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천마강림(天魔降臨) (1)
광암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찰극천멸마금진의 비급을 처음 보았던 그때를.
- 이런 진법이……!
- 놀랍지 않으냐?
- 이게 사실입니까? 이 술식대로 움직이면 정말로……?
- 물론 안다고 해서 바로 발동할 수 있는 진법이 아니니라. 게다가 진법을 구축하기 위해선 대량의 내공을 쏟아부을 수 있는 고수가 준비되어야 하지. 구파의 심법을 익히고 있으며, 지구력 또한 뛰어난 고수라야 한다.
- 대량의 내공이요? 지구력이라니요?
- 적어도 네 막내 사숙 정도의 힘은 갖추고 있어야, 진법의 일익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게다.
- 헉! 최소 조건이 일곱째 사숙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 그렇다.
- 그 정도 고수가 무려 일백사십사 명이나 필요하고요?
- 그렇다.
- 아니…… 세상에 그리 많은 고수들을 써서 제압해야 할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 있다. 심지어 이 진법이 사용된 적도 있다. 역사상 단 두 번뿐이었지만.
- 두 번씩이나요?! 대체 언제 말입니까?
- 한 번은 극사나찰(克邪羅刹)을 죽일 때였다.
- 극사나찰이 누구입니까?
- 오백여 년 전에 나타난 마녀를 말함이다.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지. 알려지기도 전에 구파가 합세하여 죽였으니까.
- 마녀…… 그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 구파에 진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수많은 구파의 제자들이 그 마녀의 손에 죽었느니라. 부끄럽게도, 당시 그 마녀를 이길 만한 자는 없었다.
- 그랬군요. 하면…….
- 나머지 한 명은 너도 잘 아는 이다.
- 누굽니까?
- 초대천마(初代天魔).
- ……!
- 마교의 조사(祖師)이자 마도 무림이 신(神)으로 떠받드는 이를 상대로 썼었다. 최초로 진법을 상대했던 자가 바로 그다.
- 그, 그렇군요.
- 멸마금진이라는 이름이 초대천마를 상대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찰극천이라는 이름은은 극사나찰을 상대하며 얻은 것이지.
- 하면, 그 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극사나찰은 죽었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고 하더구나. 그 마녀는 지문(地門)의 이 식(二式)까지 버텼다고 한다.
- 엄청나군요. 여기 적힌 대로라면 화경의 고수도 인문(人門)을 돌파하기 힘들다고 적혀 있는데……. 하면 초대천마는 어찌 되었습니까?
- 죽이지 못했다.
- 헉!
- 죽이지는 못했지만, 모든 힘을 증발시킬 수는 있었다. 만일 근처에 초대천마를 따르는 마인들이 없었다면, 그 역시 죽었을 것이다.
- 그 말씀은, 초대천마가 이 절진의 천문(天門)까지 깨트렸다는 것입니까?
- 깨트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말하자면 동귀어진에 가까웠다고 해야겠지.
- 정말…… 무시무시하군요.
- 비록 마(魔)에 물든 이지만, 역사에 다시 나기 힘든 이임은 분명하다. 하늘이 내린 힘의 한계를 넘은 자가 앞으로 또 나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 그럴까요?
- 걱정하지 마라. 마도 무림에서 초대천마는 정파 무림의 달마대사나 장삼봉 같은 이다. 명백한 마인이지만, 무(武)에 한해서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이라고 볼 수 있지. 네 알기로, 초대천마나 달마, 삼풍진인에 비견될 만한 이가 역사에 또 있더냐?
- 없었습니다.
- 그렇다. 대자연의 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락과 증폭을 반복한다. 무림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는 서서히 농도를 잃고 있지. 수천 년 후라면 모를까, 앞으로 그런 이들이 다시 나긴 어려울 것이다.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그랬으면 좋겠다?
- 예, 그런 신선 같은 자들이 세상에 또 나타나면…… 왠지 같은 세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패배감에 젖을 것 같거든요.
- 허허허, 걱정하지 마라. 그런 이는 나지 않을 테니까. 혹, 나타나면 어떠냐? 구파에는 멸마금진이 있지 않으냐?
- 이왕이면 쓰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법을 이루는 고수들 대부분의 목숨이 위험할 텐데.
- 그러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으셨는지,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사부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부님.’
사부의 웃는 얼굴과 호탕한 웃음소리가 점차 사라져 갔다.
그리고 광암자는 보았다.
‘이 세상에, 이 세대에 또 다른 괴물이 태어났습니다.’
쾅! 쾅! 콰앙!
거대한 도끼로 후려치는 것처럼.
양손으로 불타오르는 대도를 쥐고 사정없이 진식을 베고, 치고, 짓누르는 마왕이 보였다.
화르르륵!
그 아래, 거대한 호랑이가 전신에서 불꽃을 피워 내며 눈을 번뜩였다.
마왕이 사역하는 범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눈, 코,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앞발을 휘둘러 고수들을 위협하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지옥의 괴수다. 어찌나 인상 깊은지 이제는 윤기 넘치는 흑황의 털 사이를 타고 흐르는 핏빛 마기조차도 영롱해 보일 지경이었다.
“노사!”
광암자가 옆을 바라보았다. 영산진인이었다.
“천문(天門) 개방의 명을 내려 주시오!”
“…….”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외다! 우린 아직 마교주를 만나지도 못했소! 저 괴이한 마왕 놈을 상대하다가 내공과 생명력만 소모하게 생겼잖소!”
냉정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영산진인조차 초조함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찰극천멸마금진은 천지인(天地人)의 세 급으로 나뉘고, 각 급에서도 세 개의 식(式)으로 나뉘는 진법이었다.
애초에 화경에 오르지 못한 이는 인문의 일 식조차 버티지 못하고 즉사하고 만다. 화경에 올라 기(氣)를 활용해도 인문을 넘기 힘들 것이며, 기적적으로 지문에 올라도 일 식에서 무조건 정리되어야 정상이다.
한데 저 괴물은, 무려 지문의 삼 식(三式) 안에서도 버티고 있었다. 아니, 버티는 걸 넘어서서 광인처럼 발광을 해 대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일 수 있소이다. 보면 모르시오? 점점 놈의 힘이 쇠락하고 있소.”
“놈의 상태가 문제가 아니오! 노사께서는 마왕 놈만 보이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잊었소이까!”
광암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노사!!”
그때였다.
“커허억!”
서량이 한 사발의 피를 토해 냈다.
‘빌어먹을!’
한계다.
천마도의 선천마기를 이용해서 끊임없이 진력을 갉아먹었다. 첫 기습 이후로 적 중 누구도 죽일 수 없었지만, 진세를 유지하는 적들의 내공을 제법 소모시켰다고 생각했다.
딱 여기까지다. 그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의 싸움은 불가능했다.
‘제길, 세상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니까.’
적어도 삼사십 명은 황천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목적한 바의 이 할밖에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서량이 호왕을 내려다보았다.
호왕은 혀를 빼물고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죽을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 지체했다가는 자신은 물론 호왕까지 죽게 생겼다.
“가자!”
커허헝!
자존심이 상한 듯 짜증과 살의 가득한 포효를 내지른 호왕이 재빠르게 후방으로 빠졌다.
“엇?!”
광암자의 눈이 번뜩였다.
“놈이 물러나고 있소.”
이것도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진법의 역장 안으로 들어온 이상, 설령 신선이라도 다시 빠져나갈 수 없었으니까.
“노사! 진을 풀어 주시오!”
이번만큼은 광암자 역시 영산진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전원 해진(解陣)!”
우우우우우웅!!
반투명한 청색 진기의 구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휘이이이이잉!
바람이 거셌다. 제멋대로 일그러지던 중력이 풀어지고, 그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물 밀듯 들어오며 거친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쿠구궁!
호왕은 백 장 밖까지 물러나고서야 멈추었다.
“소교주님!”
“헉헉!”
서량이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철퍼덕 소리가 날 정도였다.
마동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심하다!’
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외상 역시 심각했다. 너덜거리는 옷 사이로 보이는 맨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진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피부가 찢어진 것이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처였다. 게다가 마기를 얼마나 소진했는지, 끔뻑이는 기파가 삼류 무사가 발하는 위압감보다도 못할 지경이었다.
“소교주님! 소교주님! 어서 운기를……!”
“쿨럭! 허억! 허억!”
서량이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이 흐려지는 듯, 두 눈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였다.
후우우웅.
어느새 서량의 옆으로 다가온 금호의 몸에서 황금빛 요기(妖氣)가 번뜩였다.
“헉!”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물러났다. 일순간 뿜어져 나오는 요기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이익!
서량의 찢어진 피부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우우우웅.
불안정하게 명멸을 반복하던 마기가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피처럼 붉은 구유마공은 자취를 감추고, 은은한 청색 광채가 서량의 전신을 덮었다.
파지지직!
“끄응!”
서량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상체를 세웠다.
‘죽을 뻔했네.’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갈 뻔했다. 의식이 날아갔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히도 금호가 늦지 않게 생기(生氣)를 되살려 줘서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싸울 상태는 아니었다.
“콜록! 미안하다. 널 부르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더라. 까딱하면 나도 죽었을 거야.”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서량이 입술을 깨물었다.
화아아악!
또다시 무시무시한 기파가 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진법은 풀었지만, 준비 태세는 여전하다. 한계까지 제련되었음에도 끝이 어딘지 모를 만큼의 순도 높은 신기가 강렬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걸 어떻게 이겨?”
구유마공의 기반이 된 암영기와 천마도의 약식 해방 덕분에 일각이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절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제기랄! 저놈들도 언제까지 기다려 주진 않을 거야. 다시 공략을 시도해 봐야 하는데…….’
문제는 자신의 몸 상태였다.
‘생각보다 더 심각해.’
암영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지만 그래도 구유마공은 마공이었다. 그것도 군림마황기와 유일하게 비빌 수 있을 정도의 고차원적인 마공이었다.
버티는 힘이 강할수록 후유증도 극심하다. 서량은 자신의 내상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함을 느꼈다.
‘당장의 회복은 불가능해. 혹, 반천축정술이라면 가능할까?’
서량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된다. 오히려 더 치명적이야.’
저 진법은 구파의 내공 이외의 기(氣)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군림마황기를 일으키는 순간 온몸이 터져 죽을 것이다. 선천에 달한 마기라면 모를까, 지금의 서량으로선 저 진법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저 진법을…….’
그때였다.
“헉!”
마동필이 벌떡 일어나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마기…… 마기가 느껴집니다!”
“뭐?!”
서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상이 너무 심해서 기감까지 죽은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빨리 오시면 안 됩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더 깎아 놔야……!’
“마존?!”
서량이 마동필을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마존?”
“예! 동쪽에서 오는 자들은…….”
마동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철검마존과 광마대입니다!”
그렇다.
동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이들은 그간 철혈성의 눈을 속이고 있었던 철검마존과 광마대였다. 중원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늘, 이천상이 세상에 나와서야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의미로 안심할 때.
‘……?’
안 그래도 먹구름이 잔뜩 껴 있던 하늘이, 더더욱 어둡게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치이이익!
서량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땅을 짚은 손, 찢어지고 갈라진 손등의 상처에서 시퍼런 마기가 불똥을 튀기며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
자신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 맹세코 그는 군림마황기를 끌어 올린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힘도 없었다.
하면 이 현상은 무엇인가?
넋을 놔서는 안 될 상황이 분명하거늘, 기묘할 정도로 정신이 나른해지는 이 알 수 없는 분위기는 무엇인가?
부르르르르!
서량의 몸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머나먼 동남쪽에서부터 느껴지는 기(氣)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오감이 무뎌지고 기감이 무너져도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이 절대의 마기.
세상을 잠식하는 어둠을 조종하는 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고, 갈라진 땅에 음영이 졌으며, 겨울의 동풍은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금호의 몸에서 피어오른 요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서량의 내외상이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수복되었다.
하지만 서량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수십 리 밖에서부터 태산처럼 묵직하게, 질풍처럼 빠르게, 용암보다도 뜨거운 광기를 품고 다가오는 이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염병, 아직 일 차전다운 일 차전은 제대로 뛰어 보지도 못했는데.”
“예?”
“선수 교체야.”
서량의 눈에 격동이 어렸다.
“교주님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