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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357화 (357/774)

357화. 믿음의 깊이 (2)

후우웅.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불어오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그런데도 모닥불은 거세게 흔들렸다. 일행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기도가 불길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고루마존은 진지한 눈으로 서량을 직시했다.

서량의 표정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서량이 미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소교주님.”

“말씀하십시오.”

“삼십 년 전, 본교가 대외 활동을 축소하고 신교의 전력을 끌어모은 이래, 저는 중원에 나선 적이 몇 번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해서 중원의 사정에 어두움은 물론, 그들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아시겠군요.”

“예, 알게 되었습니다. 철혈성과 의천맹의 병력과 싸우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많이 발전했지만, 본교는 그보다 더 발전했다는 것을요. 이 늙은이의 무공과 상식이, 아직은 세상에 통하더군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소교주님께서 말씀하신,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는 이 늙은이가 감당하기에 참으로 벅찹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감당하기 힘드시다면, 마존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는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아요.”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씀은?”

“제게 손을 쓰셔도 좋다는 뜻입니다.”

서량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이 깜짝 놀라 고루마존을 보았다.

고루마존의 눈이 충혈되었다.

“그 말씀, 진심이신지요?”

“그렇습니다.”

“순순히 이 늙은이의 손에 목숨을 내놓으시겠다는 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저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죽더라도, 지금 죽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니 부득불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 대체 그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잔뜩 날이 선 고루마존의 표정과는 상반된 차분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일행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오히려 평상심을 되찾고 있었다.

“마존께서 걱정하시는 게 무엇인지는 압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제 목표와 꿈을 이루는 데 있어 신교가 피해 볼 일은 없습니다.”

“그걸 어찌…….”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면, 신교를 지금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제 목표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다고!”

고루마존의 강렬한 호통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고, 이 나의 분노가 사라질 줄 알았다면 오산이외다!”

일행의 표정이 변했다.

고루마존의 말투가 달라졌다. 더 이상 서량을 소교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앵화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 마존 어르신! 소교주님께서는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셨으니…….”

“그러니 오해하지 마라?”

“아, 아니…… 그것이…….”

고루마존의 목소리가 고압적으로 변했다.

“자네들은, 너희들은 지금 저자가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정신이 없어서 헛소리를 뱉고 있다 생각하는가?!”

일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솔직히 그들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머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는데, 가슴은 그렇지가 않다. 서량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우우우웅.

고루마존의 몸에서 흑갈색 마기가 번져 나왔다. 강한 심동(心動)이 저도 모르게 마공을 운용케 한 것이다.

“자네들은 몰라! 이 사람은 극마를 깨우친 자다! 그것도 교주님께 군림마황기까지 사사(師事)한 불세출의 천재야! 미치고 싶어도 미칠 수 없단 말이다!”

“그것은…….”

“더하여 이 마기! 눈빛도, 목소리도 속일 수 있지만 기(氣)는 속일 수 없다! 지금 이 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야!”

쿵!

고루마존의 주먹이 땅을 뒤흔들었다.

벌떡 일어선 그가 몸을 돌려 저 멀리 숲으로 걸어 나갔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고루마존의 등을 바라보던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마존에게 다녀올 테니, 생각들을 정리했으면 한다.”

앵화가 벌떡 일어났다.

“소교주님! 그, 그냥 여기에 계시면…….”

“괜찮아.”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넌 아직도 나를 소교주라 불러 주는구나.”

앵화의 눈이 점점 젖어 들었다.

마동필과 여상린을 차례로 둘러본 서량이 이내 몸을 돌렸다.

휘잉.

두 사람이 사라지자, 다시 숲에 바람이 불었다.

한참이나 걸어가던 고루마존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담담해져 있었다. 줄곧 그의 뒤를 따라가던 서량은 기도로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끙.”

고루마존이 바위에 등을 대고 앉았다.

가만히 그를 보던 서량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평화로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서량이 헛웃음을 흘렸다.

“일부러 화내 주신 거 압니다.”

“화가 나서 화를 낸 것입니다. 저는 누구처럼 광인(狂人)이 아닙니다.”

“하하, 정말로 화가 나셨습니까?”

고루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그는 진실을 말했다.

“제가 어찌 소교주님께 화를 내겠습니까? 아마 저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물론이지요.”

“한데 어째 행동은 그게 아닌데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소교주님 앞에서 똥배짱을 부려 보겠습니까?”

“하하하!”

서량이 후련한 웃음을 터트렸다.

빈말로도 웃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고루마존과는 술자리 한 번, 비무 한판 한 것이 전부였다. 다른 일행과는 달리 큰 접점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는 서량을 이해했고, 동시에 도와주기까지 했다.

서량은 새삼 자신이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다.

고루마존이 다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나무라다니요?”

“저만큼, 아니 어쩌면 저보다 훨씬 더 소교주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 믿음은 절대적이나,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에 혼란도 강할 것입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설령 저 친구들이 칼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을 생각은 없지만, 설령 저들 손에 죽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과 충격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허허.”

“그래서 마존께 감사드립니다. 마존께서 저들의 화를 다 가져가 주셨으니, 저 친구들도 보다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을 테지요. 신세를 졌습니다.”

“이 정도로 신세는요. 그나저나…….”

고루마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늙은이의 연극을? 그래도 제법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는데요.”

“처음엔 속았습니다만, 군림마황기 운운하실 때 깨달았습니다.”

“허어.”

“굳이 군림마황기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고루마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소교주님은 못 당하겠습니다.”

그는 서량이 군림마황기를 익혔다는 사실을 일부러 말했다.

마동필과 여상린, 앵화에게 다시 한번 인식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군림마황기를 익힌 자는 교주와 소교주밖에 없다는 사실을.

군림마황기를 익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서량은 교주의 적통이며, 그 외에 다른 자질구레한 이유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뭐, 말이야 그렇게 하지 이 늙은이도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시겠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도 소교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인지 확신이 안 섭니다.”

신을 향한 교도들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고루마존은 광신(狂信)으로 유명한 신교에서도 원로 중의 원로였다. 그런 그조차 차기 신으로 내정된 서량의 말이 사실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량의 말이 충격적이라는 뜻이리라.

서량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그 말 외에 다른 말씀은 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줄이야…….”

탄식하는 고루마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량이 다소 도발적인 물음을 던졌다.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제가 살왕 천하진이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의천맹주 휘하에 있었다는 말씀도 드렸지요.”

“분명 그러셨습니다.”

“만약 저였다면, 의천맹주 휘하에 있던 살수라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주먹이 나갔을 것 같습니다.”

“허허,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이놈이 신교의 기밀문서나, 마공 따위를 비밀리 의천맹에 전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고루마존이 빙긋 웃었다.

“방금 소교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듣고 확실히 믿기로 했습니다. 소교주님께서 살왕 천하진이었으며, 동시에 신교를 위해 한 몸 바치실 분이라는 것을요.”

서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존의 그런 성격을 예상하고 선수를 친 것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한도 끝도 없는 얘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하하.”

“소교주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 늙은이의 안목이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제가 봤을 때, 소교주님의 말씀은 전부 사실이며, 본교를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리실 분도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더하여.”

“……?”

“소교주님께서 진짜 서량이든 아니든, 교주님께서 자질과 능력이 되지 않는 자를 후계자로 세우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소교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소교주님보다 교주님을 천 배, 만 배는 더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교주님께서는,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줄 만큼 만만하신 분이 아니지요.”

“……그렇군요.”

“예, 그렇습니다.”

고루마존이 서량의 정체를 듣고도, 혼란스러워했을지언정 별 고민은 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구대천마 이천상을 믿는다. 교주를 위해서라면 단 하나뿐인 목숨도 고민 없이 던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교의 마인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단순히 이천상이란 사람의 됨됨이를 넘어, 그의 능력도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대로 서량에게 이어진다. 고루마존은 이천상은 물론 서량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신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신(魔神)을 대하는 마인의 진정한 태도다.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곧 정리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나저나, 저들의 마음은 정리가 될 것이되 직면한 위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느닷없이 현실로 훅 떨어진 것 같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고루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교주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고루마존은 더 이상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았다.

“슬슬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곧 있을 위험에 대처해야겠어요.”

“소교주님.”

“말씀하십시오.”

“한데 왜 굳이 지금 그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기회는 언제든지 있을 텐데요.”

서량이 저 멀리 모닥불이 아른거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은, 최소한 지금보다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전에 저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리고…….”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제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저들에게만큼은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고루마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울 것은 없습니까?”

“쉬십시오. 언제 써먹게 될지 모르니까요.”

“허허, 영광입니다. 아,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예.”

“교주님께도 말씀드리셨습니까?”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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