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천마(天魔)의 발아래 영광 있으라 (9)
“오는군.”
공동파의 전대 장문인, 복마검선(伏魔劍仙) 광암자(廣巖子)가 눈을 떴다.
“굉장한 마기로다. 과연, 이 정도 무력이라면 천년마교의 주인으로서 부족함이 없으렷다.”
광암자 옆으로 금죽사태(金竹師太)가 다가왔다. 그녀 역시 광암자처럼 올해 칠십이 넘은 노고수로, 아미파의 전대 대장로이기도 했다.
“느껴지시는지요?”
“그렇소이다.”
“대단하십니다. 저는 공부가 낮아 아직 느껴지지 않는군요.”
광암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사태의 무공이 나보다 모자라서가 아니외다. 그저 내가 이 진법의 축(軸)이기 때문에, 사방 천지에서 다가오는 기(氣)를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오.”
“진법의 축이라…….”
금죽사태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진법의 축은 제가 맡겠습니다.”
“괜찮소이다.”
“노사.”
“소림의 전대 방장을 제외하면, 이 진법에 가장 정통한 사람은 나 아니겠소.”
금죽사태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뭐라 입을 열려 할 때 한옆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맡기십시다.”
금죽사태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자루 검을 안고 있는 냉엄한 표정의 노도사가 서 있었다. 푸근한 인상의 광암자와 금죽사태와는 달리, 노도사는 곁에 다가가기가 꺼려질 정도로 냉정해 보였다.
바로 청성파의 전대 대장로, 영산진인(影山眞人)이었다.
“이왕 이 일을 맡은 것, 확실한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이 옳소. 광암 노사라면 우리 중 누구보다도 나을 것이오.”
광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산 노사의 말씀이 옳소.”
“하, 하지만…….”
영산진인이 차갑게 말했다.
“광암 노사가 생명이 다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것이오. 혹 광암 노사께서 등선하신 후에도 내가 살아 있다면, 나 스스로 목을 벨 것이오.”
“…….”
“살아 있을 이유, 더는 없소이다.”
금죽사태가 눈을 감았다.
영산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교주가 왔다면 슬슬 준비를 해야겠지. 우리도 움직입시다.”
“……그래요.”
금죽사태는 이 상황이 너무도 답답했다.
그들 셋은 의천맹주와 연수한 사질들의 음모로 수년 동안 무공을 상실했었다. 혈고(血蠱)와 온갖 약물로 죽느니만 못한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그들은 무공을 되찾았다. 심맥에 자리 잡은 벌레는 그대로였지만, 어떻게 된 건지 무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담사영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들도 많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의천맹주는 사악한 자다.
그러나 마교는 집단 자체가 사악하다. 그들은 언제나 무림의 적이었으며, 훗날 또다시 중원을 침공하여 숱한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몸이다. 담사영과 사질들을 혼내 주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왕 간다면 천마(天魔)를 잡고 가는 것이 세상에 이롭겠지.’
금죽사태의 얼굴은 무척이나 허망해 보였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광암자나 영산진인이나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사질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고 나서는 정파 무림의 적과 함께 산화하라고 등까지 떠밀렸다.
이 참담한 심정은, 겪어 보지 않은 자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한데 이상하군.”
금죽사태와 영산진인이 광암자를 바라보았다.
광암자의 눈이 깊어졌다.
“마교주가 분명한 것 같은데, 나머지 병력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모르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강한 마인 하나와, 마인은 아닌데 놀랍도록 강하고 흉포한 고수 둘이 함께하고 있소. 결국 넷밖에 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영산진인이 되물었다.
“마교주가 확실하오?”
광암자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 정도 마기를 발산하는 자가 마교주 외에 또 있겠소?”
“담사영 그놈 말로는 마교주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하였소. 그 자존심 강한 놈이 그리 말했다면, 제 놈보다 몇 수는 위란 소리 아니겠소?”
“몇 수라…….”
광암자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려 왔다.
“그렇다면 마교주가 아니란 말인가?”
“아니오?”
“지금 다가오는 자의 마기는…… 원체 무학이 달라서 잘은 모르겠소만, 담사영에 비해 큰 부족함이 없는 것 같소.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한 수 아래 같기도 하고……. 확실히는 모르겠소.”
담사영에 비해 큰 부족함이 없다?
“대호법이나 원로원주 정도 되는 위인인가?”
광암자의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
일각이 지나, 이백여 장 떨어진 거리에서 이인이수가 나타났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이들은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력의 기파가 차디찬 겨울 공기를 뜨겁게 달구어 놓고 있었다.
광암자의 눈이 커졌다.
“청년?!”
금죽사태는 말할 것도 없고, 표정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영산진인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년이라고?”
“그렇소!”
“설마 반로환동?”
“그건…… 나도 모르겠소.”
절대의 경지에 올라도 반로환동, 환골탈태를 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누구나 그것이 가능했다면 담사영은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였을 것이다.
설령 반로환동을 했다 해도, 산더미처럼 큰 호랑이 위에 올라탄 저 마인은 청년이 아닌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천재면 이십 대로 반로환동을 한단 말인가?
얼마나 놀랐는지, 초절정고수에 준하는 기파를 뿜어내는 두 짐승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서량만이 보일 뿐이었다.
광암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수십 장 거리로 넓게 퍼져 있던 전대의 노고수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쿵!
호왕의 걸음이 멈추었다.
크르르릉.
영롱한 홍옥(紅玉) 같았던 호왕의 두 눈이 피처럼 진득해졌다.
대가리를 낮추고 일백사십사 명의 노고수들을 둘러보는 호왕의 모습에서 강한 긴장이 느껴졌다. 팽가의 패왕대를 만났을 때도, 아니 서량과 처음 마주했을 때도 보여 준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금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우우우웅.
금호의 몸에서 황금빛 서기가 흘러나왔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목과 꼬리의 털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깊고 맑은 청색의 호안(狐眼)이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두 영수를 돌아보며 다독였을 서량조차도.
이제야 무림 정상급 무력을 손에 쥐었다고 자부해도 좋을 서량조차도 일제히 일어난 고수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화르르륵! 파지지직!
구유마공과 군림마황기가 저절로 달아올랐다. 좌청우홍의 마안이 명멸을 반복하며 내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다.
‘저게 뭐지?’
멀리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저들이 펼치고 있는 진법의 힘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그래서 잔뜩 긴장하고 접근했다.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지만, 그간 치러 온 일대다의 전투처럼 각개 격파와 암습을 사용하면 최소한 힘을 빼 놓을 수는 있을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쿠르르르릉.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대지가 뒤흔들리고, 안 그래도 어두운 하늘이 완전한 암흑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위압감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저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 환상을 만드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하다.’
화경에 이른 고수 하나, 나머지는 모두 전대의 고수들로서 팔십 명이 넘는 초절정고수가 운집해 있었다. 남은 육십여 명의 고수들도 하나같이 그에 육박하는 실력자들이었다.
진법을 펼치지 않아도, 그들 모두가 쏟아 내는 기파만으로도 운신에 제약이 걸릴 것이다. 한데 이 기이한 진법은, 저들의 기세를 두세 배 이상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꾸욱.
호왕의 목덜미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세상에 이런 진법도 있었나? 한데 이 진법…… 어쩐지 낯설지 않아.’
각기 다른 선기(仙氣)가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거대한 신기(神氣)를 이루고 있었다.
‘구파!’
저것은 구파의 절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진법이 분명했다. 구파의 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저 진법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서량은 왼쪽 손을 들어 보였다.
화르르륵!!
눈에 보일 듯, 말 듯 반투명하게 타오르는 붉은 불꽃은 구유의 겁화였다.
근래 들어 군림마황기의 힘이 구유마공보다도 한 걸음 앞서 나가고 있었다. 한데 저 진법을 대하자, 군림마황기는 주춤하고 구유마공의 출력이 저절로 상승하고 있었다.
‘암영기?!’
그렇다.
구유마공의 기반이 된 암영기가 저 절대의 진법 앞에서 무섭게 들끓고 있었다.
구파의 내공심법을 핵(核)으로 삼는 진법.
구파 무학의 적통(嫡統)들만이 참여할 수 있고, 구파의 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신기(神技)의 진법.
경악으로 물들었던 서량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것 참.”
난생처음 보는 진법이며, 그 진법의 힘에 경악했거늘.
파훼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응할 만한 내공심법을 자신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마공이니만큼 타격은 극심하겠지만.’
태산처럼 커다란 괴물의 힘은 여전하다.
하지만 괴물이 지닌 힘의 본질을 깨닫자, 자신에게도 보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교주님.”
마동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 아니었다. 이리 멀리 떨어졌는데도 공기 중에 스며든 신기가 그의 마공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서량은 확신했다. 마동필이 저 안으로 들어가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은 마존급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더 오래 버틸 수 있는가의 차이일 뿐, 마인이라면 저 진법을 이길 수가 없다.
“물러나셔야 합니다.”
“아니, 괜찮아.”
“소, 소교주님!”
만장 절벽 위에서, 그것도 아래에 용암이 들끓고 있는 곳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마동필이 느끼기에는 그러했다.
화르르르륵!
어느새 서량의 몸에서 군림마황기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새 그의 몸은 구유마공의 겁화로 가득 싸여, 마치 화염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번쩍!
호왕의 눈이 틈 하나 보이지 않고 전부 붉게 물들었다.
콰앙!
앞발로 거세게 땅을 밟은 호왕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커허어어엉!!
산천초목을 떨게 만드는 산군(山君)의 사자후였다. 그 무지막지한 사자후에는 놀랍게도 구유마기가 실려 있었다.
놀라서 호왕을 보던 마동필은, 문득 요동치던 자신의 마기가 잠잠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극에 이른 구유마기, 그 마력의 역장 안에 들어선 마동필은 서량에게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서량은 마동필을 보며 확신했다. 이길 수도, 죽일 수도 없지만 대응은 가능하다고. 놈들의 힘을 빼 놓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비록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목숨 참 여러 번 거는구먼. 살수 때도, 지금도.’
치이이익!
천마도에도 불꽃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주위의 차가운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눈물 같은 아지랑이를 뿜어냈다.
“하긴, 목숨 거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소교주님!”
“너도 참전해야 해.”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소교주님께서는…….”
“내가 신호하면 주저 없이 전선으로 뛰어들어라. 알겠냐?”
서량의 모습은 가히 화신(火神)이라 불릴 만했다.
전신이 폭발 직전의 화약이라도 된 것처럼 위험해 보이는 외양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입 주변에 불꽃이 새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불을 뿜는 괴수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소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지켜야 할 대상이 죽는 게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마동필은 그 이상으로 서량을 믿었다. 소교주님께서는 분명 믿는 바가 있으신 게다.
서량은 그 확고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승산은 없지만, 생존 가능성은 충분하니까.”
지이이잉! 지이이잉!
왼손으로는 호왕의 털을 쥐고, 오른손으로 천마도를 쥔 서량.
피처럼 붉은 화염에 휩싸인 기호무사(騎虎武士)가 마침내 돌진을 시작했다.
부아아아앙!
불꽃이 이글거리는 폭풍이 한 자루 창날이 되어 죽음을 향해 쏘아졌다.
* * *
휘장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나절 안에.”
모두가 마황거를 올려다보았다.
“의창에 도달토록 한다.”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