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천마(天魔)의 발아래 영광 있으라 (8)
“음.”
찻잔을 들어 올리던 적송이 손을 멈추었다.
“왜 그러시는가?”
“자네는 느껴지지 않나?”
“무엇이?”
“아직 회복이 덜 되긴 했나 보군.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는 흉흉한 기를 느끼지…….”
“천마기(天魔氣) 말이로군.”
천마기.
단순한 마기가 아닌 천마가 발하는 기다. 현천진인의 표현은 그처럼 간결하면서도 묘하게 고풍스러운 데가 있었다.
적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는가?”
“놀랄 것은 또 무엇인가.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네.”
“그랬구먼. 왜 말하지 않았나?”
“말해서 달라질 것은 또 무엇인가? 그의 힘이 세상을 도탄에 빠트릴 정도로 크다 하여, 그의 행보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네.”
“허!”
“물론 악의(惡意)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완전무결에 가까운 선천(先天)을 이룬 자에게 악의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적송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무쌍신이라 불리며 정파 무림의 태양으로 일컬어진 두 사람이다. 실제로 둘의 무공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익히고 있는 무공이 상이하고 성향도 다르다 보니, 무공 외적인 부분의 능력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확실히 도문의 선안(仙眼)은 대단하이.”
“이제 와서 질투인가?”
“자네나 나나 거의 한 세기를 살았네. 풍상에 깎여 돌가루만 튀고 있는 늙은이에게 질투라니.”
“허허, 자네 말이 맞네. 솔직히, 이 능력 아닌 능력이 한스럽게 느껴질 때도 많아.”
“자네도 신선을 죽여 보게나.”
“어디 도(道)를 이룬 신선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자네들이 믿고 따르는 세존(世尊)과는 다르다네.”
적송은 무공을 배운 이래로 누군가에게 살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살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불제자로서 살기를 드러내야 할 대상은 악(惡)이나 마(魔)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들에게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죽여야 할 대상은 부처다.
내가 부처고 세상이 부처임을 마음 깊이 깨달았을 때, 그들이 모시는 석가(釋迦)의 진리에서도 탈피했을 때야말로 진정한 깨달음,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래서 궁극의 경지를 이루어도 사람에 가깝다. 대자연의 이치를 궁구하기보단 사람으로서의 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사들은 달랐다.
많은 사람이 도사가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길이 신선지도(神仙之道)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이른 도사를 등선(登仙)했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상을 알고 보면 각자가 추구하는 도(道)의 맥(脈)마다 다르다. 다만 그들 대부분이 자연에 녹아들어 있기에 세상의 이치에 한결 밝은 공부를 한다.
그래서 궁극에 가까워질수록 육통지법(六通之法)을 승려보다 훨씬 자연스레 구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영역에 도달하는 이들은 백 년에 하나 나기도 힘들었다.
“그나저나…….”
현천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놀랍구먼. 궁극의 영역에 올라 신이(神異)한 능력을 발하는 자가 나기도 힘든 세상에, 이미 육신에 거할 이유가 없는 깨달음이라니. 살아 움직이는 신선이나 다름이 없어.”
적송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그 정도란 말인가?”
“자네도 느꼈다면서?”
“온전히 볼 수는 없었네. 아직 완전(完全)하지 않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
“자네 말마따나 한없이 완전에 가까울 뿐 아직 완전하지는 않네. 진정 완전해져 빛으로 나아가려면 육신을 탈피해야 하는데, 멀쩡히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은?”
“사람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뜻이지. 아직은.”
“허!”
적송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니, 만류귀종(萬流歸宗)이니 떠들어 대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이룬 자를 보게 되다니……. 내 세대에 마(魔)로서 하늘에 도달한 이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네.”
“그러니 천마(天魔)라 불리는 것 아니겠는가.”
“그저 그들의 마공을 올바르게 익힌 교주에게 붙는 칭호일 뿐이네. 괜히 이천상 그 녀석이 구대(九代)이겠는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네. 그저 그만한 자격이 되는 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적송의 얼굴이 흐려졌다.
현천이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는가?”
“조금, 서글퍼서 그러네.”
“무엇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 삼십 년 전의 그 날이. 이천상 그놈을 처음 봤던 때가 떠오르는군.”
적송이 한숨을 쉬었다.
“당시의 녀석은 마치 사냥감 많은 태산에 오른 호랑이와 같았네. 그러면서도 무리에서 나온 고독한 늑대처럼 보이기도 했지. 상상을 초월하는 욕망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동시에 관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네.”
“관성적이라?”
“마치…… 누군가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된 것처럼 말이네.”
적송이 한숨을 쉬었다.
시린 겨울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러다 방법을 찾은 건지, 포기한 건지 신교로 돌아가 대외 활동을 금지해 버렸다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온 지금, 녀석은 신선의 경지에 올라 버리지 않았나?”
“허어.”
“세상이 그런 게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절치부심하지만, 세월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 이천상 그놈도 참으로 불쌍하지 않은가.”
현천은 생각했다. 참으로 인간적인 해석이라고.
이미 이승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다 얻은 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선택받은 이들의 세계인바, 그런 이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시에 현천은 생각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적송에겐 없지만, 적송에게 있는 것이 제게도 없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 자비(慈悲)였다.
너무나도 사람 같아서 열반에 들진 못할 것 같은, 그럼에도 너무나도 불제자다운 적송을 보며 현천은 맑은 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참 위험한 사람일세.”
“음? 내가 위험하다니?”
“교주가 안타깝다니 그 얼마나 위험한 말인가. 만일 그가 지금처럼 반선(半仙)이 되지 않았다면 천하가 몽땅 불탔을 것이네. 저러한 경지에 올랐으니 되레 다행이라 해야지.”
“허허, 말이 그렇게 되나?”
적송이 고개를 저었다.
“결국 세상은 무적의 마신(魔神)을 거두어 가고, 독을 품은 이무기와 시커먼 사자를 내놓은 셈이로구먼. 어느 쪽이든 천하가 신음하긴 매한가지였다는 것인가.”
“세상은…… 항상 그래 왔지. 그래서 우리가 움직여야 하고.”
“자네 말이 맞네.”
허허롭게 웃으며 차를 마시는 두 절대자.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이 있는 눈 덮인 야산의 정상으로 나한당주 정각이 달려왔다.
“태사백님!”
“나한당주 오셨는가.”
제아무리 친우라도 남은 남인지라 직책으로는 불러 주는 것 같았다.
정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어떤?”
“철혈성주가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가 저희 반정회라고 합니다.”
“……!”
적송이 현천을 보며 물었다.
“자네 눈에 보이진 않던가?”
“말했잖은가? 한 번씩 이 능력이 원망스럽다고. 보고 싶다고 보이고, 듣고 싶다고 들리는 능력이 아닐세. 교주나 소교주나, 도가의 청정기와 대척점에 있으니 보다 자주 보이는 것일 뿐.”
“송 성주 역시 사공(邪功)을 익히지 않았나?”
“사공은 익혔지만, 그것이 그의 진짜 무공은 아닐세. 말하자면 사공은 잡학(雜學)에 가깝네. 근본적으로 극치에 이를 수 있는 공부가 아니야.”
“……그렇구먼.”
적송이 정각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 이들을 선봉 삼아 온다던가?”
“그것이…….”
“음?”
“파악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분명 철혈성의 병력은 맞는데, 어떤 이들인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나온 적이 없는 이들인 것 같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허, 이젠 힘을 숨기지 않고 세상에 나서 보겠다는 뜻인가.”
현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하가 크나큰 환란을 겪을 것을 걱정했더니만, 불똥은 우리한테도 떨어진 모양일세.”
“그런 것 같네.”
“지난 세월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 우리도 움직여 보세.”
“그러세나.”
적송의 동공이 은은한 금광을 뿜었다.
“후배들을 잘못 가르쳤으니, 은퇴 전에 바로잡아 주고 가야겠지.”
* * *
“저기로군.”
크르릉.
서량이 호왕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서 붉은 마기가 번뜩이자, 거칠어진 호왕의 호흡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했다.
호왕을 야수궁주의 술법에서 자유로이 만들어 줄 때 구유마공의 힘으로 상단전으로 장악했었다. 놀랍게도 상단전에 머문 구유마기는 이후 전신으로 퍼져, 호왕의 피와 살이 되었다.
구유마공 앞에 회복이 급속도로 빨라지는 이유였다.
“동필아.”
“예, 소교주님.”
“보이냐?”
“보이진 않습니다만…… 느껴집니다.”
쉼 없이 달려왔기 때문인지 서량과 마동필의 행색은 무척이나 피폐해 보였다. 하지만 마동필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단순히 강행군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소교주님. 이것은……?”
“그래.”
마동필은 할 말을 잃었다. 저 수많은 건물 뒤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진기(眞氣)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느낀 것이다.
“안 됩니다, 소교주님.”
그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줄 상상도 못 했다.
“무리입니다. 정면 승부로는 절대로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극마에 오르지 못한 경지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풍겨 나오는 진기의 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위압감이 넘친다거나, 살기가 지독하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파 무공 특유의 신기(神氣)가 무지막지하게 집약되어 있었다.
초고순도의 진기.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 너무나도 맑고 깊은 진기라 오히려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인기척이 없군.”
“예?”
“저 건물들 말이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저 일대의 사람들을 모조리 쫓아내 버린 모양이다.”
“아!”
인기척이 느껴질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마동필은 새삼 서량의 경지에 감탄했고, 그만한 거리조차 무시할 만큼 농도 짙은 진기를 뿜어내는 상대에게 부담을 느꼈다.
“정면 승부가 안 된다면, 암습을 하든 각개전투로 판을 뒤흔들든 해 봐야지.”
“소교주님. 안 됩니다.”
“해야 돼. 교주님이 오시잖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목숨은 제가 걸 테니, 소교주님께서는 교주님을 알현할 준비를 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손 놓고 놀기로 했는데, 이번에도 약속은 못 지키겠다.”
“소교주님.”
“내가 안 되면 너도 안 돼. 목숨을 걸 거라면 차라리 나와 함께 걸어. 그게 낫다.”
마동필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괜찮아. 이길 수는 없어도 시간 끌기 정도는 가능하니까.”
“예?”
“내가 원체 싸가지가 없잖냐. 교주님께만 맛난 음식을 드릴 순 없지. 우리도 맛 좀 보자고.”
서량이 금호를 바라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금호 역시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청색 눈동자는 한없이 깊고 맑았다.
“이번에는 네 도움 좀 받아야겠다. 좀 무리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
「크릉!」
“가끔 생각하는 건데, 넌 개처럼 짖기도 하고 호랑이처럼 으르렁대기도 하더라.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거 아냐?”
「캬아앗!」
“귀 아파, 이놈아!”
서량이 호왕의 목덜미를 때렸다.
“준비됐으면 가자!”
크허헝!
우렁찬 포효와 함께 두 영물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사지(死地)로 향하는 이인이수, 어느새 도검과 발톱을 뽑아 들고 돌진하는 그들 뒤에는 천하를 뒤덮고도 남는 마(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