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믿음의 깊이 (1)
성으로 돌아온 송금백을 본 황곤은,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성주님, 맹주와의 회담은 잘 끝나셨습니까?”
송금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태사의에 앉지도 않았다. 대전 안, 조촐한 회의용 탁자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황곤의 얼굴에 은근한 불안감이 어렸다.
“성주님?”
“본성에서 가장 발이 날랜 놈들이 누구지?”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황곤은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비천용검대(飛天龍劍隊)와 천응단(天鷹團)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두 부대의 특성상, 더 빠른 건 천응단이지만 무력까지 상정한다면 비천용검대가 더 활용성이 좋지요.”
“지금 당장 비천용검대를 산동으로 보내게. 아마 혈전단주나 곡천삭에게서도 곧 연락이 올 것이야.”
“성주님.”
“마교의 병력을 치러 간 무상에게도 지급으로 연락해 두게. 그들을 쫓는 것을 멈추라고.”
“서, 성주님?!”
황곤이 당황하여 물었다.
“갑자기 어찌 그러십니까?”
“마교의 병력은 둘이야. 현재 중원 동남부에서 호시탐탐 본성의 병력을 노리고 있는 놈들을 제외하고, 산동에 또 다른 마교의 병력이 있어.”
“예?!”
“동남부에 있는 놈들에게는 소문을 흘리게. 철혈성이 소교주를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을 파견한다고. 십대고수급의 인사까지 함께 보낸다고 흘리면, 놈들은 절대로 본성의 뒤를 치지 못해.”
쏟아지는 정보와 갑작스러운 명령 앞에선 제아무리 황곤이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주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송금백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서 소교를 묻어 버리기로 했네.”
“예? 지금이요?”
“그렇다네.”
“의천맹주와 거래라도 하신 것입니까?”
송금백은 그에게 담사영과의 대담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황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일시적 동맹…….”
“그렇다네.”
“…….”
“어쩔 수 없었다네. 가능한지를 떠나서, 그 늙은이는 진짜로 중원을 뒤집어엎을 기세였어. 나는 그가 나를 속이진 않았을 거라 믿네.”
대종사끼리의 대담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거짓을 말했다가는, 훗날 크나큰 재앙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말없이 송금백을 보던 황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산동지부와 하북지부, 하남지부에도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아니, 그 세 지방의 모든 사파들에 연락해야겠군요.”
송금백이 고개를 들어 황곤을 보았다.
황곤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혼란스럽습니다만, 이왕 성주님께서 의천맹주와 손을 잡으셨다 하니, 공동의 적을 한시라도 빨리 해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비천용검대와 무상, 수라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예. 정면 승부라면 무상 하나만 보내도 충분하겠지만, 그들이 작정하고 도주를 시도한다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맹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서 소교 옆엔 상당한 강자들이 있을 테니까요.”
송금백이 착잡한 눈으로 황곤을 바라보았다.
황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혼란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황곤은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은 불평할 때가 아니라, 목적한 바를 위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고맙네.’
송금백이 황곤을 중용한 이유는 뛰어난 머리 외에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먼저인지를 아는 군사였다.
“하면 일단 당장은, 마교의 소교주와 그 일당을 섬멸하는 것을 중점으로 성의 전력을 재정비시키겠습니다.”
“그러시게.”
황곤이 서둘러 대전을 나섰다.
송금백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서 소교, 이해하리라 믿네.”
* * *
탁탁.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가 귀를 울렸다.
일행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았다. 심지어 고루마존은 이제 막 도착한 지라 잠시 쉬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행 중 누구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
모닥불을 바라보는 서량의 눈동자는 알 수 없는 고단함과 강단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그 눈을 본 마동필은 생각했다.
‘참 맑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간 소교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셨다. 적 앞에서는 한없이 무섭고 냉정한 모습을, 내 사람들에게는 유쾌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을, 신교의 수뇌부들에겐 격식 있는 진중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거의 평생을 신교에서 살아오며, 신교의 생리와 수뇌부들의 냉혹한 모습에 익숙해진 마동필에게 있어 그런 서량의 모습은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다.
‘확실히 소교주님께서는 뭔가 다르셨지.’
딱딱한 법도와 어느 정도의 냉혹함, 철저한 상명하복은 조직에 꼭 필요하다.
세상은 흔히 부드러운 분위기와 조직원들 간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고 외치지만, 실제 조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한 번의 실수로 목이 날아가는 이 난세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관계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게다가 천마신교는 제육천마왕, 파순을 숭배하는 종교 집단이었다. 세월이 흘러 무파(武派)적인 성향이 강해졌지만 근본은 여전히 신(神)을 모시는 집단이란 뜻이다.
하여 신교의 체계는 냉엄할 수밖에 없었고, 상하와 교법 또한 지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신교였다.
‘그러나 소교주님께서는 마치 신교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신 것처럼 보였다.’
불손한 생각이지만, 처음에는 분명 그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동필이 처음 봤을 때의 서량은 그러했다. 그전까지 삼공자 서량은 교내에서 폭군(暴君)이라 불릴 정도로 악랄하고 흉악한 행보를 보여 주지 않았나. 한데 마동필이 처음 모셨을 때의 서량은 소문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소교주님.’
흔들리는 불빛을 담은 서량의 맑은 눈빛을 보며, 마동필은 속으로 물었다.
‘소교주님께서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계시는지요?’
모시는 분의 속내를 알아보려 하는 것은 불충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량과 함께하며 마동필 역시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그것이 불충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때에 따라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야 할 때였다.
“진마대는 교대로 쉬고 있나?”
마동필이 대답했다.
“예.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삼 교대로 번을 서고 있습니다.”
“좋군.”
이곳은 폐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였다. 진마대원들은 따라오지 못하게 했기에, 지금 이곳에는 다섯 명밖에 없었다.
고루마존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교주님.”
“…….”
“하실 말씀이라는 것이…….”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모닥불을 흔들었다.
모닥불을 바라보는 서량의 눈도 함께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말이야. 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긴장했다.
서량은 어지간해선 말을 돌려서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일행이 긴장하는 이유였다.
“당장 어느 폐쇄적인 마을만 가 봐도 그래. 그들은 평생을 저희끼리 살았기 때문에, 무림인이라는 족속에 대한 상식이 바닥이지. 나나 마존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앵화 정도의 무공으로도 천신(天神)의 재림이니 뭐니 하며 떠받들 거야.”
뜬금없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한걸음에 수 장 거리를 쑥쑥 달려 나간다. 손에서 불과 서리를 뿜고, 열 장정이 못 드는 기물도 한 손으로 손쉽게 들어 올린다.
보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눈에, 그것은 천신의 재림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마을 사람 중 누군가는 앵화를 두고 마귀라고 할 수도 있지.”
여상린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비상식적인 일을 두고서, 저마다 생각과 평가를 달리한다는 것인가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여상린은 똑똑하다.
“맞아. 그리고 장담하건대, 아직까지도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치들이 많다고 생각해. 그 앞에서 우리는, 각자가 가진 생각과 상식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여상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에요.”
“지금 내가 하려는 말도 그와 비슷해.”
“네?”
“조금 엇나간 비유라고 생각하지만, 본질은 같아. 이적(異蹟)을 두고 고뇌할 것인지, 이적을 행하거나 받은 사람을 두고 고뇌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겠지.”
앵화의 얼굴에 은근한 불안함이 깃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교주님께서 뭔가 큰 비밀을 말씀하려 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비밀이, 지금 이 관계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것을.
“저기…….”
“음?”
앵화가 우물쭈물했다. 서량이나 마동필은 항상 봐 와서 괜찮지만, 지금은 신교의 어른인 마존도 계신 자리였다. 그녀로선 함부로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서량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괜찮아. 말해 봐.”
앵화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힘드시면…… 안 그러셔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서량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실제로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마음은 먹었지만, 지금 자신이 뱉을 말이 이들에게 어떤 충격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결과를 장담하지 못해도 밀어붙인 일들이 많았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참으로 쉽지가 않았다.
“아니야. 괜찮다.”
쉽지 않았지만, 앵화의 말을 듣고 그는 망설임을 버렸다.
고민은 많이 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으며, 사람들까지 불러모았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
“나는 서량이 아니야.”
“……?”
일행이 눈을 끔뻑였다.
고루마존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교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미소 짓던 서량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의문으로 가득하던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나는 신교의 삼공자 서량이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삼공자가 아니지.”
“예?”
“삼공자 서량은 죽었다.”
“……?”
“물론 나도 확실하지는 않아. 죽어서 그리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그놈의 몸을 빼앗은 건지.”
탁! 타다닥!
모닥불의 흔들림이 거세어졌다.
일행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서량은 일행을 보지 않았다. 점점 더 강하게 흔들리는 모닥불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 년 전, 나는 죽었다. 서량이 아닌 시절의 나는 죽었지. 하지만 무슨 일인지, 분명 죽었는데도 눈이 떠졌지. 내가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곳,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던 무서운 단체의 삼공자 몸으로 깨어난 거야.”
“……소교주님?”
“그래, 나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하늘의 변덕인지 명부(冥府)의 판관이 일을 잘못한 건지, 분명 죽었어야 할 나는 중원의 남쪽 대지에 똬리를 튼 천마신교 삼공자의 몸으로 다시 깨어난 거야.”
서량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보는 일행의 표정과 눈빛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괴상했다.
“지금의 나는 서량이다. 그러나 난 진짜 서량이 아니기도 하다.”
“에이, 소교주님.”
서량이 여상린을 보았다.
여상린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무게 잡으시면서 얘기하면 진짜인 것처럼 들리잖아요. 농담은 농담이라는 분위기를 줘야 통하는 거라…….”
“농담 아니다.”
“…….”
“그렇다면 내가 미쳤는가? 아니, 그렇지도 않아. 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칠 수가 없지. 마존께서도 아시겠지만, 정신에 이상이 있는 자가 극마를 깨우칠 순 없어. 천만 분의 일의 확률로 깨닫게 된다 한들, 곧바로 제정신을 차리게 되지. 그게 바로 조화경(造化境)이니까.”
여상린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그 말씀이 사실이라고요?”
“그렇다.”
“농담이 아니란 말씀이에요?”
“물론이다.”
“그럼, 그럼 소교주님의 정체가 뭔데요?”
서량이 씁쓸함이 어린 얼굴로, 그리고 어느 정도 후련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살수, 암살의 제왕.”
“……?!”
“살수이면서 최초로 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랐던 당대 최강의 암살자이자, 의천맹주가 다뤘던 가장 흉악한 칼. 살왕 천하진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