수 있어.”
“…….”
“오히려 나보다 네가 더 심한 것 같다.”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상처는 심하게 입었지만, 회복 속도는 이상하리만치 빠릅니다.”
“그렇겠지. 금강야차마공은 사공과 상극이다. 보통의 사기는 마공에 종속되기 마련이지만, 금강은 달라. 오히려 그들의 사기가 너의 마공을 몇 배는 더 활발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예에.”
“하나 육체의 회복이 빠르다고 정신의 회복까지 빠른 건 아니겠지. 너도 당분간 쉬는 게 좋겠다.”
왜일까.
마동필은 서량의 말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얼굴도, 목소리도, 특유의 기도도 분명한 소교주님이시다. 그러나 닷새 만에 정신을 차린 소교주님께선, 이전과는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았다.
그래서 마동필은 입을 닫았다.
소교주님께 여쭤볼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두가 지칠 정도로 쉼 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지금은 진실을 아는 것보다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진마대 쪽으로 가 함께 폐가를 보수하는 마동필을 멍하니 응시하던 서량은 문득 자신을 보는 두 여인을 발견했다.
“너희는 괜찮냐?”
여상린은 주춤했지만, 앵화는 달랐다.
“소, 소교주님!”
멀리서 망설이다가 그제야 후다닥 달려온 앵화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울먹거렸다.
“괜찮으시죠? 괜찮으신 것 맞죠?”
서량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발랄하고 귀엽기만 하던 앵화의 인상도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제법 성숙해진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지친 것 같았다.
그가 앵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못난 주인 만나서 앵화가 고생이 많네.”
“헉!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마음 편히 대산(大山)에서 기다리면 될 걸, 여기까지 쫓아와서 고생만 시켰잖느냐. 다 내 불찰이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소교주님! 소교주님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제게 얼마나 큰 영광인데요!”
꾸밈이 없는 아이였다. 그래서 서량은 앵화가 좋았다.
“모두가 힘든 이 상황에서, 앞날에 관해 얘기하고 싶진 않다. 다만 말없이 든든하게 우릴 챙겨 준 너의 고마움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소교주님…….”
기어이 앵화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왠지 소교주님의 말씀이, 죽어 가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훌쩍거리는 앵화를 다독여 준 서량이 여상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딘가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앵화 때와는 달리, 서량은 한결 활기차게 물었다.
“때깔 좋아 보이는군.”
“…….”
“너무 아름다운 외모도 문제는 문제야. 차라리 그렇게 때 좀 묻은 얼굴이 인간적이라서 좋다.”
여상린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괜찮으신 것 맞죠?”
“맞아.”
“그럼, 그럼 됐어요.”
여상린 역시 서량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서량이 비요왕을 향해 괴물처럼 울부짖었을 때, 그 목소리는 팔방을 가리지 않고 퍼져 나갔다. 당연히 그녀도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는 알고 싶었다. 왜 그리 비요왕을 증오하는지.
훗날 의천맹주를 만나게 되었을 때도 이럴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린아.”
“네, 소교주님.”
“고맙다.”
잠시 멈칫했던 여상린이 애써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고마운 거 알면 됐네요.”
여상린이 마동필과 함께 진마대를 도왔다.
가만히 그들을 둘러보던 서량이 앵화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영광이라는 듯 이내 꼿꼿하게 허리를 펴는 것이, 오늘따라 조금 더 귀여웠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쉬고 싶구나.’
그날 밤.
“후우.”
고루마존이 호왕, 금호와 함께 폐가에 도착했다.
서량의 피폐한 몰골을 본 고루마존의 얼굴에 격정이 어렸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고루가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 신마경어 여덟 자구를 들을 때마다 손가락이 말릴 것 같습니다.”
“소교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기도가 몹시 불안정해 보입니다. 제가 인근의 의원들을…….”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부러 놔두고 있는 거니까.”
고루마존의 눈이 흔들렸다. 일부러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끼이이이잉.」
서량이 갑작스레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미는 금호의 갈기를 긁어 주며 말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
「끼잉!」
금호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배를 보이고 혀를 내미는 꼴이 영락없는 개였다.
서량이 웃으며 금호의 배를 살살 긁었다. 금호는 오만 피로가 다 풀린다는 듯 달달 떨며 기지개를 켰다.
확실히 영물은 영물이라니까.
“호왕도 고생했어.”
쿵!
호왕은 금호처럼 애교를 부리진 않았다. 그저 서량 옆에 앉아서 혀로 앞발을 마구 핥을 뿐이었다.
서량이 호왕의 이마에 손을 대자 호왕이 핥던 다리를 내렸다.
서량의 눈을 감고 진기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주르륵.
“헉! 소교주님?!”
“쉿.”
우우우웅!
홍색으로 명멸하던 서량의 손이 이내 완연한 홍색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서량의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분명 무리를 하고 있었다. 고루마존은 그를 걱정스럽게 보면서도,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잠시 후.
“네 체력이면 사나흘 만에 나을 거다. 이번엔 제법 위험했구나?”
크르릉.
호왕이 그대로 엎드렸다. 허리와 뒷다리 쪽에 화경에 이른 고수의 장력을 허용했다. 아무리 금강불괴의 육체를 가졌다지만, 충격이 없을 순 없었다.
서량의 구유마기는 호왕의 내상을 어느 정도 다스려 후유증의 위협을 없앴다. 호왕은 금호보다 상식에 가까운 영물이기에 이런 조치가 필요했다.
“내일 내가 커다란 사슴을 잡아 주마. 오늘만 참거라.”
크르릉.
확실히 흉성이 많이 가라앉았다. 서량을 올려다보는 특유의 붉은 눈이 홍옥(紅玉)처럼 깊고 맑았다.
서량이 고루마존에게 물었다.
“따돌렸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화경의 고수, 눈치가 보통이 아니니 조만간 여기에 들이닥칠 겁니다.”
“최악의 경우, 원군까지 끌어들일 수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벌어진 격전을 목격했으니까요.”
고루마존이 침을 삼켰다.
확실히 황보세가에서 터진 격전은 무림사(武林史)에 흔치 않은 것이었다. 서로가 가진 모든 것을 퍼붓고 나서는, 무엇에 홀린 양 파락호처럼 치고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살벌한 승부였다. 주먹질 한 번에 바위가 날아가고, 발길질 한 방에 땅이 갈라질 권각을 맨몸으로 주고받지 않았던가.
그걸 생각하면 서량이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하면 오늘까지만 쉬시고…….”
“아니, 우리는 그들을 기다릴 겁니다.”
“예? 하, 하지만 그들이 원군을 부른다면…….”
“괜찮습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다 없앨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루마존은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음…….’
너무나도 든든하고 책임감 넘치는 발언이다. 능력 좋은 상관이 나를 믿으라 말하는 것처럼 신뢰가 느껴졌다.
그러나 고루마존은 서량의 목소리에서 피 냄새를 맡았다.
산처럼 쌓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을 이룬 듯한, 너무나도 지독한 비린내였다.
“다행히 마존께서는 크게 다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고루마존은 애써 호탕하게 웃었다.
“당연하지요! 이래 봬도 체력으로는 마존 중 제일입니다!”
“하하, 믿음직합니다.”
서량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동필과 여상린, 앵화가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예? 아, 물론입니다! 따로 하교하실 일이라도……?”
“하교는 아니고, 고백입니다.”
“고백이요?”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먹구름이 들어차고 있었다. 서서히 습기가 오르는 걸 보니, 내일 동이 틀 무렵에는 눈이 올 것 같았다.
“예. 진즉에 했어야 할, 그러나 지금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고백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그런 고백이지요.”
* * *
“오셨는가.”
“예, 교주님.”
“한 잔 받게.”
“영광이옵니다.”
마신궁의 지붕 위.
무담은 공손히 이천상이 손수 따라 주는 잔을 받아 마셨다.
“향이 어떤가?”
“아주 좋습니다.”
“육천심주를 새로 담으려는데, 이전 것과는 좀 다르게 담고 싶었네.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중이지.”
무담이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귀한 술을 제게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실패작일 뿐일세.”
시원하게 마주 잔을 비운 이천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부의 하늘과 달리, 눈을 볼 일이 없는 남부의 맑은 하늘에는 별빛만이 가득했다.
“무색사의 살수를 놓아주었네.”
무담이 고개를 숙였다.
“예.”
“놀라지 않는가?”
“놀랐습니다만, 교주님께서 직접 하신 일에 어느 누가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그, 그렇지 않습니다.”
무담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저는 다만…… 그냥 놓아주기에는 그의 능력이 너무도 출중했던지라.”
“그가 다시 올 일은 없을 걸세.”
“물론 그럴 것입니다. 교주님께서 하해와 같은 성덕(聖德)을 내리셨거늘, 어찌 그가 다시 그런 참담한 일을 벌이겠습니까.”
“그래, 그는 오지 않겠지.”
이천상의 눈에는 보였다. 저 중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니, 자신이 곧 세상에 나가 천하에 크나큰 불을 일으킬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알았기에 보인다. 보이기에, 알 수 있었다.
“대호법.”
“예, 교주님.”
“정확히 한 달 뒤, 제법 매서운 선물이 도착할 것이네.”
“예?!”
“막지 마시게.”
이천상의 눈빛이 순간 포악해졌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