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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358화 (358/774)

358화. 믿음의 깊이 (3)

“저기가 확실하군.”

광혼의 외양은 제법 험해 보였다. 수일간 지속된 추격전 때문에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곡천삭이 푸른 매를 날리고 있었다. 그의 팔뚝을 박차고 떠난 매는 남쪽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보통 매가 아니다. 적어도 영물(靈物)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지원 요청을 하려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이쪽은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절대고수 하나와 현무대라는 걸출한 병력이 칠십이나 있다. 반면 곡천삭은 혈전단을 몽땅 잃지 않았던가.

어슬렁대며 떨어진 알곡이나 주워 먹을 작정이 아니라면, 그 역시 병력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물끄러미 곡천삭을 보던 광혼이 현무대에게 외쳤다.

“예서 대기하고 있도록.”

파아앙!

광혼이 재빠른 신법으로 곡천삭에게 다가갔다.

후욱.

곡천삭의 몸에서 강력한 기파가 넘실거렸다.

광혼의 눈이 반짝였다.

‘과연.’

수일간의 추격전에서 곡천삭은 몇 번이고 마존과 부딪쳤다. 그 횟수가 자신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많았다.

그런데도 벌써 저만큼이나 내력을 회복시켜 놓았다. 무공은 자신보다 아래일지언정, 구름처럼 일어나는 이 웅장한 기도만큼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처억.

광혼이 곡천삭과 십 장 거리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 사이로 알 수 없는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광혼이었다.

“그간 대화가 별로 없었지?”

“…….”

“용케 화경을 깨달았군. 사문을 능멸한 패륜아라더니, 오히려 사파 잡졸 무리로 가서 더 큰 경지를 구축했어. 곤륜에서 배웠다 한들, 태생의 저급함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날카로운 도발이었다. 곡천삭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광혼과 일대일 겨룸에서도 우위를 점하기 힘든 판에 현무대까지 있지 않은가. 지금은 화가 나도 분을 삭일 때였다.

광혼이 야릇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선 정파 무림의 수치인 자네를 당장 잡아 죽이고 싶지만, 뭐 어쩌겠나? 보다 큰 악(惡)이 눈앞에 있는데, 소악(小惡)에 연연하여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함께하세.”

“…….”

“지금껏 우리를 견제하며 저 마교도들을 추격하느라 심력 소모가 크지 않았나? 그럴 바에야 일단 함께 마교 놈들부터 잡고, 우리 문제는 그다음으로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으이.”

다소 거칠지만, 광혼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곡천삭의 얼굴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광혼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왜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는가?”

“…….”

“자네는 물론, 내게도 선택의 시기가 왔기 때문이야. 쓸데없이 심력 소모하는 건 자네만이 아니거든. 그럴 바에야 일시적으로 손을 잡든, 자네부터 죽이든 해야 하지 않겠나?”

“…….”

“물론 우리는 자네를 죽일 수 있네. 하지만 자네가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쓴다면, 우리로서도 다소 귀찮아지겠지. 그리고 그 귀찮음은 마교 놈들을 만났을 때, 큰 전력 소모로 이어질 거란 말일세.”

“그래서 손을 잡자는 것이오?”

“그렇다네.”

광혼의 안광이 붉어졌다.

“하나 알아 두게. 내가 괜히 멀쩡한 이름을 버리고 광혼이란 이명을 쓰는 게 아닐세.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혈전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다.

곡천삭이 여전히 망설이고, 광혼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살기가 일어날 때였다.

푸드드득!

붉은 깃털을 흩날리는 매 한 마리가 광혼에게 날아왔다.

‘홍천신응(紅天神鷹)?’

광혼이 팔을 세워 매가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매의 발목에 묶인 연통을 풀었다.

“……허허.”

너털웃음을 짓던 광혼이 곡천삭에게 연통을 던졌다.

“받게.”

곡천삭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연통을 받았다.

“읽어 보시게.”

가만히 광혼을 주시하던 그가 서신을 읽었다.

이내 곡천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어.”

“마침 잘되지 않았나? 그간 자네를 살려 둔 보람이 있었구먼.”

“하면, 이제부터 동맹이오?”

“각파의 수장들끼리 약속을 깨지 않는 한, 그런 셈이지.”

곡천삭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광혼의 앞까지 다가왔다.

“천천히 가 봅시다.”

광혼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잔뜩 긴장해 있다가 돌연 뻔뻔해진 곡천삭의 행태가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잠시 대기할 것이네. 그리 알고 계시게.”

“놈들이 도망가도록 놔둘 생각이오?”

“도망갈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아니야. 마존씩이나 되는 놈이 지금에야 우리를 따돌리려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소교주든 뭐든, 저쪽도 힘이 다 빠졌다는 뜻 아니겠는가?”

“…….”

“괜히 다급하게 움직여 힘이 빠진 상태로 싸우는 것보다는 천천히 압박하는 것이 백배는 더 낫네. 자네는 그런 것도 모르나?”

곡천삭의 볼이 씰룩였다. 확실히, 그는 개인의 무(武)에만 치중했을 뿐 전략 전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좋소. 그럼 얼마나 기다릴 생각이오?”

“이쪽 체력을 생각하면 반나절 정도는 쓸 생각이네.”

“이왕 그럴 거면, 반나절에 반나절만 더 기다립시다.”

“음? 왜지?”

“방금 보셨잖소? 전서응을 날린 것.”

광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랬지. 병력을 부르는 것 같더군. 하나 한나절 만에 도달할 만큼 가까운 곳에 병력이 주둔해 있나?”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리라 생각하오.”

“그렇단 말이지?”

“그때 돼서 도착하지 않으면, 그대로 가십시다. 알아서 쫓아오겠지.”

“좋네. 그리하지.”

광혼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이 트기 전 새벽이었다. 아마 한나절 뒤 출발하여 마교도들과 조우하게 된다면, 야간전을 치르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사냥이 되겠어.”

* * *

‘달라졌다.’

가부좌를 틀고, 양 무릎 위에 천마도를 올려놓은 서량은 천마도의 변화를 느꼈다.

우우우웅.

천마도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군림마황기를 끌어 올리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공명을 시도한다. 육신에서 뿜어지는 마기를 주축으로 공명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칼로 인해 마기가 들끓은 적은 또 오랜만이었다.

‘봉인이 풀렸나? 그럴 리가.’

우웅. 우웅.

은은하게 울리는 도명(刀鳴)은 청아하여 듣기가 좋았다.

만약 천마도의 봉인이 풀렸다면 무지막지한 마기의 폭풍으로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이천상의 선천마기는 그렇게나 대단했다.

그 대단한 마기를 봉인해 놓았음에도 칼날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천마도는 가히 천하제일마병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러는 거지?’

그는 일부러 내상을 치료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이 상태에서 내상을 치료하려 해 봤자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하다. 지금 이대로는 물론, 며칠 치료한 상태로도 효율적인 섬멸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물론 어떻게든 머리를 써서 상대할 순 있겠지만, 적이 그사이에 얼마나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량은 군림마황기에 모든 걸 걸었다.

정확히는 군림마황기 상의 삼대비기 중 하나, 반천축정술(反天畜精術)을 쓸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감히 건드릴 엄두도 못 냈던 기공술이었다. 그러나 이젠 가능하다.

비요왕과 싸우면서 군림마황기의 경지가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좌선에서 오는 깨달음보다 목숨을 건 실전에서 얻은 깨달음이 몇 배는 더 값지고 귀했으며, 탄탄하고 빨랐다.

문제는 반천축정술을 쓸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태 내상을 돌보지 않았다.

덕분에 일각, 일각이 죽을 맛이었다. 한데 천마도까지 심상치 않으니, 참으로 뒤숭숭하다.

스르르륵.

서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천마도를 들여다보는데, 천마도에서 한 줄기 마기가 치솟았다. 치솟은 마기는 장심(掌心)으로 흘러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맥문을 넘어 전신으로 퍼져 나가려 했다.

‘회복?!’

천마도에서 뻗어 나온 고순도의 선천마기가 군림마황기와 동조하며 내상을 치료하려 들고 있었다.

순간 서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흡!’

치잉!

천마도가 땅에 떨어졌다.

‘군림마황기와 알아서 반응하는군. 이런 걸 보면, 비록 칼이지만 생명이 있는 것 같아.’

서량이 천마도를 쥐고 군림마황기를 대성하면, 그는 어떠한 전투에서도 죽지 않는 불사신의 모습을 보일 것이다. 천마도에 담긴 이천상의 선천마기는 그 농도가 상상을 초월하여, 수백 명을 절정고수로 만들 정도였다.

그러한 기(氣)는 동류인 서량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군림마황기를 대성했을 때, 반천축정술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한 줄기 인기척이 들려왔다.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내상이 심해서 기감도 죽은 것이다.

스륵.

마동필이 천마도를 공손히 들어 올렸다.

서량이 마동필을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서량을 내려다보던 마동필이 무릎을 꿇었다.

“칼을 떨어트리셨습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공손한 말투였다. 목소리에 깃든 혼란도 거의 없는 듯했다.

“마음은 어떠냐?”

“…….”

“내가 괜한 말로 심기를 흐트러트렸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많이 힘들었을 텐데?”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소교주님께서 달려오신 길에 비하면, 저의 힘듦이야 조족지혈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나는 네가…….”

“소교주님.”

“…….”

“소교주님께서는, 어쩌면 그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고민을 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 녀석들의 원망을 받을 수도 있고,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셨을 수 있습니다.”

“잘 아는구나.”

“그래서, 송구하오나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날 만도 하지.”

“아닙니다. 소교주님께서는 제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십니다.”

“엉?”

“소교주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동필이 서량을 직시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성벽처럼 든든하던 마동필의 눈빛에, 다소간의 서운함이 깃들었다.

“제가 비록 능력이 없어 소교주님을 잘 보필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소교주님을 향한 충정과 믿음을 덜 보여 드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제 능력의 모자람은 언제든 꾸짖어 주십시오. 그러나 저의 충심만큼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동필아.”

“소교주님께서 삼공자셨든 살왕이었든, 아니 비천한 거지였다가 운이 좋게 그 몸을 차지한 사람이라도 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한결같이 소교주님을 모실 뿐입니다. 단순히 소교주라는 직책을 갖고 계셔서가 아닙니다. 황송하게도 그간 제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소교주님을 존경하고 믿습니다.”

“…….”

“오직 그것뿐입니다.”

서량은 나직이 심호흡했다.

마동필, 나아가 여상린과 앵화 역시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마동필이 저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간 말없이 자신을 지켜 와 주었던 이 년간의 세월이, 지금 마동필의 말에 전부 녹아 있었다.

마동필이 눈을 감았다.

‘부끄럽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그도 한순간은 흔들렸다. 자신의 믿음과 신앙이 송두리째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상대의 과거가 어찌 되었든, 그는 서량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과거의 그는 호위무사이기 전에 마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마인이기 전에 소교주의 호위무사였다. 그는 진실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마동필이 진심을 담아 외쳤다.

“제 시체를 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소교주님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곤란한데?”

“예?”

마동필이 고개를 들었다.

얼빠진 듯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서량은 저도 모르게 푸하하 웃었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외치고 있어?! 아주 그냥 손발이 다 오그라드네!”

“소, 소교주님.”

“곧 전투가 벌어질 거야. 나는 내 내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적들과 싸워야 해. 이번 전투에서 네가 나설 일은 없다.”

“예?!”

“하지만…… 그래. 이번 전투가 끝나고 나서는, 네가 지금껏 그리도 외쳐 대던 호위무사의 도리를 존중해 주는 주인이 되어 보마. 앞으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 적의 칼이 내게 닿기 전에 네가 다 죽여라.”

“…….”

“그럼 됐지?”

마동필의 눈에 격정이 어렸다.

“영광이옵니다.”

“동필아.”

“예, 소교주님!”

“고맙다.”

마동필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대답 없는 인사, 그것이 곧 대답이었다.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적과 조우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판에 영 심란했거늘, 네 덕분에 내상까지 다 낫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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