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천마(天魔)의 발아래 영광 있으라 (5)
“몰살?”
“그렇습니다.”
담사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 묻겠네. 대파(大破)된 것을 넘어서 모조리 몰살을 당했다는 겐가?”
“도정경 장로와 삼환귀검, 그리고 맹에서 보낸 일백의 고수와 철혈성에서 보낸 이백 병력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합니다.”
“허허.”
담사영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대의 무력과 의도를 추측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었다. 작정하고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를 보낸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철혈성에서 보낸 병력도 만만치 않았다.
한데 그 모든 병력이 몽땅 증발했단다.
“적의 피해는?”
“그것이…….”
공야치의 얼굴에 솔직한 당혹감이 어렸다. 담사영은 공야치의 이런 표정을 처음 보았다.
“전무(全無)하답니다.”
“뭐라? 전무?”
“예.”
“마교주와 함께한 병력에 아무런 손실이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제야 담사영의 얼굴에도 심각한 기색이 어렸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마교 최강이라는 천마군이 나섰다 한들 피해가 전혀 없지는 않을 텐데?”
익힌 무공의 경지가 깊어질수록, 한 수의 차이는 극과 극으로 벌어진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차이일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실수로도 판이 뒤집히는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 대 집단의 싸움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교주와 함께한 병력이 천마군이라 한들, 맹성에서 보낸 고수들도 만만치는 않다. 목숨을 걸고 붙었다면 조금의 피해라도 보아야 정상이었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 버렸다는 것인가? 도주할 틈도 없을 만큼?”
그렇다. 그리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 화기(火器)의 흔적은 없었던가?”
“없었습니다.”
“아니면 암기나 독은?”
“그 또한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더더욱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설마 마교주와 함께한 병력이 전설상의 강시라도 되는 겐가?”
“그 역시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강시는 존재 자체가 전설이요, 신화에 가깝다. 호사가들은 언젠가 사람의 육신에서 혼을 빼낸 도검불침의 괴물, 즉 강시라는 존재가 세상에 나타날 거라고 항상 말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사술로 사람을 현혹할 수는 있어도, 혼이 빠져 버린 몸을 어찌 움직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황당한 생각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보고였다.
“한데 이상한 소문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당연히 강시는 아닐 것입니다. 신교, 아니 마교가 아무리 대단한 사술이학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공야치의 얼굴에 약간의 망설임이 깃들었다.
누구도 쉽게 잡아채지 못할 미묘한 변화. 그러나 담사영은 공야치의 감정을 번개처럼 읽어 냈다.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담사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도저히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니기에 조금은 섬뜩한 미소였다.
“강을 건넌 것이 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마교주가 탄 마황거가 허공을 날았고, 그를 따르는 병력은 스스로 강물로 걸어 들어갔다가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미소를 단번에 없애 버리는 말이었다.
“자네 말은, 그들이 맨몸으로 강을 건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해서 그들의 북상 속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중원을 수직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산이고 강이고 앞을 막는 어떠한 지형지물도 피하지 않고 건너 버린다고 합니다.”
담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공야치가 머뭇거린 이유를 알겠다. 그들 모두가 걸어서 강을 건넜다는 말은, 삼백이 넘는 고수를 몰살시켜 버렸다는 정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실일 확률은?”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공야치의 성격상 이런 허황된 말을 그냥 했을 리는 없다. 나름의 진실성이 있는 정보이리라.
“허허, 신선이나 강시가 아니고서야…….”
순간 담사영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군. 그렇게 만들면 되겠구먼.”
“예?”
“현재 하오문이 발동할 수 있는 정보원이 얼마나 되는가? 중원 전역으로 정보를 퍼트릴까 하는데.”
조금 의아했지만 공야치는 즉각 대답했다.
“오 할 정도는 됩니다만.”
“마교주가 강시 부대를 이끌고 북상 중이라 알리게.”
공야치의 눈이 흔들렸다.
“강시 부대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정보원들을 확실하게 통제해야 할 걸세. 하오문에서 나온 정보가 되어서는 안 돼. 당연히 의천맹에서 나온 정보가 되어서도 안 되네.”
담사영의 눈에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군.”
* * *
이천상은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이라고.
이십여 년 전, 극치에 이른 마를 씻어 내며 육신을 탈피해도 혼(魂)의 의식을 잃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경지에 오른 이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아니, 생명 활동의 핵심인 수면조차도 거의 취해 본 적이 없었다.
무려 이십 년 만의 꿈.
꿈을 꾸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지만 무엇을 보여 주는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모호한 꿈이었다.
‘생각보다 빨라.’
중원에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참으로 얄궂지 않은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움직이면 저 빌어먹을 하늘은 항상 샛길을 만들어 자신을 인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천하(天下)를 손에 넣고자 신교의 대외 활동을 금한 지 어언 삼십 년.
그의 예상대로 정파는 분열되었고 사파는 집결했다. 협의로 똘똘 뭉쳐야 정상인 정파와, 배신과 불신으로 얼룩져 분산되어야 할 사파는 저마다 본성을 잊고 약해졌다.
매혹적인 성찬이었다.
사파는 가볍게 즈려밟고, 정파는 하나하나 잡아 죽여 씨를 말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십 년 전, 신(神)의 경지에 오르기 전의 그였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새로운 경지, 빛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천상은 그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얄밉군.’
속세를 향한 그의 욕망은 화산처럼 뜨거웠다. 초대천마 이후 최초로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뤄 신교를 무림의 태양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교주로서, 마인으로서 품을 수밖에 없는 욕망이었다. 지옥보다도 더 지옥 같은 투쟁에서 살아남은 그가 이뤄야 할 꿈이요, 천명(天命)이었다.
정작 하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천상의 일보(一步)가 중원 천하에 얼마나 거대한 폭풍을 일으킬지 알고 있었기에.
그의 욕망이 중원을 넘어, 새외는 물론 바다 너머의 섬까지도 이를 수 있을 거란 것을 알았기에.
그 과정에서 세상이 지옥이 될 것을 알았기에 하늘은 그를 제지했고, 유혹했다.
그리고 그는, 마(魔)의 극치를 이루었지만 명백한 사람이었기에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늘에 이르고 나서도 당장은 알지 못했다. 그저 한없이 깊어지고 싶었고, 한없이 높아지고 싶었으며 실제로 그리되도록 노력했다.
신화(神化)이자 신화(神話)의 세계.
십 년이 넘도록 신의 길을 걷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올라서는 안 될 곳에 올라 와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영혼의 탈각(脫却), 불가(佛家)의 열반(涅槃)에 가까운 경지에 들어섰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땡중들이 이걸 안다면 충격깨나 받겠지.’
너무나도 거대한 욕망이 외려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을, 땡중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또한, 열반에 이르렀다면 자신처럼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려는 걸 막으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참으로 힘든 길이었군.’
세상의 진리를 한눈에 꿰뚫고 섭리를 농락할 힘.
정작 그 힘을 손에 넣고 나자 속세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오히려 어서 빨리 하늘에 이르러 찬란한 빛이 되고 싶었다.
그러한 유혹과 강제를 버틴 지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이제는 무리라고, 후계자를 세워 마도의 꿈을 맡기고 하늘에 오르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바로 그때, 새로운 제자를 만났다.
자신의 제자이면서도 제자가 아닌, 그러나 하늘에 이르렀음에도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게 만들어 준 한 존재를 만난 것이다.
그는 녀석을 보며 놀랐고, 실망하기도 했으며, 때론 감탄했고 나아가 감동했다.
그리고 흐려져 버린 인성(人性)이 재차 또렷해지는 순간,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육신의 탈피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셨습니까?”
이천상이 눈을 떴다.
어느새 황량한 절벽 앞에 제자 놈이 서 있었다.
“어쩐지 사람 같지 않더라니까요.”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중원행은 어떠했느냐?”
“다 보셨잖습니까?”
“다 봤지.”
“그럼 아시겠네요. 아주 그냥 화려했지요.”
서량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이천상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놀라진 않았느냐?”
“뭘요?”
“네 녀석의 무의식에 내가 나타난 것 말이다.”
“당연히 놀랐습니다. 세상 참, 그런 것도 가능하실지는 몰랐거든요. 하기야 내공으로 신병(神兵)까지 만드는 분이시니, 뭐.”
“한결 가벼워 보인다.”
“살이 좀 빠졌거든요.”
“한(恨)을 다 해소한 듯하여 하는 말이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보시는 대로.”
이천상의 표정이 인자해졌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입꼬리가 올라갔으며, 두 눈은 마신(魔神)이라 불리는 자답지 않게 선해 보였다.
잠시 후.
“하고자 하는 일을 해라.”
“교주님도요.”
“섭섭하군.”
“예? 뭐가 말입니까?”
이천상이 서량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너는 한 번도 내 앞에서 날 사부라 부른 적이 없었지. 너에게 난 언제나 교주였을 따름이다.”
“안 뵌 새에 많이 징그러워지셨습니다. 왜 애처럼 찡찡대십니까?”
“언사가 불경하다.”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다 사부한테 배운 겁니다.”
“내가 언제 그런…….”
순간 이천상의 눈이 커졌다.
미소 짓던 서량의 몸이 점차 흐릿해졌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이만 갑니다.”
번쩍!
이천상이 눈을 떴다.
‘……간지러운 꿈이었군.’
동시에 십 리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느껴졌다.
긴장, 분노, 공포, 살기 등 온갖 부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무리였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구대마존에 필적할 만한 고수가 끼어 있었다. 그 뒤를 일천 정도 되는 무인들이 따르고 있었지만, 별 볼 일 없는 잡놈들일 뿐이었다. 진기의 흐름이 제각기인 것으로 보아 중소 문파의 전력이 모인 것 같았다.
일천에 달하는 무림인들.
끝이 어딘지 모를 만큼 드넓은 천하에서 무림인 일천 명이라면 얼마 되지도 않는 숫자였다. 사람의 몸에 손가락 하나 정도의 부피라도 차지하려나.
그러나 오랜만이었다. 저만한 병력이 자신의 앞을 막은 것은.
드르르륵.
마황거의 휘장이 좌우로 열렸다.
후우우웅!
저 멀리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한 고수가 있었다.
‘화기(火氣).’
잠시 후, 한 여인이 천마군 전방 이십 장 앞에서 멈추었다.
이천상은 여인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다가가고 싶지만,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반선(半仙)을 보며 사고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누구지.’
의문이 드는 순간, 답이 들려왔다.
“축융인가.”
축융무후(祝融武后).
살왕 천하진이 죽고 난 후, 새로이 십대고수의 위(位)에 오른 여고수가 바로 그녀였다.
축융무후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 마교주?!”
“…….”
“당신은 대체…….”
“안다.”
꽤 떨어진 거리였지만, 이천상의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네 마음을 안다.”
“뭐, 뭐라고?”
“그러나 불순한 마음을 갖고 내 앞에 선 이상, 그냥 돌려보내 주진 않는다.”
이천상이 한옆으로 손을 뻗었다.
스르릉.
검신(劍身)에 황금빛 용문(龍紋)이 새겨진 휘황찬란한 보검이 그의 손에 잡혔다.
‘실로 오랜만에 잡아 보는 검이로군.’
물끄러미 검신을 내려다보던 이천상이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렀다.
말 그대로 휘둘렀을 뿐이었다. 허공에 대고 가볍게 내리그은 일검(一劍)에선 진기의 파동도, 공기의 흐름도, 심지어 살의나 살기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축융무후는 흠칫했다.
뭐지? 무슨 짓을 한 거지?
스르릉.
마황보검(魔皇寶劍)을 다시 집어넣은 이천상이 권태로운 눈으로 축융무후를 굽어보았다.
“내 육신이 지상에 묶여 있는 한, 나는 끝까지 마귀(魔鬼)로 남을 것이다.”
스르르륵.
“아?!”
이마에서 시작된 붉은 선이 턱과 코를 타고 내려와 그대로 국부까지 도달했다.
얼떨떨해진 축융무후가 멍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푸화아악!
축융무후의 몸이 세로로 갈라졌다.
퍼어어엉! 화르르르륵!
갈라진 그녀의 시체가 폭발을 일으키더니 이내 시커먼 화염에 휩싸였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일순 휙 사라지자, 어느새 그 자리엔 반으로 갈라진 해골만이 남았다.
이천상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의 표정은 공포 그 자체였다.
“치워라.”
천마군의 마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군림성교(君臨聖敎)! 천마불사(天魔不死)!”
강시 부대를 이끌고 북상 중이라는 마교주를 저지하기 위해 오로지 협심을 무기 삼아 모인 일천의 무림인들.
그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