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359화 (359/774)

359화. 믿음의 깊이 (4)

하루가 지났다.

겨울의 새벽 공기는 폐를 꽝꽝 얼릴 만큼 차가웠다. 그러나 동이 트기 전의 이 한기(寒氣)는 여상린에게 있어 최고의 보물이었다.

우우우웅.

여상린의 몸에 은은한 백광(白光)이 흘렀다. 보기만 해도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한기였다.

여상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되는구나.’

황보세가에서 저도 모르게 빙백쌍수경(氷魄雙手勁)을 구사했었다. 그때의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그 무공을 구사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공심법의 성취가 그만큼 오르지도 않았는데 나름대로 비기라 할 수 있는 쌍수경을 내치다니? 확실히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야 알겠다.

‘내공심법을 대성하지 않아도, 깨달음이 지극하다면 그보다 더한 무공도 펼칠 수 있어.’

치이이익.

여상린의 오른손에서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지극한 깨달음으로 이와 같은 수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면?’

위이이이잉!!

원형의 형태를 간직한 단전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단전이 회전하며 주변의 한기와 음기를 무서운 속도로 빨아들였다. 놀랍게도, 그 많은 양의 자연기(自然氣)를 흡수하면서도 단전의 용량은 줄어들고 있었다.

‘아니지, 줄어드는 게 아니야.’

압축되고 있다.

풍성한 그릇이었던 단전이, 마치 내단과도 같은 형태로 단단하게 압축되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진기의 운용이었다. 내공심법 자체가 화단(化丹)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누구도 이런 식으로 시도하긴 어렵다.

‘된다, 돼.’

심법을 대성하기도 전에 펼쳐 낸 궁극의 수법. 한데 그 수법 덕분에 내공심법도 대성에 이르도록 단련되었다. 전후가 바뀐 성장이지만, 이것은 결코 사도(邪道)가 아니었다.

후우우웅.

내단이 어찌나 고속으로 회전하는지 아랫배가 뻐근해질 정도였다. 덕분에 단전이 내단으로 바뀌기까진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후우.”

눈을 뜨고 숨을 뱉는 여상린의 얼굴에 상쾌한 기색이 어렸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만.”

“학!”

깜짝 놀란 여상린이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 온 것인지, 팔짱을 낀 서량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오셨어요?”

“응.”

“아니 근데 여기는 어쩌다가……?”

“전투에 앞서 최종적으로 기공을 점검하려 했지. 한데 선수를 빼앗겼군.”

여상린이 툴툴거렸다.

“평소에 안 그러시더니 웬일로요?”

마동필 정도만 되어도 운공조식에 따로 호법이 필요치 않다. 내부를 관조하는 집중력과 주변을 살피는 기감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서량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몸 상태가 영 안 좋아서 말이지.”

여상린이 눈을 치떴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서량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너무나 거대해서 오히려 평범해 보였던 기(氣)가, 지금은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상이 그대로네요? 평소에는 금방 회복되셨잖아요?”

“쓸모가 있어서 놔뒀다.”

“쓸모라뇨? 몸이 아픈 게 쓸모가 있다고요?”

“그런 게 있다.”

여상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픈 걸 핑계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속셈은 아니죠? 미리 말해 두는데, 저는 그런 거 상관 안 해요.”

“뭐가? 아, 내 과거?”

“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야, 막말로 동필이나 앵화라면 모를까, 너는 해당 사항 없잖아? 쟤들은 날 모시는 애들이지만 너는 이방인이라고.”

“킁!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한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 했으면 옆으로 나와. 그 자리가 아주 괜찮아 보이더만.”

“쳇.”

여상린이 미적대며 한 걸음 옆으로 가 앉았다.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좀 더 가 주지 않으련?”

“호법이라고 생각하세요.”

“퍽이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량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여상린이 앉았던 자리에 가부좌를 튼 서량이 눈을 감았다. 구유마공이나 군림마황기를 끌어 올리는 건 아니었고, 그저 군림마황기 상의 마공들을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집중했을까.

“아오, 진짜.”

서량이 투덜거리며 눈을 떴다.

여상린이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왜요? 잘 안 돼요?”

“그래, 인마! 옆에서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집중이 안 되잖아!”

“영 산만하시네.”

“이걸 그냥 확.”

서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뭐야? 왜 그러는 건데?”

“살왕이었어요?”

결국은 그거였군.

서량이 자세를 편하게 했다. 이방인이라 했지만, 그간 여상린과 쌓은 우정도 무척이나 깊은 것이었다. 막말로 그녀가 아니었다면 중원으로 나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맞다.”

“헐! 암살계의 고금제일인이라던 그 살왕이 맞다고요? 백주에 당당하게 쳐들어가서 목표물 모가지만 톡 잘라 내곤 유유히 빠져나왔다던 그 살수지왕이 소교주님이었다고요?”

“그렇다니까.”

“세상에…….”

여상린이 입을 쩍 벌렸다.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리 놀란 척을 해? 하나도 안 놀랐으면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던 여상린이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뭐, 이 정도 반응은 보여 줘야 마음이 좀 편해지실까 해서요.”

“아주 심란한데.”

“그럼 더 좋네요. 벌 받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야, 나도 어쩔 수가 없었잖아. 죽다 살아났는데 뜬금없이 천마신교의 삼공자가 되어 있었다고. 그때 내 심정을 알아?”

“알아야 하나요?”

“……몰라도 되지. 어쨌든 나도 힘들었다고. 나 사실은 살왕이오, 하면 미친놈 쳐다보듯 볼 거 아냐. 무공만 잃은 삼공자가 아니라 정신까지 놓아 버린 삼공자가 돼서 평생 손가락이나 빨면서 지내게 됐을걸?”

“설마 그러기야 하려고요.”

“내가 본교를 좋아하긴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말도 못 하게 살벌한 동네라는 것도 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살지만 그때는 정말 살얼음판이었다니깐.”

“그게 좀 궁금했어요. 옛날에 무슨 심정으로 버티셨는지요. 앵화나 마 호위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듣긴 했는데, 그냥 그랬구나 하고 넘겼거든요.”

“말도 마라. 그때는 말이야…….”

서량은 투덜대면서 당시의 힘겨웠던 심정을 토로했다.

깨어나자마자 이천상에게 불려 갔던 이야기, 고죽림에 처박혀서 죽을 똥을 쌌던 경험, 감찰사로 마도칠가를 돌았던 일, 야수궁을 거쳐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기까지 등등.

평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여상린에게 털어놓았다. 여상린은 때론 놀란 얼굴로, 때론 동정 어린 표정으로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며 서량의 얘기에 흥을 돋웠다.

“……그러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헤에, 이렇게 얘기를 들어 보니까 정말 앞만 보고 달리셨네요.”

“그런 감이 있지. 뭐, 여유롭게 달릴 심정도 아니었으니까.”

“그러게요.”

서량은 문득 드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였다.

“쳇, 하다 보니까 별 얘기를 다 한다, 너한테. 동필이한테도 안 한 얘긴데.”

“클클.”

“뭐야, 그 이빨 다 빠진 할머니 같은 웃음은.”

“실례예욧!”

한 차례 서량을 쏘아붙인 여상린이 다시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좀 마음이 풀어지셨나요?”

서량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풀어지고 말고 할 게 있나. 다만 속 시원하게 얘기를 하니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긴 하네.”

“그럼 됐죠.”

여상린은 연신 히죽거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서량도 몰랐다.

“그나저나 소교주님도 진짜 걸물은 걸물이네요. 아무리 살왕이었대도 고작 이 년 만에 여기까지……. 와, 저라면 꿈도 못 꿨을 듯.”

“잠잘 시간까지 쪼개 가면서 몸부림치면 어떻게든 되긴 되더라.”

“저는 천성이 게을러서 그렇게는 못 해요.”

“알면 고쳐, 인마. 누구는 부지런한 게 좋아서 이 난장, 저 난장치고 살겠냐.”

“부지런해지지 않아도 옆에서 다 도와주니까요.”

“그러다 나중에 칼 맞는다.”

“안 맞도록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네 오라비한테 건의해.”

여상린이 낄낄대면서 웃었다.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확실히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동필과의 대화 이후 한숨 돌린 것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여상린이 몸을 일으켰다.

“적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긴장하진 마세요. 비요왕과의 전투로 골병이 나셨을 텐데, 저희가 잘 처리해 볼게요.”

“아서라. 쓸데없이 사람만 죽어 나간다.”

“무슨 수를 쓰시려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지금 소교주님 상태로는 절대 적을 감당할 수 없어요. 마 호위는 고사하고 저랑 싸워도 아슬아슬할 상태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뭐, 네 말이 맞아.”

서량이 눈을 빛냈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지, 이 싸움은.”

다시 하루가 지났다.

“소교주님.”

마동필의 음성에 걱정이 묻어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서량의 상태는 이전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안색은 창백하고, 눈 밑은 거무죽죽했다. 외양만 보면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겨울철이라 바람도 찬데, 내상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식사도 제때하고 잠도 푹 잤지만 근본적으로 치료가 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고루마존 역시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이 싸움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마동필이 고루마존을 힐끔거렸다.

서량에 대한 충심을 완고히 지킨 후, 그는 고루마존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부끄러웠고,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았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안색이 나빠서인지, 그의 웃음은 묘하게 처연해 보였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게 다 수가 있다고요. 마존께서도 한발 물러나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그랬습니다만…… 그때는 소교주님께서 이토록 힘들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바라 왔던 상태니까.”

“허어.”

고루마존은 연신 수염을 쓰다듬었다.

날이 갈수록 상세가 심각해진 서량과 달리, 고루마존과 마동필 그리고 여상린은 몸을 팔 할 이상 회복한 상태였다.

특히나 마동필의 회복 속도가 눈부셨다. 체내에 남은 고농도의 사기(邪氣)가 오히려 금강야차마공의 치상결을 극대화했기 때문이었지만, 그걸 고려해도 회복이 빨랐다. 이유인즉, 당시 삼십이 넘는 절정고수를 상대하며 그 역시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기 때문이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마대도 체력을 회복한 것 같습니다.”

삼백 병력이었던 진마대의 수는 현재 이백오십이 조금 안 되었다. 황보세가에서 오십이 넘는 마인들이 전사(戰死)했기 때문이다.

서량은 새삼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차라리 의천맹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면, 마도의 대의(大義)를 위해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은 소교주를 지키기 위해 왔다가 전투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시야를 더 넓혀야겠어.’

희생자의 숫자를 생각하자 새삼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었다.

소교주는 신교의 모든 병력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다. 그렇다면 그만한 책임감과 무게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머리로만 알았던 사실을, 이제는 가슴으로도 받아들였다.

자신의 과거를 당당하게 받아 준 이들이 있기에, 너무도 오랫동안 품고 있었기에 오히려 잊고 있던 한(恨)이 풀렸기에 비로소 스스로를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었다.

‘비요왕을 잡으러 간 건 실수였다. 그러나 결국 잡았으니 후회하진 않아.’

파직! 파지직!

서량의 손끝에서 시퍼런 전광이 이글거렸다.

“……결국, 내게 있어 비요왕은 심마(心魔)였던 것이로군.”

그때, 저 멀리서 앵화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틀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그녀가 제법 큼직한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릇에선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교주님!”

“앵화야?”

“이거 드세요!”

서량이 얼떨떨한 눈으로 그릇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고깃국이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심지어 한겨울에 어떻게 잡은 것인지 토끼고기로 국을 끓여 온 것이다.

“곧 싸움이 벌어질 텐데…… 기운을 차리셔야죠.”

앵화의 몸은 지저분했다. 흙이 잔뜩 묻은 옷과 숯이 묻어 까매진 얼굴은 초라했고, 피딱지가 앉은 손은 애처로웠다.

모시는 분의 과거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량에게 줄 보양식을 만들고자 홀로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량은 순간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일관된 믿음을 보여 준 마동필이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 준 여상린처럼 별다른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행동으로 감동을 전해 준 것이다.

“고맙다, 앵화야.”

“벼, 별말씀을요!”

서량이 울창한 숲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침내 적들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앵화가 만들어 준 고깃국 먹고, 저 망할 놈들 혼내 줘야겠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