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천마강림(天魔降臨) (2)
“갈기 검은 사자(獅子)가 제법 흉악한 발톱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허허, 방장 사질은 여전하군.”
“그렇습니까.”
“전보다 아주 좋아 보이는구먼. 내상은 전부 다스렸는가?”
“예. 사백님 덕분입니다.”
“죽을 날 기다리는 늙은이가 한 것이 무에 있다고 그러시는가. 사질은 물론 본사의 중진들은 마땅히 어린 마룡에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만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다만 악(惡)에는 따르지 않을 생각이니, 그가 삿된 길로 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삿된 길이더라도, 부처의 눈으로 보면 그 또한 일리(一理)일 것이네. 끊고 내리누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무릇 승려라면 잘못된 길에 빠진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네.”
“사백님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강호의 일이라는 것이, 정말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나 역시 동감하네. 해서 마음이 아프지. 내 대에서 끝낼 수 있었다면 자네들이 잠시나마 지옥에 몸담을 일이 없었을 터인데.”
“사바세계의 분란이 사라진다면 저희 역시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겠지요.”
“허허!”
혜심의 눈에 존경의 염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본사 역사상 사백님만큼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을 대성하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혜심은 그 위치가 방장인 만큼, 소림의 승려 중 혈고에 중독된 기간이 가장 길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강호의 분란을 해결키 위해 죽을 만큼 무리를 하기도 했다.
아무리 혈고를 해독했고 소림의 공부가 출중하며, 이룬 경지가 뛰어나다 해도 족히 반년은 정양해야 할 터였다.
그런 심각한 상태였음에도 혜심이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적송에게 있었다. 적송이 한평생 익힌 반야대능력은 소림사 무상의 신공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기공이라, 혜심의 몸에 깃든 삿된 기운을 단박에 씻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적송이 고개를 저었다.
“내 비록 천하에 산재한 악(惡)을 교화하기 위해 무공을 익혔으나, 지금 와선 내 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네. 힘은 능력임과 동시에 자만을 향한 지름길이야. 부처에게 닿기 전에 승려 자격조차 잃진 않을까 걱정일세.”
“제가 감히 장담하건대, 사백께서는 필히 열반에 드실 겁니다.”
도사가 죽으면 등선하셨다고 말하듯, 승려가 죽으면 열반에 드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혜심이 말하는 열반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진짜 멸도(滅度), 해탈의 경지를 뜻함이었다.
“지금은 그조차도 내려놓았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승려로서의 내 삶이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한없이 정진하고만 싶을 뿐이네.”
“올바르십니다.”
“그건 그렇고…….”
적송이 도열한 무승들을 바라보았다.
무겁지만 유연하고, 고요하지만 화산과도 같은 힘을 품고 있는 무승들이었다. 하나같이 육 척 길이의 금빛 목곤(木棍)을 들었는데, 언뜻 보아도 비범함이 느껴졌다.
세상 사람들은 저 백여덟 명의 무승들을 백팔나한(百八羅漢)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쥐고 있는 금빛 목곤을 탕마금곤(蕩魔金棍)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소림사를 대표하는 이들이 탕마멸사(蕩魔滅邪)를 상징하는 소림의 보병(寶兵)을 들고 있다. 신목(神木)으로 만든 탕마금곤은 강철보다 단단하고 연철을 넣은 것처럼 유연했다.
적송은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장관이로고.”
수년 동안 강호에 나서지 않은 채 산사의 어른들을 수발하던 이들이었다. 그 와중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이전보다 배는 더 강렬한 기세를 풍겼다.
“내, 자네들이 쓰러져 소림을 운영하지 못할 적 나름대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더랬지. 하여 저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거늘, 언제 저렇게까지 성장했을꼬.”
“나한당주의 공이 큽니다. 언제고 소림이 세상에 나설 수 있도록 나한들을 잘 단련시켜 놓았지요.”
“그랬구먼.”
힘이란, 때론 사람을 욕망 가득한 길로 이끄는 촉발제가 된다.
그러나 그 힘이 없으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소리 높여 외칠 수 없으며, 누군가를 도우려 해도 좀처럼 쉽지 않다.
힘이 진리를 결정하는 시대에 태어난 자들의 애환이었다. 부처를 죽이기 위해 승이 된 적송이지만, 또한 소림의 자랑이라는 나한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철혈성주는, 아니 세상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혜심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경장갑주로 무장한 채 천하의 명마를 타고 다가오는 오백의 사파 무리를. 마치 황제의 군대처럼 엄정한 기세를 피워 올리는 사악한 무리를 보았다.
“불심(佛心)으로 세상을 끌어안지 못한 소림이, 진창에 구르며 사바세계의 악도들과 드잡이질을 벌일 때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백팔나한 앞에 선 정각이 외쳤다.
“투불금세(鬪佛禁勢)!”
척!
백여덟 명의 건장한 승려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왼손은 반장(半掌)을 하고, 오른손에 들린 탕마금곤은 몸 뒤로 빼 고고한 자세를 만들었다. 그저 도열해 있을 때도 대단한 박력을 자랑했지만, 자세를 잡으니 기질부터가 다르다.
우우웅.
타오른다. 금빛 진기가.
백여덟 나한이 뿜어내는 소림 정종의 신공, 대승범천신공(大乘梵天神功)의 항마진기(降魔眞氣)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사백님.”
적송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였지만 소림 최고의 고승이 일어나자 백팔나한이 발하는 기세가 배로 증폭되었다.
쿠궁!
오백 기마대가 멈추었다. 이내 선두에 선 기골이 장대한 무사가 말을 몰아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철혈성이 지금껏 세상을 속이며 키운 정예 부대 중 하나, 철신군(鐵神軍) 중 난부청군(亂斧靑軍)의 군장 부주(斧主)였다.
부주가 말 안장에 건 전부(戰斧)를 들어 올릴 때였다.
“시작하시게, 방장.”
“예.”
혜심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한들은 사마외도의 무리를 척살하여 강호의 정기가 죽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보여 주어라.”
크게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십 리 밖까지 퍼져 나갈 것 같았다. 불문의 사자후(獅子吼)를 섞은 근엄한 음공(音功)이었다.
정각이 외쳤다.
“개(開)!”
터어어엉!
백팔나한이 난부청군을 향해 질주했다.
도끼를 들고 입을 열려던 부주는 깜짝 놀랐다.
후우우우웅!
나한들의 접근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공간을 접어 가며 돌진하는 신법(身法)이 마치 축지법 같았다. 게다가 백여덟 명의 무승들이 한 몸이라도 된 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주하는 모습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부주가 외쳤다.
“전투 준비! 저 망할 중놈들을 모조리 묻어 버려라!”
“우와아아아!”
쿠르르릉!
오백 기의 기마무사들이 제각기 도끼를 들고 달려 나갔다.
두 무력 집단이 기다렸다는 듯 부딪쳤다.
콰르릉! 퍼어어엉!
폭음과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하는 전장.
침중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적송이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랑말코는 지금쯤 도착했으려나.”
* * *
“뭐, 뭐지?”
영산진인의 얼굴은 더는 냉정해 보이지 않았다.
후욱!
구름처럼 몰려드는 마기의 폭풍에 속이 다 울렁거리는 듯했다. 저 멀리 동쪽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밀려드는 마기는 무시무시한 살의로 물들어 있었다.
‘굉장한 고수다! 십대고수급이야!’
투박한 검을 연상시키는 기세였다. 산봉우리처럼 높이 솟은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대기를 갈라오며 날아오는 것 같았다.
예리하면서도 둔중한 철검(鐵劍)이었다. 한평생 보검(寶劍)의 예기 따위에 기대 본 적 없는, 평범한 철검만으로 천마신교 최강 전력으로 성장한 마존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천마신교 최악의 부대라는 광마(狂魔)가 뒤따르고 있었다.
“광암 노사! 저쪽에서……!”
“그게 문제가 아니외다.”
“무슨 말씀이시오?!”
광암자를 돌아본 영산진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핏기가 가신 광암자의 얼굴이 극한의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아이의 표정이랄까. 보일 수 없는 것을,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충격이 그 얼굴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금죽사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 노사! 이것은?!”
“이런 존재감이……!”
영산진인이 버럭 외쳤다.
“정신들 차리시오! 저기 동쪽에서 또 다른 마귀 놈들이 오고 있지 않……!”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오.”
“문제가 아니라니?”
광암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 스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마교의 조사(祖師)이자 마도 무림이 신(神)으로 떠받드는 이를 상대로 썼었다. 최초로 진법을 상대했던 자가 바로 그다.
- 걱정하지 마라. 마도 무림에서 초대천마는 정파 무림의 달마대사나 장삼봉 같은 이다.”
- 그러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스승님.’
조금 전 멸마금진을 펼쳤을 때.
비록 진법을 전력으로 펼친 것은 아니지만, 광암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세대에 찰극천멸마금진의 지문을 버틸 수 있는 고수가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저 어린 마왕은 지문의 마지막 식이라는 삼 식(三式)까지도 버텨 냈다. 시종일관 밀렸지만, 순간적인 무력 증폭으로 진법을 이루는 전대 고수 일곱 명을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도 저 마왕의 무위는 역사에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맥(脈)이 다른 정파의 신공을 익힌 자들도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즉사를 면치 못하는 판에, 마공을 익힌 몸으로 지문의 삼 식까지 버텼으니까.
한데 이건 또 무엇일까?
남동쪽에서부터 올라오는,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마력의 태풍은 누구의 것인가?
감히 마기라고 표현하기도 힘든 절대적인 힘을 다루는 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천마(天魔)?”
광암자가 금죽사태를 바라보았다.
금죽사태의 얼굴은 허망함으로 가득했다. 어린 마왕의 기(氣)는 광암자보다 늦게 알아챘던 그녀지만, 용케도 지금 다가오고 있는 규격 외의 존재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천마라고 하셨소?”
“천마…… 천마가 아니면 누가 이런 마기를…….”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손에 쥐고 있는 항마검(降魔劍)이 부르르 떨렸다.
광암자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광암자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생의 마지막으로 천마를 안고 죽으라…… 고작 그 때문에 멸마금진을 펼쳐야 하나 싶었거늘, 맹주가 우리를 출격시킨 이유가 있었구려.”
저 어린 마왕을 마교주, 천마라고 오해했다. 그리고 저 마왕은 충분히 그만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수십 리 밖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자는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인간이 맞기는 한 건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마기에 실린 ‘인기척’은 그가 분명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물론 느껴지는 마기가, 정말 마기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모두 준비하시오.”
스르릉.
진의 지문을 개방할 때도 뽑지 않았던 복마신검(伏魔神劍)을 꺼내 든 광암자가 검첨에 진기를 주입했다.
우우우우우웅!
화려한 진기로 물든 복마신검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친 검명을 토해 냈다.
“아무래도 지금 오고 있는 자야말로 우리가 처단해야 할 악(惡)의 근본인 모양이외다. 곧바로 천문(天門)을 개방할 터이니, 모두 죽을 각오를 하시오.”
반 각 후.
콰르르르릉!
끝을 모르고 펼쳐진 먹구름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그리고 마황거가 등장했다.