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천마(天魔)의 발아래 영광 있으라 (1)
크르릉.
벌러덩 엎드린 호왕이 땅을 벅벅 긁었다.
여상린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호랑이가 귀엽기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산더미처럼 큰 대호 중의 대호가 말이다.
그런 호왕 앞에는 금호가 있었다.
으드득! 우물우물.
금호는 멧돼지 한 마리를 야무지게 뜯어 먹고 있었다. 어디서 잡았는지 그 크기가 어지간한 암호랑이 못지않았다.
“자연의 생리가 약육강식이라지만…….”
여상린의 얼굴에 떨떠름한 빛이 떠올랐다.
“새삼 놀랍네. 어떻게 사냥감을 저렇게 만들어 놓지?”
멧돼지의 몸통은 호왕의 반밖에 안 됐지만, 머리통은 호왕만큼이나 컸다.
그 거대한 게 거의 박살이 나 있었다. 호왕의 앞발에 제대로 후려 맞은 결과였다.
그리고 지금은 금호의 한 끼 식사였다.
“그놈 참, 잘 먹네.”
길쭉한 주둥이로 앞다리를 두 개나 해치운 금호의 얼굴은 제법 행복해 보였다. 이대로 한 마리를 통째로 해치울 기세였다.
물론 그것은 여상린의 착각이었다.
금호가 피로 물든 주둥이 주변을 야무지게 혀로 핥은 후 멧돼지를 툭툭 건드렸다.
쿵.
마치 신호를 받은 것 같았다. 호왕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겁지겁 멧돼지의 내장을 파먹기 시작했다.
“우웩.”
여상린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소교주 앞에서는 하도 순해서 가끔 잊어버리지만 결국 호왕도 맹수다. 먹잇감을 잡으면 게걸스럽게 살코기를 뜯어 먹고 싱싱한 내장을 파먹는 놈이란 말이다.
“어후, 피 냄새. 야! 너 다 먹고 냄새 지우기 전까지는 내 옆에 오지도 마! 알았어?”
호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그 큼직한 대가리가 멧돼지의 배 속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여상린은 진저리를 치며 소로를 걸어 나왔다.
“어? 언니, 어디 계셨어요?”
“그냥, 호왕이 사냥하는 거 구경하러 갔었어.”
앵화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끔찍하진 않았어요?”
“경건하게 머리통을 박살 내던데.”
“윽.”
“그나저나 너도 참 신기하다.”
“네? 뭐가요?”
“소교주님이 적들 머리통 작살내는 걸 지겹도록 봐 왔으면서 새삼스럽게.”
“그거랑 이거는 달라요. 그리고 얼굴 보니까 언니도 영 껄끄러워하는 것 같은데요?”
“커흠. 그나저나 마 호위는?”
“잠깐 마을로 나가셨어요. 생필품 좀 사신다고.”
“진마대는? 진마대원 시키면 되잖아?”
“소교주님 드릴 건 직접 골라야 한다고…….”
여상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 정성도 그런 정성이 없네. 어휴, 호위도 정말 힘든 일이야.”
“헤헤.”
“그나저나 그건 뭐야? 냄새가 아주 좋은데?”
앵화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국자로 솥을 휘휘 젓고 있었다. 큼직한 솥에는 희멀건 고기 조각과 각종 채소가 들어가 있었다.
“그냥 어쩌다 만든 요리예요.”
“양이 엄청 많네.”
“원래는 이만한 솥으로 대여섯 번은 해야 돼요.”
“뭐? 왜?”
“진마대 마인들도 입이니까요.”
“아! 그럼 이번에는?”
“각자 해결한대요. 그래서 우리 먹을 것만 하는 중이에요.”
“세상에, 우리라고 해봤자 다섯밖에 안 되는걸?”
앵화가 여상린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여상린은 그 부담스러운 눈빛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허허험!”
“충분히 해 놨으니까 소교주님 드실 거 뺏어 먹지 마세요.”
“야! 내가 언제 뺏어 먹었다고!”
“매번요.”
“세상에 이렇게 억울하고 서러울 일이 있나. 나도 나름의 눈치가 있고 예의를 아는 사람이야. 남이 먹을 거 넘보지 않을 정도의 양심은 있어!”
“소교주님이 만날 배려해서 조금만 드시는걸요.”
“……그랬어?”
“제가 소교주님 양을 아는데, 평소의 반절밖에 안 드시는 거예요. 다 언니 배려한 거라고요.”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앵화가 저리 말하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그랬어? 에이, 사람 무안하게 왜 그러셨대? 안 되겠다, 소교주님 보러 가야지.”
“안 돼요.”
“엥? 왜?”
“아직 운기 중이세요.”
여상린의 눈이 커졌다.
“아직도? 벌써 나흘째인데?”
“저도 모르겠어요. 많이 무리하신 것 같긴 한데…….”
“아!”
여상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더더욱 가야겠어.”
“네?”
말을 이으려던 앵화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새 여상린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휴우, 나도 저런 신법 배우고 싶다.”
* * *
‘확실히…….’
며칠 동안 먹지도 않고 운기만 한 서량의 얼굴은 상당히 핼쑥해져 있었다.
반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내기(內氣)는 이전과 달리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후유증이 있군.’
반천축정술은 불멸의 회복술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효용을 지녔지만, 매번 펼칠 수는 없었다.
적의 공격에 끊임없이 축정을 하여 내력을 살릴 수 있다면 지칠 일도, 다칠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반천축정술이야말로 역천(逆天)의 극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흡정마공처럼 내공을 강탈하는 게 아니기에 부작용도 없거니와, 상대를 해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회복만을 꾀할 수 있으니까.
‘순간의 회복으로 몸 상태와 전투력을 끌어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몸에 부담이 없는 건 아니야. 당장의 전투는 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기가 들끓고 혈맥이 손상될 위험이 있다.’
극에 이르도록 익히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서량의 수준으로는 위기 상황에 딱 한 번 쓰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고도 후유증이 남아 끊임없는 운공조식으로 몸을 보(保)해야 했다. 그 탓에 전투 후, 나흘째가 되는 오늘에서야 제멋대로 뒤틀리던 내공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서량이 눈을 떴다.
자연스럽게 뜬 눈은 평소처럼 맑았다.
“이 정도도 엄청난 거지. 생사의 경계에서 적의 공격을 역이용해서 회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숨 하나를 여벌로 갖고 다니는 것과 같아.”
그렇다.
목숨을 건 승부에서 생(生)과 사(死)는 한 끗으로 갈리는 법이다. 수많은 전투에서 얻은 경험 덕에 지금껏 살아왔지만, 언젠가 실수를 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럴 때 반천축정술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후우, 지친다.”
군림마황기는 팔 할, 구유마공은 칠 할 정도 복구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당장 전투를 벌이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내상도 거의 다 잡힌 상태였다.
지금 그의 피로는 몸이 아닌 정신의 피로였다.
“일어나셨습니까?”
“느헉!”
염병, 깜짝이야.
서량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고루마존이 있었다.
그가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묵례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나흘 전부터 있었지요.”
그러고 보니 고루마존의 옷은 상당히 남루했다. 그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좀 쉬시지 않고…….”
“소교주님께서 운공 중이신데 어찌 자리를 비우겠습니까.”
“얼레? 그러고 보니 동필이는 어디 갔대요?”
“마을에 내려갔습니다.”
“이 새끼 이거, 호위답게 대우해 달라고 무지하게 찡찡대더니만 어디 마존께 호위를 떠넘기고…….”
“허허, 그냥 제가 호법을 서겠다고 자처했습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에이, 그래도 어르신인데…….”
고루마존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르신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었다.
물론 칠십 먹은 늙은이는 어르신이라 불릴 최소한의 자격이 있다. 그러나 소교주가 할 말은 아니었다.
‘신교 사람이 아니었어서 그런 겐가.’
서량의 과거를 듣지 않았다면, 참으로 당황했을 것이다.
‘천하제일살수로 수십 년을 살아온 분이다. 어쩌면 이런 반응이 당연한 것이겠지.’
고루마존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 호위의 상태를 보아하니, 황보의 전장에서부터 큰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질이 불안정해질 정도로 대오(大悟)한 것 같더군요.”
“아, 얼핏 그래 보이긴 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마 호위의 성장은 소교주님의 안전과 직결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해서 나흘 동안 얻은 깨달음을 수습하라는 의미로 제가 호법을 서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마 호위는 앞으로 소교주님과 함께 큰일을 할 인재입니다. 고집만 센 골방 늙은이가 될 바에야 후학을 위해 물심양면 도울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지 않겠습니까?”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기분 나쁘실지 모르겠는데, 어째 정파 노고수들이 본받아야 할 언행 같습니다.”
“어찌 정파 놈들뿐이겠습니까? 후학을 양성하는 조직이라면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저를 본받아야 마땅하지요.”
“은근히 자기 자랑하시네요.”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본교에 저처럼 깨어 있는 마존은 없습니다.”
고루마존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서량도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이야.’
구대마존의 이름은 중원에서 두려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지금껏 서량이 만나 본 마존들은 오히려 명성만 좇는 십대고수들보다도 훨씬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조반은 먹었습니다.”
“조반이요? 벌써 정오가 지났는데요?”
“그래서 살살 배가 고파 오던 참이었지요.”
“같이 가서 드실까요? 냄새를 보니 앵화가 요리 좀 한 것 같은데.”
“그 전에, 몸은 괜찮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동작에 일말의 낭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고루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소교주님께서도 허기지실 텐데 어서 가시지요.”
그때였다.
“소교주님!”
“어, 왔냐.”
헐레벌떡 달려온 여상린이 서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내 몸을 훑어봐?”
“다 나으셨어요?”
“다는 아니고 대충? 이래저래 움직일 만해.”
“다행이네요.”
“어, 걱정 많이 했지? 고맙다. 그나저나 여긴 왜 왔냐?”
여상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흘 동안 운기를 하셨다길래요. 혹시 유리술의 부작용은 겪지 않으신 건가 궁금해서 왔어요.”
“유리술? 그건 또 뭐야? 유리잠력대법인가 하던 그거랑 비슷한 거냐?”
“아, 그건요…….”
꼬르륵.
기다렸다는 듯이 세 사람의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량이 투덜거렸다.
“급한 거 아니면 일단 먹고 하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겠어.”
배가 터지도록 식사를 마친 일행이 저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쉬었다.
씩씩대던 서량이 옆을 바라보았다. 여상린이 볼록해진 배를 만족스러운 듯 쓰다듬고 있었다.
“애 뱄냐.”
“실례예욧!”
“그나저나, 유리술의 부작용이란 말은 뭐냐?”
“아, 그건요.”
순간 여상린이 입을 다물고 다시금 서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량의 얼굴이 불편해졌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쓸어 보고 있어?”
“음……. 아니에요. 이건 나중에 얘기해요.”
“얘 봐라? 뜸만 잔뜩 들여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중에 언제?”
“저희 오라버니 오면요.”
“어?”
“오라버니가 궁을 출발한 지 제법 됐어요. 조만간 이쪽에 합류하신대요.”
서량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허, 그놈 오랜만에 보겠는걸?”
여강휘의 자신만만하면서도 선한 얼굴이 떠올랐다. 길지는 않았지만, 제법 사귀어 볼 만한 녀석이었던 건 분명했다.
고루마존이 물었다.
“소교주님.”
“예.”
“여기까지 오긴 왔습니다만, 앞으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앞으로요? 글쎄요. 생각해 둔 건 있지만, 일단 올 놈들이 오면 다시 한번 상의해 보도록 할까요?”
“예? 올 놈들이요?”
서량이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두 명의 사내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은 뒤따르는 마동필보다 훨씬 무뚝뚝해 보였다.
“그 양반 참, 지지고 볶고 다 끝나니까 이제야 찾아오네.”
바로 고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