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천마(天魔)의 발아래 영광 있으라 (3)
“허어, 이것 참.”
담사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종자가 더 남지 않았거늘.”
그간 화원을 화려하게 물들였던 색화(色花)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중 절반에 가까운 꽃들이 마교의 소교주 놈 때문에 시들었다. 이미 명을 다한 꽃에 미련은 없지만, 앞으로의 일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나저나 참으로 의아하군.”
담사영이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혈고를 어찌 해독했을꼬? 여태껏 혈고를 해독한 사람은 딱 한 놈밖에 없었거늘.”
결국 죽기는 했지만, 그 한 놈도 수십 년을 자신의 아래에서 혈고를 해독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놈이다.
애초에 혈고라는 독물은 해독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혈고를 떼어 내기 위해서는 살을 파서 내장에 들러붙은 벌레를 긁어내야 하는데, 그리하면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외에도 혈고를 떼어 놓는 법이 있기는 하다. 고금에 손에 꼽힐 만한 사술이학의 대가이거나, 진기(眞氣)를 신화(神化)의 경지에 이르도록 제련한다면 혈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신통방통한 놈이야. 아니면 마교에서 혈고에 관한 실험을 했었던가?”
담사영이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중원전도(中原全圖)를 내려다보며 뭔가를 고심하고 있는 공야치가 보였다.
“자네, 혹시 알고 있나?”
공야치가 고개를 들었다.
“예?”
“마교의 소교주 놈이 어찌 혈고의 해독법을 알고 있는가 말이네.”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수개월 동안 발맞춰 달려온 사이 아니던가? 놈에 대해 뭔가 아는 바가 있을 텐데.”
공야치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마교의 소교주에 대해 아는 것은 막상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맹주님께서도 알고 계신 것들이지요.”
“그런가?”
담사영은 공야치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해서, 얼추 그림은 나오는가?”
“예. 다만 걸리는 게 하나 있습니다.”
“걸리는 것이라?”
“마교주의 무력입니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그렇지.”
당대 천마신교의 교주는 베일에 싸여 있다. 다만 그의 이름이 이천상이라는 것과, 신교 역사상 아홉 번째로 천마(天魔)의 칭호를 받은 절대고수라는 것 정도가 알려졌을 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마교가 중원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활동했다면 마교주에 대한 정보가 상당 부분 흘러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교는 삼십 년이 넘도록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교주만이 아니라, 마교의 전력도 모호하다. 다만 그간의 역사와 삼십 년이라는 시간을 더해 대략적인 전력을 추측할 뿐이었다.
‘전성기 때의 힘 정도는 구축했겠지.’
공야치가 말을 이었다.
“만일 마교주의 무공이 절대무적(絶代無敵)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정보망을 구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마교주가 무슨 성격이든 간에, 자신의 무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이곳까지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담사영이 눈을 빛냈다.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마교주는 무려 삼십 년이 넘도록 십만대산에서 웅크리고 있었어. 절대무적의 무공을 갖고 있다 한들,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알 수 없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한 정보망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마교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인이 신(神)으로 떠받드는 존재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왕지사 세상에 발을 들였다면 추종자들을 위해서라도 화려한 행보를 보일 필요가 있지요.”
“음, 자네 말이 맞네.”
담사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 제아무리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라 한들 한 손으로 열을 감당할 수는 없다네. 독보천하(獨步天下)가 불가능한 이유지.”
“그렇습니다.”
“일단은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가정해 보세.”
강우창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무조건 연락을 보내와야 정상이었다. 연락이 없다는 뜻은, 그가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대단해. 아니면 그만큼 마교의 경계가 철통같다는 뜻일까?’
강우창이 은신을 하면 자신도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물론 직접 공격을 받아도 당할 리는 없겠지만.
“그러고 있습니다. 마교의 소교주를 키워 낸 괴물이니, 천하제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음.”
어쩔 수 없지만, 담사영은 약간의 불쾌함을 느꼈다.
‘마교주가 그리 강하단 말이지?’
정파든 사파든, 중원을 활보하는 무림인들은 마교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난 수백 년 동안 마교는 혈혈단신으로 중원과 싸웠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시작한 전쟁인가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중원 대륙과 단 한 조직이 싸운 것임에도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마교는 그렇게 강했다. 당연히 마교의 수장은 강함의 결정체라는 인식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담사영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단순히 정치력으로 맹주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아니었다. 깊은 심계와 비밀리에 키운 수하들을 제외하고서라도, 본신의 무력 또한 누구 못지않았다.
심중에 자리한 묘한 불쾌함이 질투임을 깨달은 담사영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게도 아직 무인의 호승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군. 이것 참.’
어차피 천하를 손에 넣으면 자신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도 얼마든지 뭉개 버릴 수 있다.
그에게는 무력만큼이나 세력이 중요했다. 천하를 쥐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은 바로 세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암투(暗鬪)가 중요했다. 이번 암투에서 승리하는 자야말로 천하패자(天下霸者)에 가장 가까워질 테니까.
“해서, 마교 측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던가?”
“아직 보고는 없습니다.”
담사영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엉덩이를 들지 않는다면 정사마의 싸움에서 마도를 제외해도 되겠군.”
“만약 움직인다면 어쩌시렵니까?”
“길게 생각할 것 없지. 천하가 마교주의 움직임을 주시할 것일세. 그 틈을 타서 골칫거리들을 몽땅 해결하고, 제대로 된 삼파전(三巴戰)을 시작해 볼 수밖에.”
말이 삼파전이지, 이미 철혈성과 손을 잡았으니 이대 일의 싸움이 될 것이다.
공야치는 생각했다.
‘무서운 사람이다.’
확실히 담사영의 머리는 비상했다. 철혈성과 동맹을 맺은 것 하나로, 어떤 선택지가 나와도 아군 측에 유리하도록 판세를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의외로 이런 부분은…… 소교주님과 몹시 흡사해.’
타고난 배포와 한번 선택한 것을 뒤도 안 돌아보고 밀어붙이는 추진력, 동시에 적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안목까지.
보면 볼수록 소교주님과 닮았다. 무공도, 나이도, 경험도, 걷는 길도 달랐지만 적어도 지략에 있어서 두 사람은 쌍둥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생각은 그만하고 회의장으로 나가 보세.”
“아, 그러시겠습니까?”
“마교주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면 여유는 충분하다네. 비록 나의 괴뢰(傀儡)가 되어 버린 늙은이들이지만, 다독여 줄 때는 다독여 줘야지.”
“아마 황보세가 건을 두고 후속 조치에 관해 물어 올 것입니다.”
“그러겠지.”
“실질적으로 황보세가를 공격한 쪽은 마교의 소교주가 아니라 비요왕 측입니다. 그것을 빌미로 맹주님을 압박해 보려 할 수도 있습니다.”
사파의 고수가 황보세가를 무너트렸는데, 정작 맹주란 작자는 사파 연합인 철혈성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분명 지탄받을 소지가 있는 일이었다.
담사영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통치자는 억압만 해서는 안 돼. 적당히 기어오를 줄 알도록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네. 그렇게 기어오르다가 몇 번 혼이 나다 보면, 나중에는 마음에서부터 굴복하게 되겠지.”
“…….”
“생각해보면 뼈아프기는 하군. 황보도 황보지만 현무와 광혼을 잃었으니…… 뭐, 손실은 제법 컸지만 철혈성을 얻었으니 그걸로 되었지 않은가.”
공야치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부분은 소교주님과 완전히 달라.’
담사영은 맹의 전력을 말 그대로 장기의 말로 본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명령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는데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서량은 달랐다.
적을 공략하기 위해 온갖 흉악한 수법을 다 동원하는 사람이지만, 내 사람만큼은 끔찍하게 챙겼다. 내 사람이 피해를 보면 모든 문제를 뒤로한 채, 대륙 끝까지 찾아가 기어이 복수를 할 사람이 바로 서량이었다.
사람들이 서량을 따르는 이유였다. 적어도 자신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니까.
담사영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이였다.
“그간 모아 두었던 문서들을 전부 챙기게. 천지각주가 없으니, 어째 자네가 내 오른팔이 된 것 같구먼.”
“영광입니다.”
“허허허.”
그때였다.
꾸륵!
공야치의 눈이 빛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오문에서 연락이 온 겐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곳 맹주부의 비밀 작전실은 맹주의 허가를 받은 자들만 들 수 있는 방이었다. 이런 곳으로 전서응과 전서구를 받도록 했다는 것 자체가 공야치를 향한 담사영의 믿음을 증명했다.
꾸르르륵!
퍼덕거리는 날갯소리와 함께 새파란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에 앉았다.
전서구의 발목에서 연통을 떼어 낸 공야치가 서신을 읽었다.
“헉!”
공야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담사영은 내심 의아했다.
‘저놈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홀로 당당하게 의천맹에 와서, 자신에게 제 쓰임을 증명한 놈이었다. 게다가 세상 온갖 정보들을 다루며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이 저 공야치란 놈 아니던가.
“무슨 일인가? 마교가 움직였다던가?”
공야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교주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흠,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한데, 아직 십만대산에서 큰 움직임이 없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마교의 병력 대부분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교주가 대략 칠백의 병력만 대동하고 북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칠백? 마교주씩이나 되는 자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마교주가 확실한가?”
“마교주가 탄 가마를 마황거(魔皇車)라고 합니다. 정보원들이 본 가마는 분명 마황거입니다!”
“혹, 교주가 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잖은가?”
공야치가 고개를 저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소교주라도 마황거에 탈 수 없습니다. 마황거는 오직 교주만이 탈 수 있는, 말하자면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흐음.”
담사영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별다른 연락도 없이 일단 밖으로 기어 나왔단 말이지? 사람 참, 급하기도 하구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기는. 중원 공기를 오랜만에 맡았을 터인데, 세상 구경을 어떻게 하는지나 지켜봐 주자고.”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나가려던 담사영이 주춤했다.
“……흐음.”
“왜 그러시는지요?”
“교주가 그렇게 강하다고?”
공야치의 눈이 번뜩였다.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마교주가 절대무적의 무공을 갖고 있다면 그의 성격을 잴 필요가 없다고 했었지?”
“……?”
“어디 보자고. 교주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말이야.”
“자칫…… 쓸데없는 희생이 될 수 있습니다.”
“희생에 쓸데없음이 어디 있는가? 적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장기 말들은 그 쓸모를 다한 것이거늘.”
“……!”
담사영이 다시 몸을 돌렸다.
“송 성주에게 지급(至急)으로 연락하게. 서로 칼 한 자루씩 뽑아서 보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